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믿음(saddha)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믿음 (saddha) 이란 무엇인가?
2024년 8월 <온라인불자회>에서 밀린다팡하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믿음'에 대한 토론을 한 인연으로 다시 믿음에 대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세나는 믿음(saddha)의 특징을 "믿음은 정화(淨化,sampasādana)와 뛰어듦(sampakkhandana)을 특징으로 한다.“라고 설명한다. 나가세나의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누군가에게 믿음이 생겼다면 그는 ‘마음이 밝고 청정해짐’과 ‘수행을 시작하려는 용기가 생겼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신의 종교와 불교의 믿음은 같은 것일까?
믿음이 생겼다는 측면에서는 같을 수도있겠고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는 측면에서는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차이를 알고 싶다면 "믿음은 왜 생기는가?"라는 것을 밝혀보면 될 것이다. 불교경전을 살펴보면 믿음이 생기는 이유를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삿다(saddha)를 의미한다.
마하까싸빠나 수닷타 장자처럼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믿음이 생기는 경우가 있고, 오비구처럼 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이해하여 생기는 믿음도 있다. 먼저 “비구들이여, 나의 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믿음(saddhā)이 깊은 자는 왁깔리가 으뜸이다.”라는 말처럼 부처님을 만나서 무조건적인 믿음을 생긴 제자들이 있다. 마하까싸빠의 경우도 부처님을 만나서 아무런 설법을 듣지도 않고, 다만 부처님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서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라고 고백한 이들도 있다.
“나는 출가하여 라자가하와 날란다 사이에 있는 대로를 따라 걷다가 바후뿟따 탑묘[多子塔]에 앉아 계신 세존을 뵈었소. 그분을 뵙자 내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소. ‘내가 뵌 스승, 이 분이 바로 세존일 것이다.’라고. 나는 거기서 세존의 발에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린 뒤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 의복경(S16:11)
이렇게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고 바로 제자는 스승을 알아보고, 스승은 제자를 알아보는 관계는 매우 특이하다. 아마도 과거의 어떤 인연이 있었다는 것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기원정사를 지은 수닷타 장자도 라자가하에 장사차 왔다가 ’부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너무 기뻐서 그날 밤 잠을 거의 못자고 다음 날 새벽에 죽림정사를 찾아가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두 번째는 오비구와 대다수의 제자들처럼 설법을 듣고 믿음을 가지는 경우다. 우루웰라에서 같이 고행을 하던 오비구는 싯타르타가 고행을 포기하자 "고따마가 타락했다" 비난하며 녹야원으로 떠나갔다. 부처님은 그들을 찾아가서 설득한다. 처음에 오비구는 싯타르타에게 말을 걸지 말고 환영도 하지 말자고 다집했지만, 부처님의 달라진 얼굴과 거듭된 설득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차례대로 법의 눈을 뜬다.
" 세존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리에 앉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사에게 차제설법(anupubbiṁ katha)을 설했다.곧, 보시에 대한 이야기(dānakathaṁ),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aṁ),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saggakathaṁ),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kāmānaṁ ādīnavaṁ), ·타락·오염과( okāraṁ saṅkilesaṁ),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nekkhamme ānisaṁsaṁ)에 대하여 설명 했다.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사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율장 마하박가)
이렇게 법을 듣고 이해가 되어서 출가자 혹은 재가신자가 되겠다고 고백하는 사례는 너무도 많다. 연유 경(S12:23)에서 다음과 같은 차례로 믿음이 생긴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소멸할 때 그 소멸에 대한 지혜에는 연유가 있다. 무엇이 소멸의 지혜(khaye ñāṇaṁ)의 연유인가? 해탈(Vimuttī)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해탈의 연유인가? 갈애의 떠남(Virāga)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갈애의 떠남의 연유인가? 염오(Nibbidā)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염오의 연유인가? 있는 그대로 알고 봄[Yathābhūtañāṇadassana,如實知見]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의 연유인가? 삼매(samādhi)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삼매의 연유인가? 행복(sukha)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행복의 연유인가? 청정함(passaddhi)이라고 말해야 한다.무엇이 청정함의 연유인가? 희열(piti)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희열의 연유인가? 만족(pamojja,환희)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환희의 연유인가? 믿음(Saddhā)이라고 말해야 한다. 무엇이 믿음의 연유인가? 괴로움(Dukkha)이라고 말해야 한다.무엇이 괴로움의 연유인가? 태어남(jātī)이라고 말해야 한다.
괴로움(Dukkha)에서 믿음(Saddhā)이 생긴다는 표현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으므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것을 짱끼 경(M95)에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스승을 조사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법들로부터 청정함을 관찰한 후에 그는 그 에게 믿음이(saddhaṁ) 확립된다(niveseti)., 믿음이 생긴 자(saddhājāto)는 그를 친견한다. 친견하면서 공경한다. 공경하면서 귀를 기우린다. 귀 기울이면서 법을 배운다. 배우고 나서 법을 호지한다. 호지한 법들의 뜻을 자세히 살펴본다.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의가 생긴다. 열의가 생길 때에 시도한다.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 본다.”
일반적인 믿음은 설법을 듣고, 스스로 조사하고 탐구하여 생기는 믿음이다. 스승에게 믿음을 가질 때도 스승을 여러모로 조사해보고 믿음을 가져야한다. 불교의 믿음은 주먹을 쥐고서 이 주먹안에 무엇이 있다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펴보여 주면서 믿으라는 것이다.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체험으로 알게되면 삿다(saddha)는 깨끗한 믿음(淨信,pasada)이 된다. 이와 반대로 창조자, 신(GOOD),불성(佛性), 주인공, 한물건 등의 용어는 주먹을 쥐고서 믿으라는 태도이다. 우리가 한번도 눈으로 보지못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주먹안에 무엇이 있는가?하고 상상하게 만들고 추측하게 만드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승불교가 이러한 부처님의 언어 사용과 반대되는 길을 간 것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부처님은 "ooo이 없는 상태", "ooo이 아닌 상태"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지금 여기"를 떠나지 않게 한다. 백프로 부정적인 표현만 사용할 수 없어 부처님이 가끔 긍정적인 표현도 사용하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표현들은 모두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처럼 비유로서 사용되고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빠알리어 번역자들중에서 삿다(saddha)가 아닌 다른 단어들을 '믿음'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주는 경우가 있다.하나의 예로 숫따니빠따(Stn559)에서 부처님은 ”비라흐민이여, 나에게 믿음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때 믿음은 삿다(saddha)가 아니라 아디무짜쑤(adhimuccassu)이다. 동사 아디무짜띠(Adhimuccati)가 정착하다, 마음을 정하다, 명확히 하다라는 뜻이므로 이 문장은 “비라흐민이여, 그대의 마음을 명확히 하시오(make up your mind, brahmin)”라는 뜻이다. 이러한 단어를 마치 삿다(saddha)의 번역인 것처럼 “믿음을 가지십시오”라고 번역하는 것은 부처님의 정체성을 혼란하게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허락하실 때도 "그대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 자, 믿음(saddhaṁ)을 버려라(pamuñcantu )."라고 말한 것처럼 부처님은 한번도 "나를 믿으시오!"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