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개혁

강성용 교수의 불사(不死)에 대한 이해

후박나무 (허정) 2024. 5. 7. 10:43

 

강성용 교수의 불사(不死)에 대한 이해

 

올해 2월에 유튜브에서 부처님이 불사(不死)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하는 동영상을 2시간동안 보게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의 초청으로 서울대 강성용교수가 강의한 것이다.  강 교수는 불사(P.amata, Sk.amṛta)는 부처님이 성도후 외도 수행자인 우빠까를 만났을 때 자신은 불사(不死)를 얻었다라고 말하는 곳에서 처음 나타난다고 말한다.그는 불사의 의미를 베다전통에서 찾아 설명하였다. 그러다보니 강의 내용은 바라문교에서 장례의식과 아귀(P.petaSk.preta)들이 윤회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이 중심이 되었다. 불교의 불사(amata)를 설명하기 위해서 베다의 제사전통의  불사(不死)를  설명하는 것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부처님이 사용한 언어는 기존의 단어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추가한다. 이 점을 모르고 베다전통이나 어원에서 불사(不死)를 설명하는 것은 부처님이 불사를 오해할 뿐이다.

 

불사(amata)라는 단어는 성도후 범천이 부처님께 세번 권청 하는 대목에서 처음 나타난다. 범천은 부처님께 "불사의(amatassa)  문을 열어젖히소서!"라고 요청한다. 범천은 불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불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걸까? 범천이 부처님이 얻은 정각의 내용을 알고서 불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범천도 붓다와 동등한 성자 일 것이다.부처님이 정등각을 얻고도 설법을 주저하자 사함빠띠가 마음으로 알고 부처님앞에 나타나서 아래와 같이 간청한다.

 

"때묻은 자들이 생각해낸 부정한 가르침이

일찍이 마가다 인들에게 퍼져있으니,

불사의(amatassa)  문(dvāraṁ)을 열어젖히소서! 그들이 듣게 하소서!”

 

이렇게 범천이 세 번 간청하자 부처님은 드디어 설법을 허락한다.

 

"그들에게 불사(amata)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불사(amata)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당시 인도의 사문 바라문들의 수행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인간세상에 비교하면 거의 무량한 수명을 갖고 있던 사함빠띠는 경험상으로 부처님이 궁극의 수행목표를 성취했음을 직감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은 그 자아가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게된다. 그가 수행을 하더라도 그러한 목표를 세우게된다. 불소행찬에서 부처님의 아내 야쇼다라는 고따마 싯타르타가 출가 수행하는 이유가 천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고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이 천상에 태어나 영원히 살기를 바란 것처럼 지금도 상주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에 태어나서 영원히 사는 것을 바라고있다. 범천도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에 같은 생각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범천과 부처님이 다 같이 불사(amata)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내용은 다르다. 경에서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용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를 종종보게된다.

 

 

베다에서 사용되던 삼사라(samsara), 업(kamma)등의 용어도 불교경전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의미는 다르다. 같은 단어라는 측면에서 전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의미가 다르다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단어인 것이다. 힌두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이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 뜻이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자신을 '고행주의자', '극단주의자'라고 소개하고서는 나는 탐진치를 버리는 고행을하고, 탐진치를 버리는 극단을 실천하기에 고행주의자요, 극단주의자라고 설명한다. '고행주의자', '극단주의자'라는 말에 갇히면 부처님도 부처님이 비판한 외도들과 같다고 오해하게된다.  몇몇 학자들은 단어가 같이 나타나는 것을 두고 윤회라는 사상은 불교의 것이 아니라 힌두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가 윤회를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하기도한다.

 

부처님은 그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때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Loke samaññaṃ)'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고 어떤 때는 '성자의 율(ariyassa vinaye, 賢聖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표현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란 '무아를 깨달은 부처님도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습에 따라 "그가 나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개는 천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자의 율'이란 로히땃사 경(S2:26)에서 로히땃사는 세상(loka)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 먹고 자고 대소변을 보는 동안에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  죽을 때가지 쉼없이 달렸지만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물음에 달려서 세상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답하면서 또한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는 괴로움의 소멸시키지 못한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나는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상과 세상의 발생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음을 가르친다."라는 말한다. 이때 로히땃사가 사용하는 세상과 부처님이 사용하는 세상은 같은 단어이지만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부처님은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을 세상이라고 새롭게 규정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 부처님은 불사(amata)와 같은 동의어를 33개나 설명하고있다.

그 단어들은 무위(無爲,Asankhata),종극(終極,anta),무루(無漏,anāsava),피안(彼岸,pāra),극묘(極妙,nipuna),극난견(克難見,sududdasa),불노(不老,Ajaratta),견고(堅固,dhuva),조견(照見,apalokita),무견(無見,anidassana),무희론(無戱論,nippapa),적정(寂靜,santa),불사(不死,Amata),극묘(極妙,panīta),지복(至福,siva),안은(安檼,khema),애진(愛盡,tanhakkhayo),희유(稀有,acchariyaṃ),미증유(未曾有,abbhuta),무재(無災,Anītika),무재법(無災法,anītikadhamma),열반(涅槃,nibbāna),무에(無恚,Abyāpajjho),이탐(離貪,virāgo),청정(淸淨,suddhi),해탈(解脫,mutti),무착(無着,anālayo),(,Dīpo),동굴(洞窟,lena),피난처(避難處,tāna),귀의처(歸依處,sarana),구경(究竟,parayana)등이다.

 

 

이 많은 단어들 중에서 늙지 않음(不老,Ajaratta)이라는 단어는 불사(不死,Amata)와 마찬가지로 영생을 염원하는 자들의 수행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극(終極,anta),피안(彼岸,pāra), 구경(究竟,parayana) 이라는 단어들은 수행의 목적지에 도착함, 수행의 성취이라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Dīpo),동굴(洞窟,lena),피난처(避難處,tāna)라는 단어는 생로병사라는 사바세계의 위험한 바다에서 안전한  의지처, 피난처,안식처를 얻었다는 비유일 것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고, 능히 경험하는 비유로 깨달음을 설명하게 된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들어 보인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을 보고서는 열반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열반(涅槃,nibbāna)이나 해탈(解脫,mutti)도 비유적인 단어이다. 불어서 끈다라는 의미와 '벗어 난다'라는 의미만 가지고는 깨달음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갈애의 부서짐(愛盡,tanhakkhayo),분노하지 않음(無恚,Abyāpajjho),탐욕을 버림(離貪,virāgo), 번뇌가 없음(無着,anālayo)등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거나 열반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없음이다라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정의하고있다. 비유로 사용한 불사(amata)라는 등의 열반의 동의어는 단어를 연구하고 어원과 어근을 분석해도 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불교이전에 베다에서 사용한 불사(amata)를 연구한다고 해도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은 드러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자신을 지칭할때도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대한 사문(mahāsamaṇo), 현자(vijānatan), 위대한 영웅(mahāvīrā), 여래(tathāgatā), 사람인 용왕(Manussanāgo), 선인(isi), 앙기라사(aṅgīrasa,放光者), 위대한 사문(mahāsamaṇa), 브라흐마나(brāhmaṇa)등 부처님을 지칭하는 이러한 단어들은 기존에 인도사회에서 사용하던 단어들이었다.이 때도 이름은 같지만 내용은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경전의 언어는 읽고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단어의 뜻만을 연구하면 크게 오해하게된다. 불교 이전에 인도에서 사용했으니까 불교 경전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널리 통용되는 단어로 자신을 지칭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覚), 영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 가장 높은 분(無上士),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마지막으로 전국비구니회 스님들도 승가안에서 스님들끼리 이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고나서 해결이 어려울때 재가자를 초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강 교수가 베다에 나타난 제사의식을 설명하고나서 불사(不死,Amata)를  '모든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넘기는 일'이라고 정리하는 것이 도대체 부처님의 깨달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러한 결론은 그 의 비유처럼 #라면에 대한 이야기이지 #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 있다(atthi)와 없다(natthi)  VS 상견(atthita)과 단견(natthita)

https://whoami555.tistory.com/13742451

 

 

*윤회를 증거하는 경전들

https://whoami555.tistory.com/13742594

 

 

 

 

 

 

https://youtu.be/G2NJKe2eRV4?si=aDRyDrmoVgs0KB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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