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만행기- 개심사-마곡사
4월 11일
개심사 개산대제에 참여하고자 개심사 보현선원에 머물다.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온 선일스님과 심운스님과 저녁에 차담을 나누었다. 다음날 오후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괘불을 옮기지 못하고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프린트 괘불을 내 걸었다. 종각을 옮기는 불사를 끝내고 치르는 행사이기에 누각 앞마당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아미타 복장유물도 전시하고 수덕사 방장스님도 법문하고 민속 춤, 노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사람이 많이 방문하여 셔틀버스를 운행하였다. 개심사 여자 화장실에는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화장실은 정전이 되어 많은 분들이 불편해 하였다. 청소년들이 참여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도 아쉽다. 아미타불 복장에서 나온 수많은 문화재를 누각에서 전시하였는데 서산 서령고에 다닌다는 고등학생이 많이 문화재를 이렇게 전시하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였다. 복장물중에서는 이천오백여명이 참여한 기록이 나온 발원문은 한국에서 발견된 발원문중에서 가장 많이 참여한 기록이라고한다. 이 아미타불은 국보로 승격이 되길 기다리고있다. 여러종류(4종류)의 발원문들이 발견되었는데 발원문이 각기 다른 시대에 작성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4월 12일
개심사를 떠나서 공부 마곡사에 들렸다. 몇 년전에 2023년 5월에 마곡사에 들렸다가 ‘마곡사 안내판 유감’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에 다시 들려보니 그때 사천왕상의 설명에 대해서 지적한 안내판이 아직도 수정되어있지 않았다. 주지스님등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마당에서 등접수를 받고있는 비구니 스님에게 하룻 밤 묵어가고 싶다고 하니 원주스님에게 전달하겠다고한다. 금방 원주스님이 와서 템플스테이용 방을 안내해 주었다. 방에 들어와서 서로 큰절로 인사를 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그 스님은 방만 안내하고 사라졌다. 늦게야 재무스님과는 서로 안면이 있다는 기억하였다. 재무스님은 군왕대에 들려보길 권했다. 마곡사에 여러번 왔지만 군왕대를 방문하기는 처음이다.
조선조 세조는 은둔중인 김시습을 발탁하려 마곡사를 찾았는데 매월당이 그를 피해 부여 무량사로 떠났다. 세조는 허허로움을 달래고자 산신각(국사전) 뒤편 군왕대를 올랐다.이곳에 오른 세조는 '내가 왕이지만 만세불망지지(萬世不忘之地)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하며 탄복했다고 한다. 그후로 군왕대에는 입신양명을 위한 기도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세조는 비록 김시습을 만나지 못했지만 군왕대 아래에 있는 영산전의 현판을 쓰고떠났다. 마곡사에서는 매년 10월 이곳에서 군왕대재를 개최하고 이곳에 기를 받는 템플스테이 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이런 명당을 그동안 모르다가 하룻밤 숙박하게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 방문하게 된다.
영산전에는 특이하게도 과거 칠불(七佛)이 모셔져 있다. 과거 칠불은 서가모니불을 포함하여 7명인데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비파시불(毘婆尸佛,Vipassī),시기불(尸棄佛,Sikhī), 비사부불(毘舎浮佛,Vessabhū),구류손불(倶留孫佛,Kakusandha),구나함모니불(倶那含牟尼佛,Koṇāgamana),가섭불(迦葉佛,Kassapa)을 모셔놓았다. 칠불의 배경에는 천불(千佛)의 불상을 모셔놓았다. 천불의 부처님은 조금씩 얼굴이 다른데 다른곳에서 오백나한과 비슷하게 보인다. 전하는 말로는 영산전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나서 눈을 떴을 때 눈에 들어오는 불상의 얼굴이 앞으로 만나게될 연인의 얼굴이라고한다. 천불(千佛)은 모두 남성이므로 기도후에 나타나는 부처님을 닮은 미래의 연인은 여자에게만 해당 될 것 같다. 아무튼 많은 여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마곡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여럿이다. 대웅보전에는 기둥이 4개가 있는데 죽어서 염라대왕에게 가면 "이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는 묻는다고한다. 많이 돌았으면 극락으로, 돌지 않았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마곡사 대웅보전의 기둥이 싸리나무인지 염라대왕이 왜 그렇게 묻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 재미있는 이야기 덕에 기둥이 껴안아 보는 사람들이 많다. 대광보전 마루에는 대나무 돗자리가 있는데 앉은 뱅이가 백일동안 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카펫트로 덮어 놓아서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마곡사에는 건물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마곡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은 백범김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김구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고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탈옥해 은신처를 전전하던 시절, 마곡사로 피신하였다. 허은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4년동안 머물렀다고한다. 1946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돌아온 김구 선생은 다시 마곡사를 방문했다.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있고,그가 머물던 건물이 있고, 그가 쓴 불(佛)가 있고, 그가 삭발을 했던 '삭발바위'가 있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내가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적었다. 요즘처럼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인정 받는 시대에 그의 혜안이 높아보인다. 마곡사에서는 백범 김구를 기리는 다례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마곡사에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이야기도 깃들어있다. 1937년 만공스님이 마곡사의 주지로 지낼 때, 조선총독부에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려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 당시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전 수상이 조선불교를 진흥한 공이 크다"고 칭찬하며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자, 그 자리에서 “청정(淸淨)이 본연(本然)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묻고, 곧이어서 '데라우치 총독은 우리 불교를 망친 인물로 큰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간 아비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만공스님이 마곡사의 주지였다는 것은 마곡사의 자랑이다. 마곡사는 또 불화(佛畫)를 그리는 스님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한다.
마곡사에서 부전스님 두분을 만났다. 모두 법당에 기도하는 부전스님이었는데 나의 기고문을 읽었고 <야단법석TV>에서 내가 방송하는 것을 보았다고했다. 부전스님과 차를 마시며 부전스님들의 애환을 들었다. 요즘 조계종스님들이 부족해서 태고종등 타 종단 스님들이 조계종의 사찰에서 부전으로 근무하고 있다고한다. 조계종스님이지만 자기보다 먼저 근무하고 있는 타종단 스님을 만나면 그 스님아래서 교육을 받고 지침을 들어야 하는게 수고롭단다. 또한 부전스님 모집 광고를 내는 포교국장이나 교무국장스님이 자기보다 법랍이 한참 어린데 그 스님들에게 면접을 보고, 그 스님들에게 염불을 못한다고 꾸중들을 때 자존심이 상한다고한다. 절에서는 법랍이 높으면 법랍이 적은 스님들이 선배로 모셔야하는데 지금 세태는 권력의 순서로 질서가 정해지는듯하다. 대개 부전스님의 법랍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세속의 나이가 비슷하면 바로 동등한 세속의 나이로 부전스님을 제압한다고한다. 그래서 부전스님들은 세속의 나이를 말하기 꺼려한다고한다. 부전스님들은 법당보살님이나 공양주보살님 한테도 무시를 당하는 일이 많다고한다. 주지스님이 부전스님을 종업원으로 대하기에 보살님들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대하는것 같다. 부전스님은 월 4일이 휴무이고 월급(월보시)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