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략 | ||||||
배타주의의 몇 가지 속성 배타주의는 권력의 주된 속성이다. 어떤 집단이든 권력을 가지면, 그 힘으로 세상과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이미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도 않는다. 적지 않은 국회의원 지망생들이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선거에 거듭 나서는 이유도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해서다. 이런 배타적 권력에의 집착이 정적, 경쟁업체, 심지어 다른 종교까지 공격하는 근원이 된다. 배타주의는 타자, 즉 상대방(적)이 있어야 성립된다. 그리스 철학가들로부터 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서구는 이원론에 입각하여 상대를 배타하는 것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고, 인간은 적, 아니면 아 둘로만 분류된다. 세계는(정) 늘 반대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며(반), 이것과의 투쟁 과정에서 역사의 진보가 이뤄진다.(합) 헤겔의 변증법에서부터 헌팅턴의 문명충돌론까지 이런 배타주의적 속성에 신물이 난 서구인들이 현대 들어 불교와 동양의 조화론적 세계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할는지 모른다. 반드시 타자가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배타주의의 속성 탓에 배타주의자들은 늘 적의 위협을 과장하여 두려움을 조장하고, 심지어 가상의 적을 설정하기도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수천만 명을 학살한 중세 제국주의 국가들은 ‘인디언들에 사로잡히면 산채로 머리를 벗기어져 죽게 된다’는 소문을 날조하여 병사들을 광기로 내몰았다. 오히려 그런 만행을 일삼은 것은 제국주의 군대였다. 가톨릭은 그리스도의 적인 그들을 죽여도 좋다고 면죄부를 주었다.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등 전쟁과 학살의 근원에는 예외 없이 남을 대하는 배타주의의 극한이 자리해왔다. 이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은 진정한 위협이 되지 못하는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면, 도무지 위협적이지 않은 대상이라도 꼼짝없이 적으로 둔갑시켜서라도 전쟁을 강행하곤 했다. 베트남 참전의 시발이 되었던 통킹만 사건이 대표적이다. 미국 정부는 참전에 반대하는 국내여론을 돌리기 위해 북베트남이 통킹만의 미군함에 어뢰를 발사했다는 소위 통킹만 사건을 일으켰다. 분노한 미국인들의 여론은 참전으로 변하였고, 베트남전이 개전되었다. 수십 년이 지나 통킹만 사건이 베트남 참전 여론을 얻기 위한 미국 정부의 공작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미 죄 없는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된 후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묵인하겠다는 사인을 보내 침략을 방조하고, 갑자기 안면을 바꾸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아버지 부시, 사업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사우디의 부호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뻔히 갈 것을 알면서 출국을 묵인하고, 나중에 빈 라덴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아들 부시 등의 행태 등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배타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또한 권력의 배타주의가 얼마나 쉽게 현대의 대중들에게 전이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준다. 배타주의는 두려움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배타주의자 스스로의 두려움이 자신들을 광기로 내몰 뿐만 아니라, 내부를 단속하기 위해 그들은 대중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세계적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을 때 틱 낫한 스님은 그들의 두려움에 준엄한 질책을 보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틱 스님은 “부시와 블레어의 얼굴을 보면 겁에 질린 토끼가 생각난다. 그들은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툭하면 전쟁 불사를 외치는 배타주의의 전사들…. 조갑제, 지만원, 유태영과 같은 한국의 보수인사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있는 김정일(그가 굳이 주석이 아닌 국방위원장직을 갖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에게서는 늘 두려움이 넘쳐난다.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배타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두려움의 원천에 대한 그들의 집요한 공격은 그치지 않는다. 적이 사라지면 배타주의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이들의 두려움은 끝이 없어 금방 또 다른 적을 만든다. 그들 스스로 진정한 적인 자신의 과장된 두려움과 배타주의를 적으로 삼지 않는 한 말이다. 배타주의가 민족이나 나라로 확산되면 대개 결과는 전쟁으로 귀결된다. 안타깝게도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 18개월 만에 한반도를 금세 전쟁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저절로 온 것이 아니다. 대통령과 같은 교회를 다니는 유태영 이스라엘 협회장(소망교회 장로)은 얼마 전 “이스라엘처럼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이명박 정부와 우리 사회 기득권층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극도의 배타적 시각, 전쟁 불사의 배타주의를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이스라엘을 동경하든 안하든 그것은 자유지만, 그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민족 모두를 파멸로 몰고 갈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전쟁, 테러, 내전과 같은 불길이 붙으면 그 참혹한 결과는 최하 수십 년이 간다. 부모 형제가 죽고 죽임을 당해 보복과 증오에서 허우적거렸던 지난 60년도 모자라, 다가올 60년도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더구나 과거와 달리 핵위협까지 있어 민족 전체가 공멸할 것이 뻔한 상황인데도 전쟁을 선동하는 것은 무자비한 배타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다. 미국이 이길 것이라는 맹신 하나로 이 땅의 힘없는 백성들을 다 전쟁으로 몰고가는 어리석음도 빼놓을 수 없다. 배타주의에 우리가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의 가장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피해자가 될 평범한 교인들, 군출신들에게 증오와 두려움을 심고, 적을 섬멸함만이 애국이라는 극단의 배타주의의 진원지에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이 있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배타주의에 잠시 현혹된 사이 전쟁의 참상으로 한 발짝 밀려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보수 개신교계의 집요한 배타성이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이명박 정부가 실용과는 정반대의 대북강경책을 펼치는 배경에 자꾸 상대를 적으로 몰고가는 배타성, 그 배타성의 이면에 북한을 사탄이라고 보는 종교근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제 의문을 던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배타주의의 상징이 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광우병 파동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대다수 한국인들은 사안 그 자체의 경중보다 그것을 다루는 대통령의 태도에 분노한다. 절대로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그의 정치행위를 비판하는데서 나아가 아예 그의 인간성에 대한 경멸이 넘쳐 난다. 한 인터넷 언론의 칼럼을 옮겨보겠다. 국세청은 한상률 전임 청장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삭제한 직원에게 ‘품위 유지 의무’를 위배했다는 이유로 중징계할 작정이라고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황지우 전 총장이 "밤늦게까지 일하고서 보직교수들과 3년간 인근의 멕시칸바베큐치킨에서 30여 차례에 걸쳐 맥주 한두 잔 마신 것을 두고, 유인촌 장관은 황지우 총장이 룸싸롱에서 280만 원을 유용했다는 식으로 언론에 흘렸다"고 한다. 진중권 교수의 과목은 학교가 없앤 것인데, "강의를 안 했으니 연봉의 절반을 돌려받으라"고 문화관광부는 학교를 압박 중이라고 한다. KBS 심의실은 "뮤직비디오 마지막 장면에서 멤버들이 도로의 노란 선을 밟고 걷는 장면이 교통법규 위반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윤도현의 뮤직비디오를 방송 불가로 판정했다고 한다. ‘불온서적’ 지정에 관해 헌법소원을 낸 법무관을 파면한 국방부, 용역의 폭력에 밀린 세입자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하자마자 ‘도시게릴라’로 간주해 신속하게 경관 한 명의 희생까지 무릅쓰고 진압한 서울경찰청도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정연주 KBS 사장 해임, 전윤철 감사원장 사퇴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당파 싸움 중에서도 최악의 말폐 증상에 해당하는 짓거리들이 오늘날 재현되고 있다. (프레시안 박동천 칼럼 ‘비겁한 사람들’)
이명박 대통령은 4대 권력-정치권력, 경제(기업)권력, 언론권력, 종교권력-의 연합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 그가 벽창호처럼 소통을 거부하는 것도 4대 권력의 튼튼한 기반을 자신하기 때문이다.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에 올랐지만 그조차 미약했고, 임기 내내 경제권력, 언론권력, 종교권력에게 왕따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권위주의 시절이라면 대통령이라는 정치권력을 이용해 3대 권력을 굴복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는 과거로의 회귀를 거부했다. 임기 말에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던 노 전 대통령의 언급에서, 시장은 거대 기업권력이나 언론권력을 함께 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업권력, 언론권력과 계속 맞섰던 노 전 대통령은 그러나 사립학교법이나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등이 종교권력의 반대로 좌초되었을 때도 종교권력과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경제권력,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세력이 사회 내에 일정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종교권력에 대한 비판세력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아직 종교권력은 제대로 된 도전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고매한 신앙으로 권력자를 훈계하거나 위안할 수 있는 특권을 덤으로 가지면서 이 땅에서 종교권력은 누군가에게 제일 숨기 좋은 그늘이자 성역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취임 이후 행적을 보면 그가 유일의 성역인 종교권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포항시의 예산 1%를 성시화운동에 쓰겠다고 하여 포항시민 수만 명의 항의에도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던(18개월 후에 경북도지사 후보에 출마하면서 사과문을 발표하여 더 빈축을 샀다.) 정장식 전 포항시장을 중앙공무원교육원장(차관급)에 임명한 이 대통령은 불교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밀어주었다. 그는 중앙공무원교육원장이 된 후 성시화운동을 열심히 하러 다니면서 보은했다. 지난해 종교차별 문제로 불교계의 항의가 빗발치던 때 방한한 부시 대통령과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조용기 목사를 불러 기도를 하게 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왔을 때는 하고 많은 합창단 중에서도 CBS합창단을 불러 만찬 축가를 부르게 했다. 그의 측근인 KBS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8.15 경축음악회를 찬송가음악회로 만들어버렸다. 정부의 8. 15 행사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광복절이라는 이름 대신 끝내 건국절이란 이름으로 강행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일들이 불교계의 항의가 빗발치고, 국민들 대다수가 거기에 동의하던 바로 그 때에도 쉼 없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을 성공주의자의 전형으로만 봐서는 그가 지금 행하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정치행위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성공주의자들에 비해 확실한 무언가 한 가지를 더 갖고 있다. 필자는 그것이 신앙이 기반이 된 배타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련으로 무시해버릴 줄 아는, 나아가 그 무시를 용기라고 끊임없이 자기암시를 할 수 있는 전도된 신앙심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대통령의 벽창호 리더십이 설명되지 않는다. 말단 공무원까지 끝끝내 물고 늘어져 보복을 하고야마는, 치졸해보이기까지 한 행위의 이면에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종교적 배타성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층인 보수 개신교는 한국 내에서 배타주의를 확산시킨 진원지로서 큰 책임이 있다. 종교자유의 상징적 인물이 된 강의석씨(당시 대광고 재학)의 2심 재판 결과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종교행위를 강요한 것이 부당하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강의석씨에 대해 서울고법은 예배 및 기도 강요, 종교를 이유로 한 차별행위 등 학교 측의 숱한 인권침해적 행위들이 모두 무죄라고 판결했다. 무죄 판결 이유가 걸작이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학교 측의 종교교육이 싫으면 다른 친구처럼 전학을 갈 수 있었는데도 왜 전학을 가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조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불교학교에서 염불과 절을 강요하면서 그를 거부하는 학생을 퇴학시켰다면, 보수 개신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싸움을 불사했을 것이다. 역지사지는커녕 몰상식한 판결을 내린 판사는 더구나 대광고가 속한 교단의 장로였다. 당시에는 그가 설마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는 재판을 자청해 맡았을 거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법부의 최근 행태를 보니 충분히 그랬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난해에는 검찰 수사관이 피의자에게 “하나님 믿고 죄 사함 받으라”고 해서 물의를 빚은 일도 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인권침해이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보수 개신교계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헌법의 파수꾼이어야 할 사법부에서조차 법보다 종교적 신념이 앞서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행태를 지적하면, 오히려 “그것이 대체 무슨 문제냐”며, 삐딱한 이들의 흠집내기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은 시대,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배타주의의 강력한 진원지가 권력이 된 상황에서 배타주의가 사회 전체에 확산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개신교 배타주의의 상징은 성시화운동이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벌이고 있는 성시화운동은 배타주의의 화약고와 같다. 성시화운동본부가 펴낸 지침서에는 "신자가 아닌 도시민은 도시를 떠나게 한다"는 표현이 노골적으로 담겨져 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은 아예 쫓아내겠다는 이런 공격성은 중세 기독교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대다수 개신교인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이런 배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목회자가 한국에서는 놀랍게도 90%를 넘는다고 한다. 모든 원인을 개신교로 돌릴 수는 없다. 불필요하게 폄하하거나 배격할 필요도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개신교는 분명히 근대화의 주역이었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직업윤리로 국민의 근면성을 키우고, 약자를 돌보고 불의에 항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복지와 민주화에 큰 동력이었다. 근대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만심으로, 나아가 권력을 구하는 오만으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미 개신교 스스로 근대화 과정에서 역할한 공로로 다방면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더 큰 배타적 권력을 누리겠다고 한다. 대다수 개신교인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이런 속내를 은폐하기 위해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더더욱 적을 만들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노무현이 사라진 오늘 그들에게 지상최대의 적은 북한이다. 불과 18개월 만에 전쟁의 위협 속으로 들어간 나라의 현실은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적은 누가 될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돈이 최고라는 배금주의에 빠진 다수 국민들의 성공지상주의가 이명박 대통령을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톡톡히 배워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신정일치를 꿈꾸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지지 하에서 대통령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 텃밭에 서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행동을 예측할 때, 종교적 배타주의가 빠지면 틀릴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하였던 바다. 이번에 종교지도자들이 청와대에 모여 부른 MB어천가처럼, 아무리 많은 국민이 반대하여도 ‘주의 시험이니 개의치 말고 밀어붙이시라’고 위로해줄 종교인들이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는 너무 많다. 또한 그들은 너무도 강력하고 은밀한 성역을 이미 구축해 놓아 숨기에 충분하다. 그럴수록, 합리적인 논리, 이성이 도무지 파고들 수 없는 검은 성역이 되어 갈수록 무너짐도 더 빨리 오는 것이다. 불교이든 개신교이든 가톨릭이든 말이다. 배타성은 그 때 자신을 지키고, 확장하는 수단에서 자신을 소멸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임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모두의 불행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
'세상에 말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상률 비판 나주 세무서 김동일 (0) | 2009.06.15 |
---|---|
이광재 “몇 번이나 더 거절해야 하나” (0) | 2009.06.12 |
경향-조선·동아, 언소주 불매운동 놓고 ‘맞짱’ (0) | 2009.06.12 |
[스크랩]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지식소매상 유시민 (0) | 2009.06.11 |
불교-보수 개신교, '너무 다른 시국선언' (0) | 2009.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