[언어권력의 실체] 한글과 훈민정음의 차이에 관한 사적(史籍) 고찰
2013. 6. 20. 15:57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을 세종께서 만든 글자라고 알고 말하고들 있는데, 이는 여러 측면에서 잘못된 말이다. 또 한글로 쓰인 말/문장을 한국어라고 하는 이도 많은데, 이 또한 오류를 범한 표현이다. 한민족 모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한글, 그러나 그 실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論議(론의)했던 한글박물관을 포함하여 이렇게 잘들 모르고 있는 사실들이 많다.
세종께서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은 책 이름인데, 이것이 새로운 글자들을 소개하며 사용법을 설명하다 보니까 글자이름 대신으로 쓰이게 된 것일 뿐이다. 당시 ‘정음/언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정음 28자’는 사실 세종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지난주에 살펴본 <훈민정음 해례>에서 나타나 있듯, ‘옛글자를 본따 만든 것’이지 창제(創製)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근세의 지식인 金_교헌 선생이나 한글학자 정_인보 선생도 인정하였다.
<태백일사>와 <단군세기>에 따르면, 3세 단제 가륵 시대에 3랑 을보륵이 천제의 명에 따라 ‘정음 38자’를 정리하여 올렸으며 이를 사용하여 쓴 글을 ‘가림다/가림토’라 하였고, 그 이전 환웅께서 신지 혁덕에게 ‘소릿글자를 만들라’는 명을 내려 ‘鹿圖文(록도문)’을 만들어 올렸던 기록도 나온다. <신지_비사>에는 이 글자를 만들 때 일화가 소상히 적혀 있고, 이 얘기는 근세조선 시대 북애자가 정리한 ‘규원사화’에도 들어있는데, 이 글을 신획(神劃)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세종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그 이전에 우리는 글자가 없어서 중국글자를 빌어썼다’며 ‘애민정신에 立脚(립각)하여 창제’하셨음을 엮은 맹랑한 말들이 그럴 듯하게 나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모두 정설이 아닌 내용을 공부/연구도 하지 않은 채 남이 한 말만 믿고 그런양 지껄이고 있으므로 가짜 학자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종께서는 <훈민정음> 책을 만드신 것이고, 우리에게는 뜻글자 외에도 옛 소릿글자가 있었으나 보편적으로 쉽게 쓰인 것은 아니어서,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에 불과하며 세종의 애민정신은 거룩하지만 이를 견강부회로 오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그런 허황된 말들을 시작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개화기인 서기 1883년에 유_길준의 창간사를 포함한 ‘한성순보’가 국문 납_활자로 발간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폐간되자 1886년에 이를 복간형식으로 ‘한성주보’가 창간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공포된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에 이어 1895년에 최초의 교과서 ‘국민_소학독본’이 발간되었으며, 1896년에 최초의 민간지 ‘독닙신문’이 창간{서_재필은 발간사에서 국문의 장점을 찬양하여 ‘한문’은 국문이 아니라 하면서도 ‘한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음}되었다. 그러나 전문가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 1907년 고종황제께서는 국문연구소를 만드셨고(윤_치오, 주_시경, 어_윤적, 지_석영, 유_길준 등이 활약) 국어규범의 확립 방안으로 ‘국문연구 의정안’을 마련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 의해 폐기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지식인들 위주의 진서와 뜻말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언문은 철자법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吏讀(리두)식 표기법도 계속되는 등 문자생활이 심히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李_광수는 1910년 7월에 ‘금일 아한 용문(用文)에 대하여’라는 論說(론설)을 발표한다.{1907.7.24일자 황성신문}
한편, 무단정치를 펼치던 일제가 1912년 제정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은 ‘국문연구 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따로 실태를 대상으로 성문화하였다는 핑계로 ‘표음주의’를 채택한 것이었다. 독립선언 만세운동을 계기로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제는 1921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대요’를 공표하였다. 여기에서는 어_윤적, 권_덕규 등 주_시경 학파가 제기한 표의주의 ‘형태표기’는 제기만 된 상태로 채택은 되지 못했다. 일제의 영향 아래서 2차에 걸친 수상한 조사회 전문가 구성을 통해 1930년 개정된 ‘언문철자법’에서 ‘음소표기’와 더불어 ‘표의주의 철자법’이 일부 비로소 채택되었다.
‘음소표기’는 태생적 문제가 있는 방식이고, ‘형태표기’ 또한 論難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둘 다 거부하는 새로운 무리가 바로 박_승빈 중심의 ‘조선어학_연구회’로서, 1934년에 기관지 <정음>을 창간하여 주_시경 학파 중심의 ‘조선어학회’와 결전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일제의 호위를 받는 소위 문화계 호응을 입은 ‘한글파’가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43년에 박_승빈이 타계하자, 조선어학_연구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어버렸다. 일각에서의 주장처럼 그를 친일파로 분류해야 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의 사상과 주장은 많은 식자들에게 공감을 주어 국문표기의 일맥을 이루고 있었다. 광복, 정부수립, 한국전쟁 등으로 어수선한 시대를 거친 후 친일문제를 정리하지 못한 자유당 정부가 ‘맞춤법이 너무 어려우니 쉽게 고치자’는 1954년 대통령의 ‘한글 간소화’ 담화문을 발표하자 한글학회 회원들은 극렬한 반대를 하였고, 1년여 이 문제로 인해 국내가 출렁였던 쓰라린 경험을 우리 사회는 간직하고 있다.
한글 어문규범 관련하여 어문일치나 음소표기 대 형태(소)표기 論難은 별무소득
개화기 때 국어_근대화를 위한 ‘언문(言文)일치’는 일상의 말[口頭] 표현대로 기록하자는 ‘표기 현실화’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어문(語文)일치’와는 조금 다른 뜻을 갖는다.
언어(言語)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자. 여기서 언(言)은 말[語]을 글로 기록한 것으로서 구어체와 문어체로 분류되며, 말[語]은 입말[口語, 구두어]과 글말[文語]로 구성된다. 어문(語文)일치란 다른 말로 하여, 어떤 특정 언어에서 엄연히 다를 수 있는 ‘언’과 ‘어’를 일치시키자는 뜻인 것이므로, 실제로는 불가능한 理想(리상)적인 개념일 뿐이다.{표 1에서 용례 참조.}
표 1. 언어의 구성요소와 말글살이에 쓰이는 대표적 例
언어(言語)의 구성요소 | 말글살이[語文生活] | ||
말[語] | 입말[口語, 구두어] | 글말[文語] | 구두(口頭) 표현 |
니꺼, 당신꺼, 그쪽꺼; 내꺼, 제꺼; 가져따 |
너의 것, 네것, 당신(에) 것, 그쪽(에) 것; 내 것, 제 것; 가지어따 | ||
언(言) | 구어체 | 문어체 | 기록 표현 |
당신 것; 내 것, 제 것; 가졌다 |
그대의 것; 저/소생의 것; 가지었다 |
한국의 현행 맞춤법이 일제 강력정치가 감행되며 일본어 전용운동을 펼치던 1940년에 조선어학회에서 ‘표의적 형태표기’를 표방하며 만들어진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근거하여 제ㆍ개정되어온 것을 일각에서 무조건 공격하는 경향이 있는바, 이는 별무소득이다. 북한도 이를 근거로 한 실정은 비슷하고, ‘표음주의’로 한다고 해도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표준어 규정’과 관련하여 사람마다 지방에 따라 발음도 일정치 않아 오직 사회/공개_적 약속으로 합리/체계_적 해결점을 찾아야 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주_시경 학파의 우월적 권위성이 아니라 학술/철학적 근거에서 재론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입말과 발음에 관한 ‘표준어규정’에서 ‘표준어’라는 모호한 개념 대신 ‘문화인들이 사용하는 젊잖은 말’이란 뜻으로 ‘문화어’라 바꾸고 여기에 ‘차용어’항목을 넣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외국어휘 한글표기’규정을 새로 제정하고,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국민이 사용하기 쉽도록 개정하여 완성해야 한다. 또 맞춤법을 위해서는 입말보다는 우선 글말을 중심으로 일제잔재 영향을 벗고 학술적으로 음운론을 고려하여 많은 규정들을 쉽고 새롭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리 하여야 비로소 어문규범집이 국가표준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