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중도(majjhimā paṭipadā)의 여러가지 이름

후박나무 (허정) 2023. 7. 18. 06:28

초전법륜경에서 중도(majjhimā paṭipadā)는 팔정도로 나타난다.

나체수행자 경1(A3:151), 나체수행자 경2(A3:152)에서 중도는 37조도품이라고 설명한다.

즉,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오력,칠각지, 팔정도가 모두 중도인 것이다.

열반에 30여가지의 동의어 이름이 있듯이 중도에도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중도(majjhimā paṭipadā)란? 

 

'초전법륜경'을 근거하면 중도는

 

중도는 8정도이다.

중도는 37조도품이다.

적절한 길(도닦음), 알맞은 길(도닦음), 제 3의 길(도닦음)등이고 

지혜의 눈을 생기게 하는(cakkhukaraṇī) 길(도닦음),  앓을 생기게 하는(ñāṇakaraṇī) 길(도닦음),  궁극적인 고요(upasamāya)로 이끄는 바른 앎(abhiññāya)으로 인도하는 ,  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으로 이끄는 ,  열반(nibbānāya)으로 이끄는 길이다.

 

'팔정도'에서 보면 바른 길(도닦음)이다.

 

'전도선언'으로 보면 '이익으로 가는 길(도닦음)', '행복으로 가는 길(도닦음)', '세상을 연민하는 길(도닦음)'이다.

 

'깔라마경'으로 보면 '탐진치의 소멸로 가는 길(도닦음)'이다.

 

'대념처경'에서 보면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는 길(sattānaṃ visuddhiyā)',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는 길(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괴로움과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 옳은 방법을 터득하는 길(ñāyassa adhigamāya), 열반을 직접 체득하게 하는 길(nibbānassa sacchikiriyāya)이다.  

*ñāya masc. method; system; means; way

 

 

'대사십경'을 보면 '삼매로 이끄는길', '바른견해(正見)의 길'이다.

 

 

'사성제'로 보면 '괴로움을 아는 길(도닦음)',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는 길(도닦음)', '괴로움을 없애는 길로 이끄는 길(도닦음)'이다.

 

 

 



 

 


대사십경

 

"그곳에는 바른견해(正見)가 선두에 있다. 왜 바른견해(正見)가 선두에 나오는가?

잘못된 견해가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알고 바른견해가 있을 때 그것이 바른견해라는 것을 알면

그 것이 바른견해(正見)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 가르침 안에서 바른 견해는 선행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가 어떻게 선행하는가.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조건으로 삿된 견해가 소멸하고, 또한 삿된 견해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무수한 사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소멸한다(MN. III. 76-77).” 이렇듯 올바른 견해를 갖추는 것은 실천·수행의 영역에서 절대적이다. 

 

 

 

 

초전법륜경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눈을 생기게 하고(cakkhukaraṇī) 앓을 생기게 하며(ñāṇakaraṇī) 궁극적인 고요(upasamāya), 곧바른 앎(abhiññāya), 올바른 깨달음(sambodhāya), 열반(nibbānāya)으로 이끄는 중도(majjhimā paṭipadā)를 깨달았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눈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앓,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중도를 깨달았다는데,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앓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얇,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나체수행자 경1(A3:151)

Acelaka-sutta

 

1. 비구들이여, 세 가지 도닦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완강한 도닦음, 태우는 도닦음, 적당한 도닦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완강한 도닦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감각적 욕망에는 아무런 해악이 없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감각적 욕망에 흠뻑 취해버린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완강한 도닦음이라 한다.”

“Tisso imā, bhikkhave, paṭipadā. Katamā tisso? Āgāḷhā paṭipadā, nijjhāmā paṭipadā, majjhimā paṭipadā. Katamā ca, bhikkhave, āgāḷhā paṭipadā? Idha, bhikkhave, ekacco evaṃvādī hoti evaṃdiṭṭhi: ‘natthi kāmesu doso’ti. So kāmesu pātabyataṃ āpajjati. Ayaṃ vuccati, bhikkhave, āgāḷhā paṭipadā.

 

 

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우는 도닦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나체수행자이고, 그는 [세상살이에서 행하는 일반적인]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음식을 먹은 뒤] 손을 핥아서 치우고, ‘오십시오.’하고 불러서 준 음식은 받지 않고 서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준 음식은 받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을 받지 않고, [내 몫으로] 지칭된 것을 받지 않으며, 초청하여 주는 음식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릇에서 떠주는 음식, 항아리에서 떠주는 음식, 문지방을 넘어서 주는 것, 막대기를 넘어서 주는 것, 절구공이를 넘어서 주는 것,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 주는 것, 임신부가 주는 것,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가 주는 것, 성교를 하는 여자가 주는 것, 공동체에서 주는 것, 개가 옆에서 보는 것, 나방이 모여드는 것, 생선과 고기, , 과즙주, 발효주를 받지 않는다. 그는 한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한 덩이의 음식만 먹는 자이다. 두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두 덩이의 음식만 먹는 자이다. 일곱 집만 가서 음식을 받고 일곱 덩이의 음식만 먹는 자이다. 한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고, 두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고, 일곱 닷띠의 음식만 구걸하며, 하루에 한번만, 이틀에 한번만 이런 식으로 보름에 한번만 방편으로 음식을 먹으며 산다.

그는 채소를 먹고, 수수, 니바라 쌀, 가죽 부스러기, 수초, 왕겨, 뜨물, 깻가루, , 소똥을 먹으며,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살고, 떨어진 열매를 먹는다.

그는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마포로 된 거친 옷을 입고, 시체를 싸맨 헝겊으로 만든 옷을 입고, 넝마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영양 가죽을 입고, 영양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꾸사 풀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판자로 만든 옷을 입고, 인간의 머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동물의 꼬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올빼미 털로 만든 옷을 입는다.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수행에 몰두하고,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으며, 쪼그리고 앉고 쪼그리고 앉는 수행에 몰입하고, 가시로 된 침상에 머물고, 가시로 된 침상에서 잠자며, 하루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데 몰두하며 지낸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데 몰두하며 지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태우는 도닦음이라 한다.”

 

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적당한 도닦음[中道]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적당한 도닦음[中道]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도닦음이 있다.”

 

 

 

 

 

 

나체수행자 경2(A3:152)

Acelaka-sutta

 

1. 비구들이여, 세 가지 도닦음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완강한 도닦음, 태우는 도닦음, 적당한 도닦음[中道]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완강한 도닦음인가? [A3:151 §1] 이를 일러 완강한 도닦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태우는 도닦음인가?[A3:151 §2] 이를 일러 태우는 도닦음이라 한다.

 

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적당한 도닦음[中道]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나쁘고 해로운 법들은 제거하기 위하여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은 지속하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증장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닦기 위해서 의욕을 일으키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열의를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 sa?kh?ra]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정진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마음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검증을 [주로 한] 삼매와 정근의 의도적 행위를 갖춘 성취수단을 닦는다.

믿음의 기능을 닦고 정진의 기능을 닦고 마음챙김의 기능을 닦고 삼매의 기능을 닦고 통찰지의 기능을 닦는다.

믿음의 힘을 닦고 정진의 힘을 닦고 마음챙김의 힘을 닦고 삼매의 힘을 닦고 통찰지의 힘을 닦는다.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念覺支]를 닦는다. 법을 간택하는 깨달음의 구성요소[擇法覺支]를 닦는다. 정진의 깨달음의 구성요소[精進覺支]를 닦는다. 희열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喜覺支]를 닦는다. 고요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輕安覺支]를 닦는다. 삼매의 깨달음의 구성요소[定覺支]를 닦는다.

바른 견해를 닦고 바른 사유를 닦고 바른 말을 닦고 바른 행위를 닦고 바른 생계를 닦고 바른 정진을 닦고 바른 마음챙김을 닦고 바른 삼매를 닦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적당한 도닦음[中道]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도닦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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