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가 없다’는 실상사 법회에 참석하고
‘윤회가 없다’는 실상사 법회에 참석하고
3월 17일 실상사에서 익산 사자암 향봉스님을 모시고 법회가 있었다. 백장암 다각실에 공지가 있어서 벽송사에 머물고있는 선일스님과 참석하게 되었다. 백장암 대중스님들이 참석하기로 했는데 막상 참석한이는 둘인 것 같았다. 공지에 ‘많은 분 참석바랍니다’라는 공지도 있었지만 나는 작년 7월에 ‘승복을 입은 단멸론자’라는 기고문을 쓴 인연이 있기에 의무감으로 참석하였다. 기조발언 1시간하고 질의응답 1시간 한다는 공지와는 다르게 기조발언은 1시간 30분이나 이어져서 질의 응답 시간은 30분으로 줄었다. 향봉스님은 조현기자의 유튜브 동영상에 출연한 이래로 불광출판사등 여러 곳에서 윤회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오고 있다. 경전을 제대로 읽어보면 감히 그런 주장을 못할 것인데 자신의 사견을 말하는데 어찌그리 용감한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 향봉스님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도법스님과 박수로 환호하는 법회참석 대중을 보니 정말 이곳이 실상사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향봉스님이 사견(邪見)을 주장하는데도 가는 곳마다 박수를 받고 환영받으니 정말 한국불교가 어찌 이리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승복을 입은 단멸론자’등에서 윤회를 말하는 네가지 경전을 다시 언급하였다.
부처님이 직접 오도송에서 당신이 윤회해 왔음을 밝히는 있다. 그 오도송에 많은 생(anekajati), 윤회(saṁsāra), 거듭되는(punappuna)태어남(jati)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어있다.
첫째 “많은 생(anekajati)을 윤회(saṁsāra)하면서 나는 치달려왔네.
집 짓는 자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거듭되는(punappuna)태어남(jati)은 괴로움이었네.
집 짓는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졌도다.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지붕도 파괴 되었다.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 버렸다.” (법구경153~154번게송)
둘째 부처님은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을 가진 비구 비구니의 이름을 특별히 거론하고있다.
“비구들이여, 나의 성문 비구들 가운데서 전생을 기억하는 것에서 으뜸인 자는 소비따(sobhita)이다. 비구들이여, 나의 성문 비구니들 가운데서 전생을 기억하는 것에서 으뜸인 자는 '밧다 까삘라니(Bhaddā Kapilānī )'이다.”
셋째 날라까빠나 경(M68)에서 “아누룻다들이여, ‘여래가 아무개는 이런 곳에 태어났다. 아무개는 저런 곳에 태어났다.’라고 임종한 제자의 재생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거나, 사람들에게 발림 말을 하기 위한 것이거나,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이와 같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겠지.’라는 이유 때문도 아니다. 아누룻다들이여, 그것은 믿음과 큰 기쁨과 큰 환희를 가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이익과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 부처님이 설명하는 육신통에서 전생(pubbenivāsa)을 기억(anussati)하는 지혜(ñāṇa) 즉, “그는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합니다. 즉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가 수축하는 여러 겁, 세계가 팽창하는 여러 겁, 세계가 수축하고 팽창하는 여러 겁을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 다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졌고, 이런 종족이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이런 행복과 고통을 경험했고, 이런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
시간이 없어서 이렇게 네 가지 정도를 말했는데 향봉스님은 이러한 경전 인용에 대해 대답이나 언급은 하지 않고 기존에 주장하던 기복불교 비판을 계속했다. 나는 나의 견해를 말한게 아니고 경전을 인용했다. 윤회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윤회가 있다는 경전을 소개하면 적어도 ’그런 경전이 있었느냐?‘ ’그런 경전을 못 믿겠다‘는등 경전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 되는게 아닌가? 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시간을 끌다가 허무하게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게 하는가? 밀린다 왕문경에 나오는 것처럼 ’현자와의 대화‘를 하자더니 이런게 ’현자와의 대화‘인가? 정말 그곳에 참석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법석이었다. 같이 참석했던 스님은 윤회는 없다는 법회를 끝내고, 다음 법회는 “백일법문” “티벳 사자의 서”를 공부한다고 실상사측의 공지를 듣고 코메디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금방 윤회는 없다고 말하는 스님을 불러서 법회를 마치고서 다시 누구보다도 윤회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성철스님의 “백일 법문”을 공부하겠다고 말하고, 윤회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자의 서”를 공부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코메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동영상을 시청한 한 스님은 법회에서는 천도재 지내고 연등다는 기복불교를 비판하고 나서 공지에서 연등접수 받는 말을 들었다며 이런 모순을 못 느끼는 것같다고 지적하였다.
이번 법회에서 도법스님에 대한 실망이 크다. 실상사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토론과 공부모임을 이끌어온 도법스님이 윤회가 없다는 향봉스님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번 삶이 끝이라면 열심히 수행하고 착하게 산 사람이나 도둑질, 살인, 방화등 갖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죽으면 똑 결과를 맞는다. 이렇게 결과가 같다면 왜 우리는 수행을 열심히 해야하는가? 죽으면 그만인데 부처님은 왜 그리 감각기능의 단속을 말하고, 계를 지키라고 한 것인가? 이런게 과연 도법스님의 불교란 말인가? 자신들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말하는 선배스님들, 그런 사람을 초청해서 박수치며 설법을 듣는 대중들, 참으로 실상사 법회는 실망스럽고 한탄스러웠다.
*이 글을 보고 반론을 하고 싶다면 향봉스님이나 도법스님이나 누구든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