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와 승려
검사와 승려
검사와 승려는 집단성이 강하다는 점과 공심(公心)과 명예를 중요시 여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검사 집단과 승려 집단을 비교해 보려는 생각을 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몇 년전 당시 김진태 검찰총장과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골프를 치는 모습이다. 자승은 벙거지를 쓰고 웃고 있다. 이 두 사나이가 서로 친해서 골프를 친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 뒤 자승에게 벌어진 일이 문제다. 불교계 시민단체는 자승의 저지른 각종 비리들 즉, 종단의 이름으로 생산한 감로수 수입금을 횡령한 것, 도박을 함께한 장주스님이 자승스님과 함께 도박을 했다고 폭로하고 자승의 도박장 개설에 대해서 고소한 것, 자승이 본사 주지선거 종회의원선거에 개입한것에 대한 고소고발이 검찰에서 번번히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러 결과에 불교계에는 검사들이 자승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였고, 자승은 종단에서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갖게 되었다. 검사와 승려가 서로 친하면 나타나는 모습이다.
한반도의 불교가 전해진지 1900년 동안 불교는 인간의 사유방식과 삶과 죽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대한민국 곳곳에 명산대찰이 들어섰고, 문화재의 60%가 불교 문화재가 되었으며, 현재 천년고찰에서 진행되는 템플스테이는 국민들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불교가 정신적인 영향을 끼쳐왔다면 현재 사회에서는 검찰이 기소권과 불기권을 가지고 국민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만들지 않기도 한다. 왕조 시대에 왕이 갖는 권력을 이제는 검사가 갖게되어 검사가 사건을 잘 파헤치면 명예를 얻고 사건을 덮어주면 부(富)를 얻는다는 말이 공공연하다. 검사는 세간에서 그리고 불교의 승려는 출세간에서 각각 인간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정의(定義)를 실현하는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현재 검사 집단이나 승려 집단이 본분을 망각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 조계종의 종헌에서 '승려는 사유 재산을 금지한다'고 되어 있지만 승려들이 비싼 자가용을 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새삼스럽지 않다. 명산대찰이라는 수행도량은 그들에게 수입을 창출하는 사업장이 되었다. 얼마전에 칠장사 전각을 불태우고 자살한 자승 승려가 종단권력을 움켜쥐고 종단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데도 승려 집단에서는 너무도 조용하였다. 자승을 따라다닌 승려들 중에는 꽤 괜찮았던 승려들도 있었다. 단, 그들이 돈을 쫓는 순간부터 자승과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말 끝마다 법과 원칙을 부르짓는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자신과 자신의 아내에게는 너무나 관대하고 상대편에게는 가혹하다. 현재 검사들은 그런 정권의 비리를 감추는 사냥개와 애완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작 검사 집단에서는 너무도 조용하다. 검사 집단이나 승려 집단이 불의(不義)를 보고도 침묵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비슷하다는 점이 이 글을 쓰게했다.
검사 집단과 승려 집단이 제 본분을 저버리고 살고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위기상황이다. 공심(公心)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사심(私心)으로 살아갈 때 우리사회에 벌어지는 일들은 참담하다. 탐욕을 쫓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맹세한 승려들이 초심을 망각하고 탐욕의 길을 가고있고, 사회 정의와 공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검사들이 초심을 망각하고 돈과 권력을 쫓고 있다. 이 둘은 너무나 닮은 쌍둥이처럼 보인다. 요즘 승려 집단에서는 출가자가 줄어든다고 난리다. 출가자가 줄어드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겠다고 맹세하는 출가자가 줄어드는게 더 문제가 아닐까? 부와 권력을 쫓는 출가자가 더 늘어 난다면 오히려 승려 수가 줄어드는게 더 바람직하리라.
지금 전국에서 큰 스님 소리를 듣는 스님들은 말 끝마다 방하착(放下着)하라고, "내려 놓으라"고 가르치지만,정작 그들 중에는 가난한 스님들이 없다. 큰 스님이 되려면 돈(錢)과 도(道)를 같이 갖어야 하는 새로운 규범이라도 생긴 듯하다. 승려가 가난하게 살더라도 거지처럼 살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조계종에는 1900년동안 전승되어 온 3000여개의 사찰이 있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임야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지 않는 대신에 매년 국가로부터 500억이 넘는 보조금을 받고 있고, 고찰(古刹)에서는 임야 임대료, 주차료등 지속적인 수입원이 있다. 이러한 수입원이 없는 시절에도 신도들이 승려들을 먹여살린 것이 1900년 불교 역사이다.
승려가 가난해도 종단은 공유재산이 많기에 승려의 의식주는 해결된다. 문제는 현재 사찰의 공유물이 모든 승려들에게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승가의 풍족한 공유물이 모든 승려들에게 개방되고 평등하게 사용되는 승단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자. 그 방법으로 대중공의를 모아 총무원장 직선제를 도입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행제도에서도 승려들이 돈으로 표를 팔고 사지 않으면 된다. 승려가 표를 돈으로 팔고 사니 선거가 끝나면 승려가 범죄자가 된다. 모두 범죄자가 되었는데 누가 누구를 비판한단 말인가? 종단에서 비판적인 목소리가 사라지게된 이유다. 승려가 표를 판 것은 승려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공심(公心)을 판 것이다.
승려들이 공심(公心)을 가지고 건강한 승단을 가꾸는 일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며, 종단의 주인으로 사는 길(隨處作主)이며, 그 자체가 수행이다. 검찰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깨어있는 국민들이 많아서 검찰청을 해체하는 수준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는 점이다. 그러나 승려 집단을 개혁해야 할 승려들과 불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2024년 9월 30일 해인사 방장을 선출하는 산중총회에서 모 승려가 돈을 주고 표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그 중에서 한 두명의 승려라도 돈을 받았다는 양심선언을 해서 돈을 주는 자들에게 철퇴를 내리기 바란다.
돈 주고 표를 팔고 사는 일을 계속 하면서 이 땅에서 불교가 부흥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돈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어 도저히 주지 않을 수 없다면, 자기들이 원하는 방장을 모시고자하는 사람들이 서로 협의하여 선거에 뿌릴 돈을 조계종 선거관리위원회에 맡기는 방법이있다. 모임에 오는 승려들에게 1년치 약값과 생활비 명목으로 그 돈을 지출한다면 승려들이 양심을 팔지 않고도 당당하게 양심에따라 방장을 선출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 날의 보시는 승보공양이 되어 모두가 승리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 승려라면 선거에서 이기거나 지더라도 떳떳하게 임하자. 양심을 파는 돈 선거를 그만 두는 것, 그것이 무너지는 승가를 살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