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투쟁
숙박투쟁
며칠전 볼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 서울에 올라가면 늘 걱정되는 일은 ‘어디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가’하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엔 스님들은 사찰에서 머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도시의 사찰에 객실(客室)을 준비하고 있는 사찰은 거의 없다. 조계종단에는 전국에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25개의 큰 사찰이 있는데 이것을 교구(敎區)본사(本寺)라고한다. 내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던 날 선배스님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는 이제 전국에 있는 수천개의 콘도 평생회원권을 가지게 된거야!” 비구가 되면 조계종 소속 삼천여개의 사찰에서 머물고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선배스님은 콘도 회원권에 비유한 것이다. 출가하여 비구스님, 비구니스님이 되면 어째서 모든 사찰에서 숙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가? 부처님이 처음부터 모든 사찰을 공유물(共有物)로 보시 받았고 지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지리산 백장선원 다각실에서 스님들과 서울에 가면 어디에서 머물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였다. 한 스님이 조계사에 가면 템플스테이 하는 곳에서 하룻밤 잘 수 있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몇 년전에 조계사에 들려서 숙박하려고 문의하니 템플스테이용 방을 주더라는 것이다. 다만 일반인들이 내는 돈의 절반 정도인 삼만원을 내야한다고 덧붙였다. 그 스님의 말을 듣고 이번에 조계사를 찾아갔다. 조계사 사찰안내소를 찾아가서 저는 지리산의 어느 사찰에서 올라왔는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상대로 종무소 직원은 저희는 객실은 없고 다만 템플스테이 사무실에 가서 문의 하라고 대답하였다. 템플스테이 사무실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물으니 오늘은 예약손님이 있어서 방이 없다고 하였다. 강남 봉은사등 몇몇 사찰에 전화를 해 보았는데 결론은 모두 객실이 없고 절에서 잘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종단의 직영사찰인 봉은사의 주지도 총무원장이다. 결국 이번에도 사찰 근처에 있는 숙박업소를 찾아가서 머물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조계사에 객실이 없는 것과 일반 사찰에서 객실이 없는 것은 차이가 크다. 조계사는 제 1교구본사이자 조계종 총본산으로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로 되어있다. 개인 사찰은 사찰의 사정과 운영방침에 따라 객실을 마련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이 주지인 조계사가 객실을 운영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총무원장이 스님들을 절에서 자지 못하게 하는데 다른 어느 사찰에서 스님들을 재워주겠는가? 불자(佛子)라는 단어에서도 알수 있듯이 비구 비구니는 부처님의 아들딸이다. 종단의 지도자가 불자(佛子)를 거지 취급하면서 숙박을 거부하는데 누가 출가자를 존중하겠는가? 절집에 들어온지도 30년이 넘고 종사(宗師)라는 품계를 받은 나조차도 사찰에서 숙박할 수 없는데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는 젊은 스님들은 어떠할까?
사실 기존의 스님들은 언제부터인가 절에서 잘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사찰을 찾아가서 숙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있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오면 절을 찾아가지 않고 모텔이나 호텔로 직행한다. 사찰을 찾아가서 문의하면 숙박을 거절 당할 것이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자신의 권리를 쉽게 포기하고 있다. 이러한 포기는 곧바로 뒤에 출가하는 후배들에게 이어진다. 스님들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 없다면 도대체 사찰은 누굴위해서 필요한가? 종단은 왜 필요하고 총무원은 왜 필요한가? 사찰은 재가자들의 템플스테이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스님이 스님을 존중하지 않으면 불교는 쇠망한다. 나는 지속적으로 ‘승가의 의미와 역할’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번역을 비판해왔다. ‘승가’를 ‘스님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승가공동체의 무너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공의로 운영되는 승가는 승려가 주인이다. 승가구성원이 모두 참여하여 절차에 맞게 대중공의를 모으는 것이 화합승가의 핵심이다. 현전승가, 대중공사, 결계, 백사갈마, 만장일치, 다수결등은 대중공의를 모으기 위한 방법이다. 승가의 의미를 알때 승려가 승가의 주인이된다. 주인으로 살때 주인의 언행이 나온다. 주인의 언행은 사찰에 객실을 마련해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총무원장, 방장 조실등 어른 스님들에게 모텔이나 호텔에 머무르지 않도록 사찰에 객실을 마련해 놓으리고 요구해야한다. 승려법에 "본인이나 세속의 가족을 위하여 개인 명의의 재산을 취득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되어 있는데 승려들을 모텔이나 호텔로 쫓는다면 사실상 승려들에게 재산취득을 강요하고 있는게 아닌가? 승려들을 절에서 재워주지 않는다면 부처님이 율장에서 설명한 객스님 맞이하는 법, 객스님들이 사찰에서 머무르는 법같은 설명들은 무용지물이된다. ‘승가의 의미와 역할’을 알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숙박투쟁’이다. 스님들이 절에서 숙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승가공동체가 무너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스님들이 스님들을 존중하지 않고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지금 출가자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종단은 젊은 이들에게 우리종단에 출가하면 이런저런 혜택을 주겠다고 출가자 모집 광고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출가하여 사찰을 방문하면 문전박대를 당하고 숙박을 거절당할 것이다. 출가를 원하는 젊은 이들은 절에서 하룻밤 숙박하기를 청해도 심지어 돈을 주고 자고 싶다고 말해도 거절 당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렇게 표리부동한 승가 공동체에 그들은 얼마나 실망할까? 출가는 ‘영원한 자유를 찾아가는 날개 짓’이라며 출가자를 모집하는 포스터를 붙이고 출가를 장려하는 종단의 행위가 사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승가’의 의미를 알고부터 나는 언제나 절에 가서 하룻밤을 묵기를 청한다. 늘 방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문전박대를 받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출가자의 ‘권리찾기’이다. ‘숙박투쟁’이다.
스님들이여 당당하게 객실을 마련하라는 숙박투쟁을 하자. 객실을 마련하여 두지 않아서 스님들을 모텔로 내쫓는 사찰의 주지는 당장 파면하도록 요구해야한다. 이것은 승려복지이다. 이것은 승가회복이다. 이것이 승가화합이다. 이것이 포교의 첫출발이다. 물질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에 감감적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가는 출가자는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 이러한 출가자들을 네온싸인이 번쩍거리는 모텔주변을 어슬렁거리게 해서야 되겠는가? 조계종단에서 가지고 있는 수천만평의 산림(山林)과 명산대찰과 전답(田畓)과 관람료와 주차장 임대료는 어디에 사용하는가? 스님들을 절에서 재워주지 않으면서 ‘전법합시다’, ‘출가자를 모집 합니다’라는 정책들을 펼치는 것은 불자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종단개혁이나 승가회복이 거창한 일이 아니다. 스님들이 스님들을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전통사찰에 객실을 마련하는 것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