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비교 윤문

이병욱거사의 '행복경 윤문'비판에 답하며

후박나무 (허정) 2023. 7. 18. 21:11

이병욱거사의 '행복경 윤문'비판에 답하며

불교계에서 유명한 [진흙속의 연꽃]이라는 필명을 쓰는 분이 백장암에서 윤문한 ‘행복경’에 대해서 “망갈라경이 행복경이라고? 승가이기주의와 번역참사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런 글은 출가자에게 가지고 있는 피해의식과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는 글이다.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되도록 짧게 몇가지만 언급하겠다.

[진흙속의 연꽃] “H스님에 따르면 B선원에서는 최종적으로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정했다고 한다. 의견 대립이 있어서 투표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글을 접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실망한 것에 대한 의견을 댓글로 남겼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진리는 양보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망갈라를 행복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진리를 타협의 대상으로 보고, 진리를 양보의 대상으로 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반론]이 글은 상대를 비난 하기위해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망갈라를 행복으로 번역하기로 한 것은 오랜시간 논의 끝에 대중스님들이 합의한 결정이었다. 처음에는 상서로움으로 결정했다가 축복으로 변경되었다가 나중에 행복으로 합의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행복경 윤문을 마치며’라는 글에서 설명했는데도 마치 ‘망갈라’를 투표해서 ‘행복’이라고 결정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다수결로 결정한 단어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아빠라지따(aparājitā)이다. 실패하지 않음, 퇴보하지 않음, 뒤처지지 않음, 흔들림 없음, 고요함등으로 번역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직역에 가까운 ‘패배하지 않고’로 결정되었다. 대중의 선택은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스님들의 이러한 민주적이고 투명한 결정이 비판받아야 할까? 

대중이 번역하다가 결론이 안나면 차선책으로 대중의 의견을 물어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어느 단체에서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미 나와있는 다양한 번역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진리를 타협한 것이 아니고 이미 나와있는 번역어를 선택한 것 뿐이다. 이런것까지 비난하는 재가자를 보니 공부해서 아는 것보다 공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진흙속의 연꽃]“출가에서는 재가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재가의 번역을 채택하지 않는 것 같다. 재가에서 용어를 선점했기 때문일까? 이처럼 재가의 번역을 낮게 보는 것은 출가의 우월주의에 기반한다고 본다. 승가가에서는 스님들이 번역한 것을 승가대학 교재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재가에서 아무리 뛰어난 번역을 해도 승가대학 교재로 채택될 수 없음을 말한다. 초록이 동색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반론]재가자가 이런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초기경전을 배우도록 2010년에 승가대학 교과목을 바꾸었다. 그 때 전재성거사님이나 각묵스님이 번역한 것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논의 끝에 각묵스님 번역본이 채택되었는데 그 이유는 각묵스님의 번역이 기존에 사용하던 한문 번역의 번역어를 따라서 친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묵스님은 세존, 승가, 천신, 선법, 불선법...으로 번역하였는데 전재성거사는 거룩한 님, 참모임, 하느님, 건전한 법, 불건전한 법...으로 번역하였다. 

그 당시 나이가 많고 보수적인 스님들의 주장으로 기존의 눈에 익은 단어들이 나타나는 번역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무조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스님이 스님의 번역본을 선택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런 피해의식이 있다보니 재가자가 번역용어를 선점해서 스님들이 번역할 때 그 번역어는 안 쓴다는 확인되지도 않은 추측을 사실 처럼 말하고있다.  

[진흙속의 연꽃]승가의 우월적 자만이 결국 참사를 내고 말았다. 망갈라의 뜻이 상서로움, 길조, 좋은 징조, 축복, 행운, 번영과 같은 미래의 행복을 가져 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현재의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뜻하는 의미로 번역했다. 

[반론] 전재성 거사님도 망갈라경 첫 게송에서 "행복에 관해 생각하오니(maṅgalāni acintayuṁ )"라며 망갈라니(maṅgalāni)를 행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각묵스님이 행복이라고 번역한 것은 비판하고 전재성거사가 행복이라고 번역한 것은 비판하지 않는다. 
또한 전재성거사는 첫 게송에서 소타남(sotthānaṁ)은 ‘최상의 축복’이라고 번역했는데 마지막 게송에서 나타나는 같은 단어 소팀(sotthiṁ)은 ‘번영’이라고 번역하였다. 또한 소타남(sotthānaṁ)은 ‘최상의 축복’이라고 번역하고 망갈라 웃따망(maṅgalam-uttamaṁ)도 최상의 축복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단어를 절제없이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다.

재가자가 망갈라를 행복이라고 번역하면 맥락에 따른 것이라고 두둔하고, 출가자가 망갈라를 행복이라고 번역하면 승가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사람마다 다르게 번역하는 것은 생각의 차이, 입장의 차이 일뿐인데 그것을 승가의 우월적 자만, 참사라고 비난하는 것이 타당한가? 

[결론]이미 설명하였듯이 부처님 이전에 인도사회에서 사용되던 망갈라(maṅgala)는 이른 아침에 연꽃 향기를 맡거나, 신선한 쇠똥을 바르거나, 꽃과 열매를 만지거나, 신선한 진흙을 바르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행위를 하면 그날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길상’이나 ‘상서로움’의 뜻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망갈라를 자신이 공덕을 쌓는 것, 서원을 세우는 것, 부모님을 잘 모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수행자와 담론하는 것등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버렸다. 
상서로움이 밖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구체적인 행위에 의해서 상서로움(maṅgala)이 있게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부처님이 사용한 이런 뜻을 모르고 사전적인 의미만 옳다고 주장하면 부처님의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언어사용에 대한 예를 들자면, 부처님 당시에 외도들은 부처님에게 ‘단멸론 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그래, 나는 단멸론자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단멸을 가르치는 단멸론자다.“라고 설명한다.
단멸론자라는 부정적인 용어를 탐진치의 단멸이라고 내용을 바꾸어 긍적정인 용어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렇듯이 망갈라라는 용어도 그 당시 인도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보다는 부처님이 말하고 싶은 뜻을 포함시켜서 사용한 것이다. 단어의 사전적인 뜻보다 내용과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하는 이유다. 즉,인간과 천신들은 밖에서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에 대해 망갈라(축복)을 바라고 있지만, 부처님은 지금여기서 내가 어떤 마음을 쓰고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망갈라(축복)를 말하고 있다. 망갈라를 파악하면 타인에 의해서 주어지는 ‘축복’,‘좋은 조짐’보다는 스스로 짓는 ‘행복’으로 번역하게된 이유다. 아래 두가지 번역을 비교해보자. 

①감각 기능을 단속​하고 청정하게 살며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열반을 이루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좋은조짐’행복이라네.

②감각 기능을 단속​하고 청정하게 살며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열반을 이루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③세상일에 부딪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근심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으뜸가는 ‘좋은 조짐‘이라네.

④”세상일에 부딪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근심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①③ 보다는 ②④번의 번역이 더 자연스럽고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가?

해탈이라는 단어가 계정혜의 모든 단계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듯이 여기서 사용한 행복이라는 단어도 여러 층위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의 행복(열반의 행복)으로 설명하는데 이 행복경은 그 세가지 행복을 포함하고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재가자와 출가자가 모두 에게 사랑받는 보호경으로 남아있는것이다. 그러므로 행복경에서 으뜸가는 행복은 12개 게송의 문맥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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