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8일~1월5일-법보신문의 자승스님 자살 찬양기사-1.2.3
자승에 대한 평가를 넘어 칭송작업을 법보신문 남수연 편집국장이 3회에 걸쳐 하였다.
다른 신문들에게서는 하지 않는 이일을 법보신문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보신문의 이러한 작업 때문에 나는 아래에 같이 #법보신문거부운동을 시작하였다. 혼자 서라도 나는 이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법보신문이 얼마나 알아서 자승을 미화했는지 얼마나 마음에 안드는 댓글을 지웠는지, 법보신문이 얼마나 자승의 미화하여 승가공동체를 파괴하였는지 기록하려한다. 잘못된 언론을 단죄하는 것에서부터 종단개혁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불자들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할수 있는게 없다고 포기하고 했던 비난을 되풀이 하지 말고, 법보신문 거부운동에 적극 동참해주기 바란다. 법보신문의 흑역사가 될 이 기사를 박제해두고 법보신문의 만행을 끝까지 고발하고 책임을 물으려한다.이런 기사를 쓰는 그 들은 불자도 아니고 기자도 못된다.
법보신문의 찬양과 칭송기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 우리가 자승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해야한다. 현재 종단에 제2의 자승 제3의 자승이 되고자하는 자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49재(1월16일)이후에 자승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제대로된 평가를 하려면 자승이 죽은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준비된 소신공양…더 이상 구할 것 없는 견처 보인 격외의 회향”
[파격의 입적, 자승 대종사와 한국불교] ①자승 스님 입적 어떻게 볼 것인가
“죽음에 끌려가지 않아야” 평소 당부…“보여주기·흉내 불가능한 경지”
유서·기자간담회·격려모임 등 주변도 챙겨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선사들 대부분 자발적 입적 선택…“행정·사판승 이미지에 가려진 이면”
‘생사가 없다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 구나.’(자승 스님 열반송)
12월3일, 겨울바람 시린 서울 조계사 마당에서 봉행된 자승 스님의 영결식장엔 안타까움과 무거운 혼란이 교차했다. 자승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던진 충격이 세간과 출세간 모두에 컸기 때문이다.
11월29일 늦은 밤, 원적 소식이 알려지고 조계사에 분향소가 차려지는 동안 스님의 행적이 하나둘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성 칠장사 CCTV에는 입적 당일 자승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손수 차량을 운전해 오후 3시11분 안성 칠장사에 도착한 스님은 주지스님을 만나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주지스님이 요사채 문을 열어 주고 자리를 떠난 직후인 4시24분, 자승 스님은 몰고 온 차 트렁크에서 하얀색 플라스틱 통 2개를 꺼내 들고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1분 후 자승 스님은 다시 밖으로 나와 CCTV 쪽을 바라보다가 요사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시간 반쯤 지나 다시 한번 밖으로 나왔다. 2분가량을 머문 후 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마지막으로 요사채 문을 한 번 더 열어 우두커니 밖을 내다본 후 곧 문을 닫았다. 1분 후 요사채에서는 연기와 함께 순식간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후 6시43분이었다.
자승 스님은 칠장사 요사채에 들어간 후 2시간 20분 남짓 동안 무려 3차례나 문밖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하늘을 응시하기도 했다. CCTV에 확인된 스님의 모습은 마치 그 모든 행위가 자유 의지에서 비롯됐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스님의 입적을 두고 설왕설래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신(燒身)’이라는, 범인의 상식을 넘어선 스님의 선택은, 갑작스런 입적에 대한 충격 못지않게 매스컴의 이목을 끌었다. 갖가지 의혹과 추측들이 ‘왜’라는 질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영상이 스님의 마지막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줬지만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세간의 혼돈을 가름하고 나선 이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었다. 종단장이 확정된 다음 날인 12월1일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 분향소에서 이례적으로 예정에 없던 말문을 열었다.
“수행자 스님들의 삶은, 세계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과 피안이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와 상대적인 세계로 떠나는 열반의 세계가 있습니다.”
진우 스님의 일성은 자승 스님의 입적이 출세간과 수행자의 선상에서 이뤄졌음을 명확히 지칭하고 있었다. 이어 “자승 스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인연 연기에 따라 살면서도 근본적인 정법 깨달음의 세계를 항상 추구하셨기에 이런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고 밝혔다. “일반에서는 이해 못하겠지만 수행자 선상에서는 충분히 있는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덧붙일 문제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이러한 순간을 스스로 맞이하셨다’는 진우 스님의 단언은 같은 날 오후 자승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됐다. 유언장을 공개한 조계종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지난 3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마치고 자승 스님이 지인들과 차를 마시다가 ‘나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 방 어디를 열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그 말을 들었던 스님 한 분이 어제 숙소에서 여러 장의 유언장을 확인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3장을 공개했다. 자승 스님의 모습이 담긴 영상기록과 함께 오래 전부터 준비됐음을 유언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이에 대해 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의 의중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증언을 전했다. “소신을 준비하고 계셨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이 있었다”는 원명 스님은 “봉은사에 땔감을 쌓아 두도록 여러 차례 말씀하셔서 통나무 움막을 지어 놓았다. 다만 대중들이 그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며 회한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소신공양을 준비했었지만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봉은사에서 불길이 오를 경우 순식간에 진화될 것을 예측해 칠장사를 선택했음을 짐작케 한다. 특히 칠장사는 평소에도 종종 들려 기도하던 수행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만큼 칠장사 요사채 전소에 대해 자승 스님은 유서를 통해 칠장사 주지스님에게 거듭 미안함을 전했다. 상좌들에게 이를 복원하라는 철저한 당부까지 남겼다.
자승 스님은 상월선원과 함께 했던 사부대중에 대한 감사와 함께 건물 경비원, 사무실 간사 등 소소한 주변의 인연들도 하나하나 챙겼다. 동시에 출가자로서 수행 정진에 소홀했던 부분에 대한 참회, 선원 정진대중에 대한 존경까지 유언장에 담고 있었다.
이러한 유서에 더해 자승 스님을 오랫동안 보필했던 박기련 동국대 건학위 사무총장은 “스님께서 11월27일 가진 기자간담회 일정을 2주 전부터 언론사에 요청해 준비했고 전례 없이 허심탄회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날 저녁에는 전법대회를 준비했던 13명의 직원들을 불러 함께 저녁공양을 하고 일일이 선물을 전하는 등 각별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회고했다.
박기련 사무총장을 비롯해 일련의 과정들을 목도한 주변인들은 한결같이 “이같이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추호도 의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며 탄식했다.
상월결사 인도순례에서 순례단장 소임을 맡아 43일간을 함께 했던 조계사 주지 원명 스님은 “자승 스님께서는 ‘태어날 때에는 부모에 의지하지만, 수행자라면 결코 죽음에 끌려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고 전했다. 스님은 “소신 현장에서 수습된 스님의 법체는 누운 자리 그대로 반듯했다”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하려 들기 마련이고 더구나 뜨거운 불 앞에서 몸부림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그 법체가 반듯하게 남아있었다는 점은 결코 죽음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평소의 신념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불교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승들의 입적이 일상의 연장선에서 일어났음을 감안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짐작할 특별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죽음이 일상다반사와 크게 다르지 않고 그 자체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 숱한 고승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승 스님은 입적 당일 불씨를 당긴 직후 명료한 의식 하에 몇몇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짧게 향후 종단에 대한 당부와 소신 결행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사채에 불길이 치솟은 지 불과 5분여 만에 서울과 칠장사 등에서 소방서로 3통의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날 자승 스님의 전화는 몇 초에 불과했지만 인사와 당부, 그리고 짧은 영상통화, 무엇보다 ‘칠장사’라는 위치를 전하는 자승 스님의 목소리가 정확히 전달 된 후 끊어졌다는 것이 공통된 전언이다. 불길이 선명한 영상 속 자승 스님의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하고 여여했으며 삶과 죽음에 초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 죽음은 회피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이 궁극적 과제다. 그렇기에 불교는 생과 사를 함께 언급하고 ‘생사일대사인연’을 해결하는 것을 수행 목적으로 삼았다.
“종무행정의 중심에서 세속의 권력과 맞서거나 때로는 손잡아야 했던 자승 스님에게는 이판과 사판의 면모가 함께 존재했었다”는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오랜 시간 가까이서 지켜본 자승 스님에게서 선사의 면모를 읽어냈다. “스님은 역대 처음으로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지내는 입지전적 행적으로 세간인들에게는 늘 종권의 중심, 그 자체로 인식돼 있었다”며 “그러나 오래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승 스님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속에서 대중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심으로 일하며 대중 속에서 중도의 이치를 깨닫고 실행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상월결사 총도감 호산 스님의 전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자승 스님에게 총무원장으로서의 모습, 행정승의 모습만 있었다면 상월선원 천막결사에 함께 할 결심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총무원장 소임을 놓으신 후 수행자로 회향하려는 그 모습을 따르고자 했으며, 천리순례·인도순례를 하며 많은 대중에게 숨김없이 드러낸 자승 스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분에게서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평가는 자승 스님의 일생 행적 곳곳에서 보여지는 치열한 수행자의 면모와도 상통한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마친 자승 스님은 ‘군대물’을 빼고 ‘중물’을 들이기 위해 1979년 겨울, 설악산 봉정암에 들었다. 사람 키만큼 폭설이 쌓이고 그치지 않는 칼바람이 체감온도를 영하 30~40도까지 끌어내리는 봉정암에서 25살의 자승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새벽·오전·오후·저녁까지 하루 네 번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했다. 꼬박 5개월을 정진하고 봄이 되어서야 봉정암을 내려왔다.
그 혹독한 겨울과 맞섰던 결연함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총무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사판승’ ‘입지전적 인물’로 세간에 각인된 후에도 몸속 깊숙한 곳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총무원장 소임에서 물러난 자승 스님은 다시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 무문관에 들었다. 굳게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스님은 하루 한 끼 공양에 의지해 정진했다. 유나 영진 스님은 “수행처에서 ‘쿵’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두 차례 났다”며 “곡기와 잠을 끊고 1주일간 정진하다가 두 번이나 쓰러졌다는 말을 해제 후에야 듣게 됐다”고 전한 바 있다. 영진 스님은 “무문관에서 나올 때 자승 스님의 몸무게가 17kg이나 줄어 있었다”며 “이처럼 혹독한 수행은 나로서도 평생 처음 보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생사를 건 수행은 2년 후인 2019년 11월 상월결사 천막결사로 이어졌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한겨울 도심의 콘크리트 밀림 한복판 천막에 스스로를 가뒀다. 극한에 가까운 90일의 정진이 끝났을 때 자승 스님을 포함한 아홉 스님의 정진대중은 낙오자 하나 없이 산문을 나섰다. 혼자 이어왔던 치열한 수행이 대중의 수행으로 회향된 첫 순간이었다.
이듬해 10월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생명평화 방생순례’를 이어가며 움직이는 수행, 활발발한 대중정진의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2023년 43일간 1167km를 걷는 ‘상월결사 인도순례’를 통해 그 모든 정진의 결실을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전법선언으로 회향했다. 세간을 향한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도 자승 스님이 남긴 말은 ‘부처님 법을 전하자’는 당부였다.
동국대 건학위원장 돈관 스님은 “소신으로 보이신 그 뜻이 무엇인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잘 헤아려야 한다”며 “인도순례를 통해 전법 없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직접 보고 보여주고자 하셨으며 전법선언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또한 직접 보여주셨다. 불교의 미래를 위한 전법에 사부대중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확연히 보이신 것”이라고 말했다.
세간의 눈에 자승 스님의 입적은 벼락같은 소식이었다. ‘왜’라는 온갖 추측이 넘쳐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라는 팩트에 집중해야 하고 어떤 ‘메시지’인지 묻고 물어야 한다. 이(理)와 사(事)를 넘나들었던 불교지도자이며 수행자였던 자승 스님이 던진 메시지에 불교중흥과 전법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수연 편집국장 namsy@beopbo.com
[1708호 / 2023년 12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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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의 댓글
작성자 비밀번호댓글 내용입력0 / 400등록댓글 정렬불자라고 한다네
사람의 죽음앞에
스님의 죽음앞에
추모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지 못할지라도
참으로
비겁한 인간의 탈을 쓴 그들
민주적인라는
양심적이라는
개혁적인이라는
시민이나 국민이나 불자를 위한다는 말과 글로
인간딥지도
불자답지도 않게
참으로
그분의 불교중흥이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 입니다답글 작성
승부사적 면모 근저엔 화쟁·신뢰…대의·명분 잃지 않으려는 수행자 모습도
[파격의 입적, 자승 대종사와 한국불교] ②자승 스님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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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종무행정 첫발 이후 소통·화합 리더십으로 종회·총무원 상생 구축
원력·화쟁·신뢰의 철학으로 종단 내 갈등 조정하고 결집…대외 위상도 높여
치열한 수행은 지속적 영향력의 원천…불교지도자 덕목 보여준 스님의 유산
1962년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2009년 제32대 총무원장 지관 스님의 퇴임 때까지 역대 총무원장의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10개월에도 미치지 못했다. 43년의 세월 동안 총무원장의 취임과 퇴임이 무려 서른두 번이나 반복된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취임 1년도 안 돼 총무원장이 물러난 일도 17차례나 있었다. 4년 임기를 채운 총무원장은 의현, 월주, 지관 스님 단 3명뿐이었다.
총무원장의 이같은 잦은 교체는 불교계의 지속적인 갈등과 혼란 양상을 보여준다. 종헌·종법상 임기가 보장돼 있는 총무원장이 그 임기를 다하지 못하는 ‘불가피한 상황’들이 거듭됐다는 의미다. 그 대부분은 불미스러운 일들이었다. 불교계에는 1960년대 정화의 소용돌이, 1970년대 종단 내부 갈등, 1980년대 10·27법난이 벌어지며 안팎의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1994년 종단개혁에 이어 1998년 종단사태라는 무력 충돌로 혼란의 정점을 찍었다. 해방 이후 근대까지 불교계는 사실상 안정을 구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총무원장의 짧은 임기는 이러한 불교계의 아픈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그렇기에 33대와 34대 총무원장을 연임하며 임기를 마친 자승 스님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 받는다.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으로 종단 중앙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던 자승 스님은 총무원 재무부장, 총무부장을 지내며 종무행정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 이어 종단 입법기구인 종회에서도 폭넓은 인간관계와 활발한 종회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4대 중앙종회에서는 전반기 의장을 맡아 중앙종회를 이끌었으며 집행부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지원으로 중앙종회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계 안팎의 존경이 두터웠던 지관 스님이 총무원장 임기(2005~2009)를 마무리할 즈음 자승 스님은 차기 총무원을 이끌 가장 유력한 인물로 부상해 있었다. 이어 치러진 33대 총무원장 선거 결과, 예상대로 자승 스님이 전체 317표 가운데 290표를 획득, 91.5%라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역대 어느 총무원장도 이루지 못했던 득표율, 사실상의 추대였다.
익히 알려졌듯 자승 스님의 세속 학력은 그리 높지 않다. 출가 문중 또한 용성문도회, 금오문도회, 덕숭문중 등과 같이 내로라하는 명성에 앞서지 못했다. 교학 이해에 있어 빼어난 강백의 반열도, 수행에 있어 구참 수좌들의 안거 이력에 비견할 바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승 스님은 종단 행정의 최고 수반으로 공고히 자리매김했다. 다양한 주장과 이해관계가 얽힌 종단 내부의 복잡한 셈법 속에서 압도적 지도력을 오랫동안 발휘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교계 안팎에선 자승 스님의 카리스마로 △정확한 판세 분석과 승부수 △주고 받음의 정치학 △극한의 인내와 수행력 △대대적인 결집 행사 등을 꼽는다.
◇정확한 판세 분석과 승부수=선거제도를 받아들인 조계종의 권력 구도는 주로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자승 스님은 중앙종회의원 선거를 비롯해 교구본사주지, 총무원장 선거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드러냈다. 표 분석에 거의 오차가 없었으며, 패배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첨예한 이해 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한 뒤 상대방의 요구를 읽어내고 설득·담판 짓는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안의 흐름을 명확히 파악하고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총무원장 선거에서 자승 스님과 경쟁 관계에 섰던 한 중진 스님은 “승부사”라는 수식어로 자승 스님을 표현했다.
이는 대사회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이 조계사로 몸을 피했을 당시 상황의 긴장과 이완을 이끌며 결정적 순간에 조율 능력을 보여준 총무원장 자승 스님에 대해 모 일간지에서는 ‘신의 한 수’에 빗대 ‘스님의 한 수’라고 제목을 붙일 정도였다. 또 2022년 1월 대선을 앞두고 승려대회를 봉행해 불교계의 영향력을 높인 것도 자승 스님의 승부수에 따른 결과였다는 것이 교계 안팎의 평가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삼조 스님은 자승 스님이 다수 종도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로 “원력과 공심”을 들었다. “종단의 중요한 사안을 마주했을 때 자승 스님은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고 설명한 삼조 스님은 “그 같은 집중력과 열정은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공심과 원력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윤재웅 동국대 총장 또한 “기질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지도자다. 여기에 불교 수행자로서의 지혜와 정진이 일상 삶에 체현되는 복합적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오래 성찰하고, 많이 인내하며, 널리 경청하고, 두루 소통한다. 그리고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무서운 추진력으로 실행한다”며 “분열과 갈등과 이합집산이 그치지 않았던 불교계 내부가 단합되고 안정화된 것은 자승 스님의 지도력이 보여준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주고받음과 신뢰의 정치학=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선거 정치는 경쟁의 정치이고 선거 이후의 정치는 주고받는 거래의 정치”라고 말했다. 또 “선거의 정치와 거래의 정치가 모두 사회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규칙이자 규범”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정치 이론은 자승 스님이 선거 과정 및 선거 이후에 보여준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일각에서는 ‘주고받음’에 명확했던 자승 스님의 지도력을 ‘화쟁’과 ‘신뢰’로 정의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문중, 교구, 계파가 언제라도 대립할 수 있는 구도에서 선거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있음에도 자승 스님은 배분과 타협, 신뢰로 갈등을 최소화 했다는 것이다.
조계종총무원 기획실장 우봉 스님은 “자승 스님은 선거가 갈등과 대립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중재 노력을 많이 했다”며 “특히 선거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경쟁 당사자들도 자승 스님이 중재자로 나선 후 소통이 이뤄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자승 스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혹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결과 자승 스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를 통해 종단의 목소리를 더욱 크고 단단하게 결집해 나갈 수 있는 선순환의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 과정에서 종단이나 불교계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는 세력에 대한 배격에도 단호했다. 이는 자승 스님에 대한 깊은 분노와 원한을 갖거나 끊임없이 비난하는 세력이 형성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극한의 인내와 수행력=봉은사 주지 원명 스님은 “천막결사뿐 아니라 삼보순례, 자비순례, 인도순례를 보면서 나는 절대로 따라 갈 수 없는 수행자의 면모를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두 배, 세 배로 더 엄격해야 한다”고 말한 원명 스님은 “누군가는 보여주기식이었다고 폄하하지만 보여주기라도 그렇게 자신에게 철저할 수 있는 수행자는 극히 드물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자승 스님의 지도력을 언급하며 가장 대두되는 면모는 ‘남다른 수행력’이다. 총무원장이라는 권한에 뒤따르는 ‘행정승’ ‘사판승’의 이미지 뒤에 가려진 수행자의 면모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많다. 퇴임 후 자승 스님이 보여준 수행자로서의 행보는 성철 스님, 혜암 스님 등의 장좌불와·동구불출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종교적 카리스마였다. 총무원장 재임 시기 구축된 ‘행정승’이라는 세속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상월선원 천막결사에 동참했던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심우 스님은 “반결제가 지나면서 상월선원을 찾아온 전국 불자들의 응원 목소리가 커져 갈 때였다. 스님은 그 목소리에 부응하려는 듯 더욱 정진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정진 도중 쓰러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분의 수행력이 결코 보통사람과 비교할 바가 안된다는 점을 직접 확인했다”고 설명한 심우 스님은 “그동안 안일함에 빠져있던 승가에 경종을 울리고 한국불교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주기 위해 당신 스스로가 극한의 수행을 감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막결사에 동참했던 수좌 무연 스님이나 성곡 스님도 당시 “참으로 모범적인 수행자였다. 청규도 놀랄 정도로 잘 지켰다” “사회적·정치적인 면모를 떠나 뛰어난 수행자다”라고 찬사를 보낸 것도 이러한 수행자의 면모와 직결된다.
“무문관 수행을 해도 체중이 17kg이나 빠진 경우는 처음 보았다”는 백담사 유나 영진 스님의 증언이나 2021년 18일간 진행한 삼보사찰 순례 때는 두 발의 엄지발톱이 모두 새까맣게 죽어 붕대로 동여맨 채 걷고, 인도순례 때 가장 먼저 일어나 대중들의 텐트를 살피고 출발시간에 가장 먼저 선두에 나와 선 것도 수행자의 면모였다. 자승 스님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도, 오랫동안 많은 대중을 이끌었던 것도 ‘수행자로서의 자승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대의 앞세운 대규모 결집 행사=이와 함께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대중의 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대대적인 실천 행사였다. 자승 스님은 홀로가기보다 힘들더라도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다. 천막결사, 자비순례, 삼보사찰순례 그리고 인도순례까지 자승 스님은 종단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고 대중을 모으는 대규모 행사를 꾸준히 진행했다. 특히 이러한 결집 행사들은 불교의 미래와 이익을 위한 대의와 명분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퇴임 이후에도 종단 내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지 않은 원인으로도 분석된다. 특히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세운 ‘불교중흥’이라는 대의는 불교계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었다.
이에 대해 윤재웅 총장은 “시대정신을 잘 읽고, 문제의 해법을 단순하게 만드는 지도력이 강했다. 대표적인 대의명분이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무차평등’이었다”며 “이런 정신은 종교간의 이해와 화합까지 추구함으로써 다종교사회인 한국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데 선도적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국회정각회장인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은 “자승 스님은 승가의 위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당면한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정치권에서도 이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치 현상이나 사회 현장을 직관적으로 보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전한 주 의원은 “일의 순서와 적절한 해법을 찾는 타고난 감각뿐 아니라 오랜 종단 행정 경험 속에서 합리적이고 대의에 맞는 해법을 찾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고 말했다. 결국 종도들이 ‘거부할 수 없는’ 자승 스님의 제안과 대규모 결집 행사들은 교계 안팎에서 폭넓게 수용됐고 이를 통해 조계종뿐 아니라 다른 종단들까지도 동참할 수 있는 화합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자승 스님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엇갈린다. 이는 혼돈과 갈등을 되풀이하던 종단 정치의 칼날 위에 올랐던 숙명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자승 스님의 카리스마가 구축한 종단의 결집력이 종헌종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영향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통일된 목소리의 반작용으로 건전한 비판 세력의 토대가 약화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자승 스님의 카리스마로 인해 불교계가 결집하고 대사회적인 역량과 위상을 높였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퇴임 후 정치적인 구설수에 휘말릴 때 “나는 불교만 보고 간다”고 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이 12월3일 영결사에서 자승 스님의 카리스마가 종단의 미래를 여는 또 하나의 동력이 될 것임을 강조한 것은 의미가 깊다. “차안과 피안의 두 경계를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주어진 인연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연기의 법칙을 따라 일상사와 종단사에 매진한 생평(生平)이었다”라고 전한 진우 스님은 “대화상의 수행력과 유훈이 하나로 결집된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전법포교의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자승 스님의 리더십은 오늘날 위기에 직면한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과 경계할 점이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자승 스님이 보여준 불교지도자로서의 ‘생평’은 한국불교의 흐름을 바꾸었다. 앞으로도 한국불교계가 참구해야 할 화두로 던져졌다.
남수연 편집국장 namsy@beopbo.com
[1709호 / 2023년 1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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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의 입적, 자승 대종사와 한국불교] ③자승 스님 입적 후 한국불교 향방
총무원장 연임으로 대정부 협상력 높이며 불교 관련 법령 잇따라 제·개정
민노총위원장 보호·사회노동위 확장·성소수자 초청 등 사회 약자편 행보
사회적 위상 높였지만 임기 마지막까지 종단 안팎 비난·의혹 시달리기도
집행부·교계 향한 확고한 믿음 “화합·전법으로 계승해야” 교계 한목소리
2023년 11월 29일 오후 6시 40분 무렵, 화염이 치솟던 그 순간 불길 속 자승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일 낮 양평에서 열린 불교문화재연구시설 상량식을 마치고 막 숙소에 도착했던 진우 스님은 자승 스님과의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안성 칠장사로 향했다. 그날 진우 스님이 누구보다 빨리 안성에 도착, 자승 스님의 입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마지막 순간 걸려 온 이 전화 때문이었다. 자승 스님의 마지막 통화 속에는 종단에 대한 부탁과 무거운 짐을 남긴 데 대한 미안함이 함께 담겼었다고 전한다. 불길이 치솟는 생의 막다른 끝에서 자승 스님이 종단의 안위를 떠올렸음은 유언장과 전화 통화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조계종 33대·34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자승 스님의 업적은 뚜렷하다. 2009~2017년까지의 재임 기간 눈에 띄는 여러 행적들을 남겼다. 스님은 8년간 우리말 의례 의식 제정, 승려복지 제도 전면 시행, 총본산 성역화 불사, 템플스테이 및 사찰음식 활성화, 법계별 연수 교육 제도화, 위례·세종시 등 신도시 종교용지 확보, 불교문화유산보존센터 착공, 종단 사업부 및 지주회사 설립 등 종단의 제도를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종단의 역량과 위상을 대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이와 함께 불교문화재 일제조사, 전통사찰 전수조사, 금석문 탁본 조사, 폐사지 발굴 등으로 불교문화 및 문화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국가 차원의 합리적 발굴·보존 정책 수립을 끌어냈다.
특히 불교와 관련된 다수의 국가법령을 제·개정하는 데 주력했다. 불교계를 옥죄던 각종 규제를 풀어내고 정당한 불교재산권 행사 및 불교문화에 대한 존중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불교계의 자율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자승 스님의 재임기간 동안 개정된 법령은 10·27 법난 피해자의 명예 회복 등에 관한 법률을 비롯해 전통사찰의 개발제한구역 보전부담금 면제를 규정한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사찰림 내 봉안시설·사회복지시설·청소년수련시설 등 설치 허가한 ‘산지관리법’, 전통사찰의 농지보전 부담금을 100% 감면 시킨 ‘농지법 시행령’, 모든 도시공원에서 전통사찰의 증축을 허용한 ‘도시농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등 굵직한 것만도 8건에 이른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부처님오신날’이라는 공식 명칭도 2017년 개정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의 결과다. 이러한 법령 개정을 통해 사찰은 재정부담을 덜고 부당한 불사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찰 운영에도 유연성과 합리성을 확대함으로써 신행과 포교에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10·27법난 특별법의 법안 시효를 삭제, 법률상의 지위가 영구적으로 보장돼 종단의 핵심 사업이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성과는 종단 안정을 기반으로 정권과 수평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 종단 안팎의 평가다. 총무부장 성화 스님은 “불교와 관련된 각종 법령 재개정 과정은 정부와 오랜 신뢰를 갖고 법안의 필요성 및 가치 등을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종단은 원력을 갖고 사회 흐름 또한 신속히 파악해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대정부 접촉 과정에서 종단의 안정과 사회적 신뢰도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약자의 편에 서는 종단의 모습은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며 궁극적으로 종단의 위상을 높여주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자승 스님은 34대 총무원장으로 재임 중이던 2013년, 당시 공공부문 사기업화 저지를 위해 16일째 파업을 이어가던 박태만 철도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등 세 명이 12월 24일 공권력을 피해 조계사로 들어왔다. 이에 조계종은 노동위원회를 긴급 소집하고 ‘화쟁의 지혜’를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갈등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섰다. 20여 일간 조계사의 보호를 받은 철도노조원들은 해가 바뀐 2014년 1월 14일 불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자진 출두했다. 이어 2015년에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몸을 피한 후 신변보호와 함께 화쟁위원회의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조계종은 평화집회, 노·정대화 등을 이끄는 한편 공권력의 조계사 침탈 움직임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견지했다. 당시 정부는 세월호 사태 이후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감으로 민주노총에 대한 강경 대응을 천명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병력이 조계사 주변을 에워싸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자승 스님은 기자회견을 자청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종단의 노력을 지켜봐 달라”는 단호한 입장을 피력했다. 첨예한 대립 상황을 풀어나가는 모습은 정국의 주도권이 불교계에 있음을 보여줬다. 한상균 위원장은 다음 날 총무원장 스님을 예방해 인사를 전한 후 자진출두하며 사태는 원만 해결됐다.
일련의 사건 속에 조계종은 정권의 입장과 계획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긴장과 이완을 조정하는 한편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불교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는 33대 집행부부터 견지해 온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편에 서겠다’는 일관된 기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33대 총무원장에 당선된 후 자승 스님은 노동자들이 사망한 용산 참사 현장을 방문하며 총무원장의 첫 행보를 시작했다. 34대 총무원장 임기는 홍제동 개미마을에서의 자비의 쌀·연탄 나눔으로 시작하며 향후 종책의 방향을 예고했다. 이어진 11월13일 총무원장 취임식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등 각계 인사를 초청했다. 이후 매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에 해고 노동자, 세월호 가족,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등을 초청해 자리를 함께했다. 특히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자 종단은 코앞으로 다가온 봉축행사에도 희생자 수습과 유가족 위로에 전력을 기울였다. 자승 스님은 직접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기도 법회를 봉행했다. 이후로도 희생자 유가족들과의 만남과 위로를 지속하며 상처 치유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33대 집행부에서 출범한 조계종 노동위원회가 34대 집행부 들어 ‘사회노동위원회’로 확대 재편되며 활동 범위를 확대한 것도 적극적 사회 참여의 종단 기조를 대변했다. 20여 명에 이르는 실천위원 스님들이 사회 각 현장에서 고통받는 약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은 종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끌어올리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자승 스님의 임기 동안에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임기 막바지에는 ‘3선 시도’에 대한 일부의 의혹 제기가 잇따랐다. 자승 스님은 “지난 8년간 화두는 공심이었고,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많은 종단적 과제를 실현한 시기였다”며 “35대 총무원장 선출을 끝으로 불교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히며 10월 30일 종무원들에게 감사 편지로 소감을 대신한 후 퇴임했다.
8년간 행정 수반으로 종단을 이끌었던 자승 스님의 마지막 과제는 대립과 분열의 갈등을 피하고 종헌종법의 틀 아래서 종권을 이양, 종단 주요 과제를 연속성 있게 이어가는 것이었다. 이는 퇴임을 앞두고 출간한 자료집 ‘소통과 화합, 자비와 화쟁으로 함께해 온 8년’에서도 엿보인다. 자승 스님 재임 8년의 성과를 갈무리한 자료집에서는 자승 스님 퇴임 이후 종단이 주목해야할 과제로 △수행종단, 전법과 교화의 전기 마련 △종단 발전을 위한 운영과제 △종단 주요 목적 불사 진행 △사회적 소통강화와 역할 등을 제시하면서 ‘종헌종법을 뛰어넘지 않고 현재 종단의 현안을 승계하면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는 총무원장이라는 칼날 위에서 8년의 세월을 보낸 자승 스님의 소회이자 임기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던 종단 내부의 대립과 분열에 대한 대안, 그리고 종단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과제에 대한 인식으로 읽힌다. 자승 스님이 퇴임 후 ‘불교중흥’의 과제를 제시하며 각 문중과 산중, 교구본사 구분 없이 결집에 집중한 것 또한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자승 스님의 갑작스런 입적 이후 종단 안팎의 목소리는 ‘종헌종법’과 ‘화합’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는 모처럼 마련된 종단의 안정과 결집의 역량이 올곧게 계승돼야 한다는 데 종도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종단은 종헌종법이 명시하고 있는 행정 체계의 틀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위로는 종정스님이 계시고 원로의원스님들과 총무원장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총무원·교육원·포교원의 집행부가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종단은 오직 이를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달리 무엇이 있을 수도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종정 성파 스님의 12월 15일 유시를 봉대해 화합, 전법을 위해 총무원장 중심으로 매진해야 한다.”(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자광 스님)
“총무원장을 역임한 자승 스님은 퇴임 후에도 그 영향력이 종단 안팎에 두루 미쳤기에 다양한 의견의 조율과 논의가 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스님의 입적 이후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종단은 그런 의견들을 제도적 틀 안에서 논의하고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과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은 곧 종단이 진일보하는 과정이다. 종단의 현안은 행정기관인 총무원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다양한 목소리와 논의는 종단의 대의기구인 종회를 중심으로 소통된다면 종단은 더욱 큰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주경 스님)
“자승 스님이 제시했던 과제들은 종단의 앞날, 나아가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종단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공감하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자승 스님의 입적 이후에도 흔들릴 이유가 없다. 전법을 통한 불교중흥 모색은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자승 스님은 이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이 불사가 이제 종단의 원력이 되어 총무원의 행정력 속에서 더욱 힘있게 추진되는 것이 모든 교구본사 주지 스님들의 바람이기도 하다.”(조계종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장 정도 스님)
자승 스님의 49재가 이어지던 12월 셋째 주, 자승 스님의 처소에서는 3년여 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가 추가로 발견됐다. 그중에는 자화장(自火葬)을 암시라도 하듯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니 불꽃에서 여래를 만나는구나’라는 게송도 있었다.
자승 스님이 왜 스스로를 불사르는 파격의 입적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 종단 집행부와 불교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두고두고 미뤄왔던 자화장을 결행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자승 스님과 마지막까지 통화한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교학과 수행, 종무행정에 두루 밝다. 특히 2018년 종단이 위기 상황에 내몰렸을 때 총무원 집행부 주요 소임을 맡아 종헌종법의 틀 내에서 이를 원만하게 해결했던 주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진우 스님은 12월18일 중앙종무기관 산하기관 성과평가 및 37대 핵심주요 종책과제 이행 점검 워크숍에서 향후 종단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다. “출가정신을 잊지 않고, 종헌종법을 준수하면서 공명정대·공평무사하게 종무를 처리하며, 공유·공감하고 소통하는 세 가지 기조하에서 종단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또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 불교중흥 토대를 탄탄하게 마련해나가겠다”고도 밝혔다.
자승 스님의 입적은 현대 한국불교의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종단 안팎의 오랜 갈등과 대립을 딛고 자승 스님이 이룬 성과는 뚜렷하다. 그것을 이어 한국불교가 중흥할지 쇠퇴할지는 오롯이 안정과 화합에 달렸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이 12월 15일 ‘종단 안정에 만전을 기하라’ ‘승가화합에 만전을 기하라’ ‘전법도생에 매진하라’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정진하라’는 교시를 불교계가 뼛속 깊이 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수연 편집국장 namsy@beopbo.com
[1710호 / 2024년 1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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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댓글
작성자 비밀번호댓글 내용입력0 / 400등록댓글 정렬특히 최고라는 위치에서는 더욱더 쉽지 않을 것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치는
회향 입니다
개인적 이익을 위한것으로 회향하는지
대중을 위한 회향인가
비난 하고
비판하는것
삶이 동반되는 모습이고 평가이지만
49재도 끝나지 않는분에게
완전히 안면몰수하고
그분의 삶을 그릇되게 폄하하는분들
정말 대중앞에 정의롭고 당당한지요
본인의 죽음이
참으로 사부대중을 위하여
불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수 있는지요
참다운 불자라면
스님다운 스님이라면
한분의 죽음앞에
겸손하고 겸허해 지시길 부탁드립니다
극락에서 편하게 쉬시면 좋겠습니다답글 작성
마지막 죽을 때 그 사람의 총체적인 모습이 나타난다잖아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총무원장 스님에게 전화를 해서 종단을 부탁한 것을 보면
그동안 종단을 향한 자승스님의 공심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승스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답글 작성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제발그만 싸우고 화합합시다 무지성 비난자들 마음가짐좀 고쳐먹었으면답글 작성
곡소리도 1~2번이면 족하다.
부처님의 가피로 화이트크리스마스가 왔구나.답글 작성
아주 훌륭한 면모 많은 스님인데
몇몇 사람들에 의해 아주 왜곡되어
세상에 잘못 알려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봉은사의 허응당 보우 스님은
유생들에 의해 마구니 취급 받았는데
지금은 승복 입고 불교 믿는다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니 취급을 받네요.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답글 작성
1700년의 깊은 뿌리를 굳건히 믿고,처음도 공심, 중간도 공심, 끝도 오직 공심으로
크든작든 모든 소임자들 부터 살신성인의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답글 작성
아난의 슬픔과 욕심이 이러할까요?
마지막까지 전법을 위해서 보여주시고 가신 그 열반!!!
사진을 볼때마다 그 결연하고 온화한 눈빛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유지 받들어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답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