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글을 쓰는 마음은 편안하지 않다.
자꾸 횡설수설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나아가기로 한다.
횡설수설하는 내 마음을 따라가서
역시 거기에 있을 “횡설수설하는 나”를 경험해 보기 위함이다.
내가 자신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전에 이야기 한 것처럼 나는
“어려운 일이지요”
라는 말로 어려운 위기를 많이 넘겼다.
위기란 다른 것이 아니다. 고민과 방황을 줄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속에서 우리는 동지애를 느끼고, 고독함을 즐겼고 나약함과 패배감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속편한 타협이었다.
어려운 일을 어려운 일이라고 인정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남아있지 않은 그런 가벼움과 솔직함 속에서 나는 가을 말(horse)처럼 살찌워 졌다.
그렇다. “어렵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니고 “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닌 애매한 말이라서 [숨어있기에 좋은 방]이었다.
그때 그때의 진실....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겠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방법은 다만 그때 그때의 진실이었다. 의도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숨어있는 의도를 발견하게 되는, 한번 울고 한번 웃는 일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글의 결론을 알고 있는 듯하다.
글쓰기라는 작업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내기, 견해를 확고하게 하기, 감정을 완화 시키기...등의 나름대로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론 추진력을 완화 시키기, 입장을 모호하게 하기...등의 단점도 지니고 있다.
내 마음을 따라가면서 쓰는 글쓰기인 까닭에 나의 글은 곧잘 “모호하게 하기”에 동참 하지만 “모호하게 되어감 조차 바라보기”를 하고 있음으로 고양이에게 �기는 쥐처럼 황망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나의 글은 “강요하기”가 될듯하다.
설득하기와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론 윽박지르기, 단언하기, 귀막기도 나의 천성이다. 다만 이러한 방법은 매번마다 유혹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효과면에서 비효과적이기 때문에 나는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묻는다.
“어렵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경험했다.”
혹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이 말들은 [어렵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했다]는 것, [안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다.
그러므로 어렵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유는
“아는 것에 대하여....”
“경험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써놓은 그 문장들이 지니는 의미를 말하고자 함인 것이다.
전번에 이야기 했던 참된 가치, 삶의 목적...등등의 이야기는, 단 하나, [아는 것]으로 귀결 된다.
여기서 갑자기 [이해한 만큼 사랑할 수 있다]라든가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결론적으로 불쑥 꺼내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 이다. 하지만 줄기 없는 열매가 존재 할 수 없듯이 과정 없는 결론은 당황스럽다. 나는 참을성 있게 과정을 이야기 해야 한다.
만약 여행지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이 말들을 툭 던져주고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으로 나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내 취향은 이런 것이다. 나에게는 삶이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 글 쓰는 방법은, 그러하면 안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경험을 통해서 안다.
이야기가 여기 가지 흘러와서
이야기의 주제가
“아는 것이란 무엇인가?”
“앎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야기 주제에 따분해하지 않고 심드렁해 하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우고, 호기심에 차서 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는 생각에 미칠 때 나는 걱정이 된다.
나는 쉬운 이야기 들이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사람들이 [아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여, 이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사람을 왜 의아해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의 처음 망설임은 이런 진부함을 어떻게 떨쳐내고 가야 할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연유 한다.
사실, [삶의 목적]이나 [아는 것]의 문제는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처럼, 꼬마들이 여기 저기에서 손 들며 앞 다투어 이야기 하고 싶어하는 것이고, 하나는 대학교 철학시간에 [앎으로부터의 혁명]에 대해 발표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사려깊은 이야기가 될만 한 것이다. 같은 주제인데도....이렇게 느낌이 다르니 대상과 주제에 따라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 주제를 [아는 것이란 무엇인가]에서 [모른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꾸어 보고자 한다.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앎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경구를 인용하는 것은, 이야기 하는 차원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상식적으로 모른다는 것은 안다는 것처럼 명백한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고,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 냄새 맡지 못했고, 맛보지 못했고 , 촉감을 느끼지 못했고, 생각해보지 못한 것, 생각해 보았으나 이해되지 못한 것, 이것이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되지 않은 것을 [모른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모르는 것 초차 모르고 있다면, 모른다는 말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른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 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모르는 사람과 사과의 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사과를 모르는 사람은 사과라는 것을 보지 못하여 사과의 모양 크기 색깔을 모른다는 것이고 사과의 맛을 모른다는 것은 사과를 보기는 했어도 먹어보지 않아서 맛을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차원도 앎의 차원만큼 다양하게 전개됨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인간은 [안다]로 전환시키는가?
사과의 경우에는 과일시장에 가서 사과를 하나 달라고 말하고 그 사과를 사서 한입 배어 물면 사과와 사과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이렇게 앎의 경로는 뚜렷이 존재한다. 맛 보아야 할 것은 맛보아야 하고 냄새 맡아야 할 것은 냄새 맡아야 한다. 만져 보아야 할 것은 만져 보아야 하고 이해 되어야 할 것은 이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안다]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이렇게 직접 경험되어지는 것만 있다면 [안다]는 문제가 아주 쉬운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경험 되어지지 않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안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럴 때는 안다는 것은 어떤 경로를 가지게 되는가?
그때 안다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경로는 추측, 가정, 가설이다.
추측이란 무엇인가? 추측이란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지금 까지 파악된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모르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담장 넘어로 뿔이 2개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담장 밖에 소가 지나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건너 마을에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건너 마을에 불이 났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지식은 직접적인 앎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서는 일반적으로 상식으로 인정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식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설왕설래가 되어 우왕좌왕하게 된다하더라도 해결책은 있다. 담장 밖으로 뛰어나가 보고 이웃마을로 찾아가 보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확인 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토론 하는 경우에 발생한다. 나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주제의 토론에 대하여 입을 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제에 입을 다물 수도 없다. 이유는 이렇다.
이러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배타적이 되고 독단적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이 바로 나의 부모요, 형제요, 선배후배요, 이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묘하게도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도 안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알지 못할 때, 확실하지 않을 때, 그럴 때에도 우리의 앎은 완성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알려지지 않더라도 이미 그러한 상태를 이미지화 시킨 우리에게는 이미지화된 상태를 희구하는 심리작용이 작용한다. 이를 일러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잘 알지 못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갖게 되는 기대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하는 이유들은 여럿이다.
오랜 전통이라는 이유로, 전설과 신화라는 이유로, 역사라는 이유로, 잘 알려진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추종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런 믿음이 희망을 준다는 이유로.....우리에게 믿음은 다가온다.
여기서 믿음의 이유가 되는 것으로 열거한 여러 가지 것들은 하나하나가 다 만만한 것은 아니다. 전통이라는 이유로 ,충성이라는 이유로, 우리 민족이라는 이유로, 인류가 자신의 목숨을 던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은 다시 대화를 단절시키고 상대를 무가치하게 만들고는 다만 선택을 강요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의 앎을 구성하는 이러한 이유들을 반성해보고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요구된다. 이럴 때 솔직하게 [삶의 목적]과 [아는 것] 과 [모르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경로는 어떤 것일까?
겸허해야 한다.
솔직해야 한다.
진지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
이럴 때 다만 “어려운 일이지요 ”라고
판단중지를 해보라.
모르는 사실에 대하여 섣불리 움켜잡고 견고하게 담을 쌓기 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울음을 터뜨리는 갓난아기 처럼 우리는 다만 가슴 속 깊이, 목이 터져라 울어야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렇게 철저히 모르는 채 우리는 울었었다. 우리는 다시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고는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것에서는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는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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