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관정 참여후기
얼마전 ‘신과함께’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분들이 불교의 윤회와 인과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를 떠나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에 감흥이 없지않을 것이다. 요즘 점점 절에 오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불자가 떨어져나가는데 이렇게 불교가 영화화되어 자연스럽게 문화로 다가가는 것은 효과적인 포교가 되겠다. 만드는 사람들이야 오랜시간동안 엉청난 고민과 고생을 했을 터이지만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았으니 고생을 능가하는 보람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 관정에 처음으로 참여하고 나서 받은 느낌을 간단하게 ‘영화한편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중생의 업은 신구의(身口意)로 짓는다는 것에 힌트를 얻어서 새로운 신구의를 지어보기를 시도하는 한 것이 티벳불교의 관정이라고본다. 부처님은 꿰뚫음 경(A6:63)에서 “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라고 업을 정의 한다. 인간들이 하루하루 지어가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은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달라질게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도로 자연스럽게 새로운 업을 짓게 된다면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티벳불교를 관찰하기 위해서 제3의 관찰자 시점에서 관정식에 참석한 나도 뜻하지 않게 새로운 신구의 삼업을 굴리는 시간을 갖었다. 관정은 ‘서원 발하기’ ‘약속하기’로 진행되기 때문이기에 분명 그 순간 새로운 업을 지은 것이다.
마음으로는 불보살의 이미지를 만들고, 입으로는 소리(만트라)를 만들고, 몸으로는 동작(수인,우슬착지등)을 하면서 서원을 발한다. 스승의 안내로 새로운 업을 지어보는 것은 심리치료를 위한 상황극과도 닮았다. 리더는 가르침을 들었는가? 이해했는가? 원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낸다.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 주며 부처님 역할을 하는 스승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겠다. 티벳불교에서 스승에 대한 귀의를 넣어 삼귀의(三歸依) 대신에 사귀의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혜선인(수메다)이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았듯이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과 서원은 부처님과의 약속이다. 만달라궁의 오방불에 꽃을 던져서 인연이 있는 부처님을 확인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께 묶어두려는 트릭처럼 보였다. 누가 어떻게 꽃을 던지든 꽃이 부처님앞에 떨어질 확률은 100%이기에.
존자님은 심오한 내용을 농담하면서 차를 마시면서, 빠르고 혹은 느리게, 최대한 관정에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진행하였다. 관정도중에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관정받은 것을 비밀에 지키라는 것,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머리가 7조각으로 부숴지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은 거부감이 들었다. 금강경을 만든 자들이 금강경을 전파하면 핍박을 받을 줄 알고 경전안에 핍박을 받게 되면 그것은 업을 소멸하는 것이니 더욱 전파에 힘쓰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관정이라는 특별함이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듯하다. 관정에 사용되는 상징적인 도구들, 인연이 만나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요령, 번개같은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저, 소라고동, 보관, 감로수, 빨간끈, 나뭇잎등 각각의 상징도구는 신구의 삼업을 실제적으로 굴리는데 도움을 준다. 이미지 사용법은 칠보탑을 수천개 수만개 만들 수 있는 효과적인 공덕짓기이자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와 현실이 신구의 삼업을 굴리는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강경이 4구게를 독송하는 것이 칠보탑을 조성하는 것보다 공덕이 크다고 말하는 것에 비견된다. 우리나라에서 지내는 49재에 나오는 수인, 진언, 작법등이 모두 밀교에서 신구의를 사용하는 것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확인 하였고 관정에서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듯이 49재도 완맨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해되었다. 49재와 천도재는 참석대중과 함께 새로운 신구의 삼업을 굴리는 인연의 장소, 수행의 계기가 되어야한다.
대승불교의 모든 출발점은 부처님 되기를 열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서원 발하기, 이타심 발하기, 삼신(三身)에 대한 믿음등 모든 것이 ‘보리심’이란 한마디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부처님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때리지 말라’는 법구경의 한구절이 나를 이롭게하는 행동은 괴로움의 원인이고 남을 이롭게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는 알아차림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억겁의 윤회속에서 모두 나의 부모형제였음므로 나만의 해탈을 구하기보다는 모두가 해탈하는 보살행을 해야한다는 마음의 흐름을 만든다.
새로운 신구의 업을 굴려보는 시간, 그래서 영화한편보고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듯이 지속적인 이미지의 생산, 만트라의 반복으로 수행을 삼을 수도 있겠다. 이것은 선정을 닦기위해 이미지를 사용하고 불법승 삼보를 염하는 수행에서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대승이 강조하는 불교의 시각화, 청각화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영화처럼 현시대에 환영 받으리라고 본다. 비밀지킬 것을 강조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구절등을 제거한다면 새로운 업짓기는 창조적인 생각, 인문학적 상상력을 되살리는 것이 각광받는 시대에 인기있는 포교방법이자 수행방법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2600년 불교역사를 한번에 살펴볼 수 있는 지금, 대승가르침이 부처님이 초기경전의 말씀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 그래서 빠알리 경전과 부처님의 직계 아라한들을 소승으로 치부하는 것은 다시 비판적으로 사유해야할 대목이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훨훨 날아가는 새가 되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에서 너의 고통으로 넘어가는 지점, ‘괴로움의 소멸’이 ‘보리심 발하기’로 표현되는 지점, 이해보다 믿음이 강조되는 것들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600년동안 나타난 어느시대의 불교이든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의 변주곡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