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曹溪宗) 이름을 쓴 때와 그 까닭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선교양종(禪敎兩宗))]
九山禪門 形成과 曹溪宗의 展開
金 煐 泰*
머릿글
Ⅰ. 九山禪門의 形成과 그 展開
1. 九山 各門派의 開山과 그 系統
1) 九山門의 用例와 그 山名
2) 각 山門의 開山祖와 그 家統
2. 九山門의 成立과 그 性格
1) 九山 成立의 時期
2) 九山禪의 성격
Ⅱ. 曹溪宗名을 쓴 때와 그 까닭
1. 宗名 확정과 그 時期
2. 宗名 定着의 緣由
Ⅲ. 曹溪山 修禪社와 後期의 曹溪宗界
1. 曹溪山의 修禪中興
1) 修禪社 이전의 宗門事情
2) 知訥의 修禪社 開設
3) 修禪社의 계승
2. 修禪社 開設 후의 宗內動向
1) 修禪社 밖의 宗風振作
2) 末期의 曹溪宗界
맺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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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릿 글
三國時代에 받아들여진 佛敎가 海東(韓國)의 佛敎로 정착되어 천 육백여년을 이어 오는 동안에, 그 史書 위에 宗派形成을 비로소 보여주고 있는때가 바로 高麗時代이다.
본래 佛敎는 “心을 宗으로 하는 釋迦一佛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宗이 나뉘어지거나 派가 따로 세워지는 일이 생기기가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個性이 千差萬別하고 시대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事物의 이해와 그가치 판단의 기준도 쉽게 바뀌어지는 까닭으로, 十方三世의 諸佛과 八萬四千의 敎門이라는 重重無盡의 法門이 펼쳐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 친절하고 자상한 說法의 敎門이 하나의 信仰世界(敎團)를 형성하여오다가 修行規範(律儀)의 異見을 계기로 敎團이 분열되면서 20여 部派로갈라지기도 하였으며, 慈悲和合의 根本佛說에 復歸하고자 다시금 하나의믿음세계(僧伽)를 이룩하려 했던 大乘敎團 내에서도 法性을 주로 하는 中觀學과 法相을 중심으로 하는 瑜伽學의 두 學派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상징주의적 神秘性을 강조하는 密敎風潮가 佛敎信仰의 主流를 이루기에이르렀던 것이 印度佛敎의 대체적인 흐름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印度에서의 그러한 小乘(諸部派) 敎學과 大乘敎學 등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中國에서는 독특한 佛敎哲學과 實踐體系를 확립하면서 전문분야별종파들이 생겨났다. 이들 종파가 이른바 三論·天台·三階(普法)·淨土·法相·
律·華嚴·禪·眞言(密敎) 등의 諸宗(이 중에서 三階 普法宗은 皇帝에 거슬린다 하여 絕對君主體制로부터 배척당하여, 나머지 8宗만을 中國 大乘八大宗이라 일컬었음)인데, 이들 諸宗은 모두가 각기 그 敎學의 입장에서 三藏敎說을 綜合정리하여 佛法의 眞實義趣를 하나의 眞理世界(佛乘)에로 통일시키고자 하였었다.
그와 같은 종파성립 전후의 中國佛敎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三國時代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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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된 우리 海東의 佛敎도 중국적인 宗派佛敎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新羅末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敎學의 영향을 크게 받은 흔적은 많이 보이고 있어도, 그 종파들을 그대로 받아들여답습한 자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經敎와 諸家의 言說 見解를 어느것도 버리지 않으면서 一宗 一派에 치우치지 않고 和會(和靜會通)의 입장에 서서 眞佛乘을 顯現코자 했기 때문에, 삼국시대에서 新羅 통일기 말까지를 通佛敎時代라 부르며, 이 때의 불교를 일러 會通의 佛敎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無宗派의 會通佛敎時代 후기에 唐으로부터 禪法이 들어와 深山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高麗가 통일을 이룩한 다음에 아홉 산의 禪門이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한편으로 비록 종파적 형태는 가지고 있지 못하였으나 新羅統一期에 華嚴과 唯識 등의 敎學이 상당한 체계를 갖추었으며, 高麗초에 이르러 九山禪門의 형성과 거의 때를 같이 하면서 몇몇 專業的 敎學이 그 명칭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華嚴業·瑜伽業·律業 등을 들 수 있으며, 肅宗 때의 天台宗 開立 이후로 下代에 내려가면서 많은 宗名들이 보이고 있다.
高麗 전체를 통하여 10여 가지의 宗名을 들 수 있을 만큼 비교적 종파가 많았던 것에 비해, 각 宗들을 이해할 만한 現存史料는 너무나 빈약하다. 그러므로 현재 남겨진 자료의 범주 안에서만 연구할 도리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주어진 課題에 따라 高麗佛敎史에 있어서 매우 비중이 큰 것으로 보이고 있는 九山 및 曹溪宗에 관하여 고찰하기로 한다.
비록 九山으로 나뉘어 山門이 이루어져 있었으나 모두가 唐에서 전해온南宗禪이었으므로, 曹溪 慧能(六祖大師)을 祖로 하는 南頓의 同一禪派였었다. 이들 九山의 禪門이 하나의 宗名을 갖게 될 때 曹溪宗이라고 하였던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小考에서는 高麗代에 걸쳐서 曹溪禪宗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으며 어떠한 변천을 거쳐서 展開되어 왔는가를 現存資料에 의해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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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九山禪門의 形成과 그 展開
1. 九山 各門派의 開山과 그 系統
九山禪門이란 글자 그대로 아홉 산으로 나뉘어 성립되어 있었던 禪法의門派를 뜻하는 명칭이다. 九山門이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그 九山의 각 山名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먼저 九山門의 用例와 그 根據부터 살피고, 다음에 아홉 각 山門의 開山과 그 家風 등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高麗史》에 의하면, 제13대 宣宗 원년(1084) 1월에 普濟寺僧 貞雙등이 王에게 奏請하여 九山門의 參學僧徒들도 進士의 例에 의해 3년에 한번씩 選試를 치르게 되었다(普濟寺僧貞雙等奏 九山門參學僧徒 請依進士例三年一試 從之).1) 여기에 九山門이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지금까지 볼 수 있는 九山門의 用例 중에서는 가장 먼저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는 九山門이라고만 있으나 이 九山이 禪派를 가리키는 山門이라는 것은‘參學僧徒’ 즉 ‘活句參學의 僧徒’ 또는 ‘參究禪學僧徒’(修參祖道의 學人들)라는 말에서도 알 수가 있으며, 또 奏請者인 貞雙 등이 開京 10刹 중의 大禪院인 普濟寺2)의 승려라는 사실에서도 九山門이 (敎刹寺門이 아닌) 禪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 제17대 仁宗 20년(1142)에 기록한 〈國淸寺 妙應大禪師墓* 東國大學校 佛敎學科 敎授.
1)《高麗史》卷 10, 世家 宣宗 甲子元年 正月 己巳條.
2) 拙稿, 〈高麗 開國初의 佛敎思想〉(《韓國史論》18, 國史編纂委員會, 1988)
의 ‘Ⅱ. 開京十刹 創建의 思想性’에서 普濟寺가 敎刹 아닌 大禪院임을 밝힌 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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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3) 에는,
大覺國師가 天台宗을 처음으로 세워서 達摩禪의 九山門 중에서 德行이 높은 승려들을 모집하였다
라고 하여, ‘達摩九山門’이라 일컫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의 達摩란말할 것도 없이 中國禪宗의 初祖로 받들리는 菩提達摩를 말하는 것이므로,
達摩九山門은 達摩禪 즉 達摩를 祖로 하는 禪法(또는 禪宗)의 九山門派라는 뜻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밖에 또 제25대 忠烈王 12년(1286)에 이루어진 慈眞國師碑에는 ‘당시 權臣 崔沆이 普濟寺의 別院을 세우고 九山의 禪侣들을 불러모아 天英(慈眞國師)으로 하여금 主盟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4)고 있다. 여기서의九山禪侶란 역시 九山禪門의 승려(禪僧)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이 밖에도九山이라는 말을 더러 볼 수가 있으나, 九山의 禪門이라는 말이 어떤 경우에 쓰였으며 언제부터 보이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상의 사례만으로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더 후대의 사례는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九山禪門이 제13대 宣宗 元年(1084) 이전의 어느 때(高麗初期)쯤에 형성되어 있었던 高麗禪門의 通稱이었으며, 비로소 韓國禪으로 정착된 하나의 형태(九山門이라는 禪의 世界)였다고도 할 수가 있을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아흡 산은 어느 어느 산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九山門은 각기 그 本刹(禪門根本道場)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山門의 이름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九山門이라는 말이 보이기 전의初期나, 보이고부터의 中期에는 九山의 각 山名이나 本刹같은 것을 담고3) 〈國清寺妙應大禪師敎雄墓誌〉朝鮮金石總覽Î 上, pp. 558∼559).
“大覺國師立台宗 募集達摩九山門高行釋流.”
4) 〈曹溪山修禪社第五世 慈眞國師碑〉(《朝鮮金石總覽》 上, p.595).
“柱國崔公沆 建普濟寺別院 招集九山禪侶 請師主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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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기록을 볼 수가 없다. 다만 高麗後期의 것으로 보이는〈禪門祖師禮懺儀文〉5)에 그 山門과 開山祖師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山名과 祖師名이있는 부분만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迦智山祖師 海外傳燈 道義國師
闍爾山祖師 螺髻頂珠 梵日國師
師子山祖師 霜氣漫天 哲鑑國師
聖住山祖師 無舌揄揚 無染國師
鳳林山祖師 造塔供魚 玄昱國師
曦陽山祖師 山神現請 道憲國師
桐裏山祖師 南嶽分輝 慧徹國師
須彌山祖師 太祖王師 利嚴尊者
實相山祖師 九夏持身 洪陟國師
물론 여기에는 九山門이란 말이 한 마디도 없고 각 산의 위치나 寺名도밝혀져 있지 않다. 또한 그 순서도 연대순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막연하게 九山門이라고만 전해져 왔던 그 九山의 내용을 알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에, 비록 山名과 祖師名만이 열거되어 있다고 해도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 아흡 山門과 그 開山祖가 밝혀졌으므로 현존 文獻史料에 의해 각山門의 위치와 그 開山의 時期를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가 있게 되었다.
대략 연대순으로 그 山門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迦智山門(全南 長興郡 有治面 迦智山 寶林寺)
② 實相山門(全北 南原郡 山內面 實相寺)
5) 現存板本은 朝鮮 顯宗元年(1660) 前後의 것이지만, 禪門 第1祖 迦葉에서 33
祖 惠能에 이르는 印度·中國의 諸祖師가 列記되어 있고 다음에 海東의 九山祖師가 列擧되었는데, 마지막에 佛日普照國師(知訥)가 들어있는 것으로 미루어知訥 이후의 後期에 編撰된 禪家儀禮文이라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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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桐裏山門(全南 谷城郡 竹谷面 泰安寺)
④ 聖住山門 (忠南 保寧郡 嵋山面 聖住寺)
⑤ 闍崛山門(江原 江陵郡 下邱井面 崛山寺)
⑥ 師子山門 (江原 寧越郡 水周面 師子山 興寧寺)
⑦ 鳳林山門 (慶南 昌原郡 上南面 鳳林寺)
⑧ 須彌山門(黃海 海州郡 錦山面 須彌山 廣照寺)
⑨ 曦陽山門(慶北 聞慶郡 加恩面 曦陽山 鳳巖寺)
앞에서 열거해 본 九山門의 각각 開山과 그 家統을 중심으로 하는 내력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① 迦智山禪門
迦智山에 寶林寺를 세우고 迦智山禪門을 이루기는 新羅末의 普照 體澄(804∼880)에 의하여서였으나, 그 山門의 실제 初祖는 道義이다.
道義(儀)는 法號가 元寂(처음엔 明寂)이며 北漢郡 사람으로 성이 王씨였다. 일찍이 出家하여 宣德王 5년(784)에 唐으로 건너가 西堂 智藏의 法을 받고,6) 憲德王 13년(821)쯤에 귀국하였다.7) 당시 新羅에서는 禪法을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雪嶽山으로 들어가 陳田寺에서 제자를 가르쳐 廉居(?∼844)에게 法을 전하였다. 廉居(巨라고도 씀)는 같은 山內의 億聖寺에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며 그 法을 제자 體澄에게 전하였다.8)
諡號가 普照인 體澄은 廉居에게서 法을 받은 뒤 僖康王 2년(837)에 唐으로 갔다가, 그의 祖師인 道義가 전한 法 외에 더 구할 것이 없으므로 文6) 《祖堂集》 卷 17, 4∼5丈, 〈雪嶽陳田寺元寂禪師傳〉.
7) 〈鳳巖寺智證大師碑〉(《金石總覽》上, p.89).
“泊長慶初有僧道義……而還.”
長慶元年(821)이 憲德王 13年임.
8) 〈迦智山寶林寺普照禪師碑〉(《金石總覽》 上, pp.61∼64).
原州 興法寺址에서 발견된〈廉巨和尙搭誌〉(《金石總覽》上, pp.53∼54)가現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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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王 2년(840)에 귀국하였다. 그 뒤 迦智山으로 가서 寶林寺를 일으키고800 여 명의 제자와 더불어 道義의 禪法을 크게 떨쳤으므로, 迦智山 一派의 禪門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9) 그로부터 그 山門에는 훌륭한 禪匠들이 배출되었는데,《三國遺事》의 撰者 一然(1206∼1289)도 迦智山門 출신이다.
이 迦智山門이 九山 중에서 가장 먼저 門을 연 禪派로 치는 것은 道義가 南頓禪(六祖 慧能으로부터 비롯되어 南岳 懷讓∼馬祖 道一에 이어진南宗禪을 道一의 제자 智藏에게서 受法함)을 제일 먼저 海東에 전해왔기때문이다. 그래서 그 法孫 體澄의 碑文에도
達摩를 中國에서 제1祖로 삼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道儀大師를 제1
祖로 삼고 廉居禪師를 제2祖로 하며 우리 스님(體澄)이 제3祖가 된다.10)
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은 體澄이 迦智山의 寶林寺에 자리를 잡았던 것은다음에서 보게 될 實相山門의 初祖 洪陟이 智異山 實相寺에 자리잡기 시작한 때보다는 뒤의 일이 된다.
② 實相山門
實相山派의 開山祖 洪陟(直)은 일찍이 唐으로 들어가 역시 西堂 智藏에게서 法을 얻고, 興德王 원년(826)쯤에 귀국하였다. 智異山 實相寺에 자리를 잡고 片雲·秀澈 등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禪法을 크게 일으켜서가장 먼저 禪門을 형성시키기에 이르렀다. 洪陟의 諡號는 證覺이며 塔號는凝寥이다.11)
9) 上同,《寶林寺事蹟》.
10) 上同, p.63.
“是以達摩爲唐第一祖 我國則以儀大師爲第一祖 居禪師爲第二祖 我師第三祖矣.
11) 《祖堂集)〉17, 5丈, 〈東國實相和尚〉.
〈深源寺秀澈和尚碑〉(《金石總覽》上, pp.56∼60).
〈鳳巖寺智證大師碑〉(上同書,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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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九山 중에서 實相寺가 開山은 제일 먼저 한 셈인데도, 앞에서 본祖師禮懺儀文에서는 가장 마지막 자리에 禮讚되어 있었다. 아마도 다른 山門에 비해 오래 盛하지를 못했거나 또는 그 門派의 자취가 많이 남겨져있지 않아서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③ 桐裏山門
桐裏山 祖師 慧徹(惠哲, 791∼861)은 慶州 사람으로 성이 朴씨이며,
諡號가 寂忍이다. 처음 浮石寺에서 華嚴을 배웠으나 憲德王 5년(813)에唐으로 가서 그 또한 西堂 智藏의 法을 받고 文聖王 원년(839)에 귀국하였다. 그는 桐裏山으로 들어가 泰安寺에서 禪旨를 펴는 데에 힘쓰다가 景文王 원년(861)에 入寂하였으며, 門下에 如禪師·道詵 등 수 백 명의 제자가 있어서 門風을 계승하므로써 桐裏山의 禪派가 이루어졌다.12)
慧徹의 뒤를 이어 泰安寺에서 그 家風을 계승한 이는 如禪師였던 모양이나 碑文의 마멸이 심하여 무슨 如였던지는 알 수가 없으며 , 훌륭한 제자 允多에게 法을 전해준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13)
慧徹의 뛰어난 제자로 道詵(827∼898)이 있다. 道乘으로도 불리운 그는 諡號가 了空이며, 白溪山 玉龍寺에 있었기 때문에 玉龍子라고도 하였다. 그가 高麗 太祖의 탄생을 예언했다는 인연으로 뒷날 肅宗은 그를 王師로, 仁宗은 先覺國師로 追封하였다.14) 그의 뒤를 이은 慶甫(洞眞大師,
869∼948)는 일찍이 道詵(乘)의 가르침을 받은 뒤 無染(聖住山 祖師)과梵日(闍崛山 祖師) 등 禪匠을 찾고 唐으로 가서 匡仁의 法을 얻어 귀국하고는 玉龍寺에서 생을 마쳤다(高麗 定宗 3年 948).15)
桐裏山 제3祖가 되는 允多(864∼945)는 字가 法信이며 諡號가 廣慈이다. 慧徹의 嫡嗣 如禪師로부터 法을 이어받고는 門風을 떨쳤으며, 高麗太12) 〈桐裏山大安寺寂忍禪師碑〉(《金石總覽》上, pp.116∼119).
《祖堂集》17, 5丈.
13) 〈桐裏山 大安寺廣慈大師碑〉, 《金石總覽》 上, pp.174∼176).
14) 〈白溪山玉龍寺先覺國師(道詵)碑〉(《金石總覽, pp.560∼562).
15) 〈白溪山 玉龍寺洞眞大師碑〉《金石練覽》 上, pp.l8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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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의 尊信을 받고 禪法을 펴다가 惠宗 2년 (945)에 입적하였다.16)
④ 聖住山門
聖住山 祖師 無染(800∼857)은 法號가 廣宗이며 諡號가 大朗慧이다.
太宗 武烈王의 8세손으로 출가하여 五色石寺(雪嶽山)에 있다가 浮石寺로가서 華嚴을 공부하고, 憲德王 13년(821)에 唐으로 갔다. 麻谷 寶徹에게서 法을 얻고 그 곳 사람들로부터 東方大菩薩이라 존경을 받았으며, 文聖王 7년(845)에 귀국하여 王子 昕의 청으로 藍浦(忠南 保寧郡) 烏合寺(뒤에 聖住寺로 고침)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그는 景文王·憲康王의 國師가되어 無舌土의 禪法門을 열어서 크게 門風을 펼쳤다. 門下에 僧亮·詢乂·普愼·深(心)光·大通·麗嚴 등 2천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聖住山禪門을 더욱성하게 하였다.17)
無染의 제자 중에서 그 행적이 지금까지 전해진 이는 두 세 사람에 불과하다. 그의 碑文에 이름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제자 중에는 오직 心(深)光만이 그 제자 玄暉의 碑文을 통해 극히 일부분을 알게 하고 있다.
深光은 眞聖女王(887∼897)때에 德裕山 靈覺寺에서 스승 無染의 禪風을 선양하다가 제자 玄暉에게 그 법을 전하였다. 玄暉(897∼941)는 諡號가 法镜이며 深光의 법을 받은 뒤, 孝恭王 10년 (906)에 唐으로 갔다. 道乾에게 法을 배우고 高麗 太祖 7년(924)에 귀국하였으며, 太祖에 의해 國師가 되어 淨土寺(忠州 開天山)에서 禪을 펼치며 濶行 등 수백 명의 제자를 배출하였다.18)
無染의 제자였던 圓朗 大通(816∼883)은 文聖王 7년(845)에 唐으로가서 仰山 澄虚의 법을 얻고 景文王 6년(866)에 귀국하여 堤川 月光寺에서 禪을 폈다.19)
16) 註 12)와 同(《金石總覽》上, pp.174∼181).
17) 〈聖住寺大朗慧和尚碑〉《(金石總覽》上, pp.72∼83).
《祖堂集》20, 9∼10丈 〈嵩嚴山聖住寺故兩朝國師〉.
18) 〈開天山淨土寺法鏡大師碑〉《〈金石總覽〉上, pp.150∼156).
19) 〈月巖山月光寺圓朗禪師碑〉(上同, pp.8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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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大鏡 麗嚴 (862∼930)은 처음 華嚴을 공부하였으나 聖住寺로 가서無染 에게 禪을 배우고, 無染의 제자 深光에게로 갔다가 中國으로 들어 갔다. 雲 居 道磨의 법을 얻고 孝恭王 13년(909)에 귀국하여 高麗 太祖의부름을 받 아 楊平 菩提寺에 머물면서 禪을 선양하였다.20)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大通과 麗嚴이 無染의 제자였고 또 玄陣는 그의法 孫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中國에 들어가 그곳의 禪法을 다시 받아왔으므로, 귀국 후의 그들을 순수한 聖住山派의 禪師로는 보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⑤ 闍崛山門
崛山祖師 梵日(810∼889)은 品日이라고도 하는데 諡號가 通曉이다.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처럼 肉髻相이 있었고, 15세에 출가하였으며, 興德王6년(831)에 唐으로 건너가 鹽官 齊安의 법을 얻고 文聖王 9년(847)에 귀국하였다. 溟州 闍崛山에 崛山寺를 세우고 禪法을 펴기 40여 년 동안 山門밖을 한 번도 나간 일이 없었으며, 景文王에서 眞聖女王에 이르기까지4代王의 尊信을 받았다. 일찍이 唐에서 스승 齊安으로부터 “實是東方菩薩”
이라는 찬사를 들은 바 있는 그는 특이한 眞歸祖師說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敎는 釋迦世尊으로부터 나왔으나 禪은 釋尊이 眞歸祖師에게서 일깨움 받았다는 것이다.21)
梵日門下에 10哲(또는 十聖) 등 많은 제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그 행적을 전하는 이는 行寂과 開淸 뿐이다.
行寂(832∼916)은 諡號가 朗空이며 梵日로부터 법을 받은 뒤, 景文王10년(870)에 唐으로 가서 石霜 慶諸의 법을 얻고 憲康王 11년(885)에귀국하여 다시금 梵日에게로 찾아갔다. 孝恭王과 神德王 兩代에 걸쳐 國師로 있었으며, 信宗·周解 등 5백 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唐20) 〈彌智山菩提寺大鏡大師碑〉(上同, pp.130∼134).
21) 《祖堂集)) 17, 6∼8丈,〈溟州堀山故通曉大師〉.
《禪門寶藏錄》上(《韓國佛致全書〉 6, p.474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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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서 石霜의 법을 받기는 하였으나 梵日의 유일한 付法傳心弟子의 위치를 끝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22)
開淸(835∼930)은 諡號가 朗圓이며, 처음에 華嚴을 배웠으나 梵日에게서 禪을 공부하고 그 법을 이었다. 景哀王에 의해 國師가 되고 江陵 普賢山의 地藏禪院에 머물러 禪을 선양하며, 神鏡·聰靜 등 수 백 명의 제자를가르쳤다.23)
그로부터 闍崛山派가 매우 성하였던 모양이나 자세한 자료가 전하지 않으며, 高麗 睿宗(1106∼1122)때에 훌륭한 禪匠의 이름이 보이고 있으니그가 慧炤(照) 國師이다. 慧炤 역시 그 자료가 자세한 것이 남아있지 않으나 그 門下들의 행적을 통해서 조금의 片貌만을 겨우 엿볼 수가 있을 뿐이다.
慧炤는 일찍이 宋으로 들어가 淨因에게서 禪法을 얻고 귀국하여 睿宗의존경을 받아 國師가 되어 廣明寺에 머물며 법을 펴다가 말년에 順天 雞足山으로 가서 定慧寺를 세우고 거기에서 생을 마쳤다고 하며, 제자에 坦然·
之印·英甫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24)
坦然(1069∼1158)은 諡號가 大鑑이며 일찍이 廣明寺의 慧炤에게서 법을 얻었다. 仁宗 때 王師가 되었으며, 당시 宋의 高僧이었던 介諶·道膺·戒環 등과 書信 왕래가 있었고, 나중에 晋州 斷俗寺로 가서 제자들을 일깨우다가 생을 마쳤다. 그의 碑에 “高麗國 曹溪宗 崛山下 斷俗寺大鑑國師”라고있으므로, 그가 闍堀山門의 禪師였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나중에 언급이 되겠지만 高麗 曹溪禪宗의 中興祖로 알려진 佛日普照國師 知訥(1158∼1210)도 闍崛山門派의 출신이었다고 한다.
22) 〈太子寺兩朝國師朗空大師碑〉(《金石總覽》上, pp.181∼188).
23) 〈普賢山地藏禪院朗圓大師碑〉(上同, p.140∼144).
24) 圆鑑 冲止 撰, 〈慧炤國師祭文〉(《東文選》 卷 109, 《韓國佛敎全書》 6,
p.396 中).
圓鑑 冲止 撰, 〈定慧入院祝法壽疏〉(上同, 卷 112. 上同, p.398 中).
〈眞樂公重修清平山文殊院記〉(《金石總覽》上, p.326).
〈斷俗寺大鑑國師碑〉 및〈智勒寺廣智大禪師墓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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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師子山門
師子山의 실제 開山者는 折中이긴 하지만 그 山門의 祖師는 雙峰和尚道允이다.
道允(798∼868)은 道均·道雲으로도 쓰이며 諡號가 徹(哲)鑑이다. 憲德王 17년(825)에 唐으로 가서 南泉 普願에게 법을 받고 文聖王 9년(847)
에 귀국하여 金剛山에 머물다가 雙峰寺(全南 綾州)로 가서 크게 禪法을폈다.25)
道允의 뒤를 이은 제자 折中(826∼900)은 諡號가 澄曉이며, 憲康王 때(875∼886) 師子山으로 가서 興寧禪院에 터를 열었다. 이 곳에서 스승으로부터 받은 法을 크게 선양하며 , 如宗·弘可·理靖·智空 등 수많은 제자를배출하였기 때문에 師子山의 禪門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26)
⑦ 鳳林山門
鳳林山 역시 開山祖는 審希이나 그 門祖는 慧目山和尚 玄昱이다.
玄昱(787∼868)은 憲德王 때 (809∼826) 唐으로 들어가 章敬 懷暉에게서 법을 받고(現傳 史料上으로는 懷暉의 入寂後에 玄昱이 入唐한 것으로 되어 있다.) 僖康王 2년(837)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南岳 實相寺로 가있다가 慧目山 高達寺로 옮겨가서 禪을 크게 졌다. 이 곳에서 閔哀王으로부터 景文王에 이르는 역대 왕의 尊信을 받으며 교화에 힘쓰다가 입적하니, 景文王이 圓鑑國師의 諡號를 내렸다.27)
玄昱의 뒤를 이은 제자 審希(854∼923)는 法號가 法膺이며 諡號가 眞鏡인데, 9세에 출가하여 慧目山으로 가서 玄昱의 가르침을 받았다. 孝恭王때(897∼912) 鳳林山으로 가서 절을 세우고 제자들을 일깨우며 門風을크게 선양하였으므로, 鳳林山禪門이 형성되었다.28)
審希에게는 景質·融諦 등 수 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것25) 《祖堂集》17, 17∼18丈 및 〈雙峯寺事蹟〉.
26) 〈興寧寺澄曉大師碑〉(《金石總览》 上, pp.157∼162).
27) 《祖堂集》 17, 5丈 〈東國慧目和尚〉.
28) 〈風林寺國師眞鏡大師碑〉(《金石總览》上, pp.97∼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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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 수가 없고, 다만 融諦의 문하에 元宗國師 璨幽가 나와서 그 家風을떨친 것으로 보이고 있다.
璨幽(869∼958)는 字가 道光이고 法號가 證眞이며 諡號가 元宗이다.
일찍 九山禪門 形成과 曹溪宗의 展開이 출가하여 公山 三朗寺의 融諦에게로 갔다가 스승의 권유에 의해 慧目山으로 審希를 찾아갔으며, 眞聖王6
년(892)에 中國으로 건너가 投子山 大同의 心印을 얻고 高麗 太祖 4년(921)에 귀국하였다. 鳳林寺(審希)와 三朗寺(融諦)에 두루 인사하고 太祖의 청으로 慶州 四天王寺에 머물다가 나중에 慧目山으로 옮겨 가서 禪林을 크게 이루었다. 太祖로부터 光宗에 이르는 高麗初 4代王의 尊信을 받았으며, 문하에 昕弘·同光·幸近·傳印 등 5백 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그門風을 드날렸다.29)
⑧ 須彌山門
開山祖인 利嚴(870∼936)은 諡號가 眞澈이며, 12세에 출가하여 眞聖女王 10년(896)에 中國으로 건너가 雲居 道膺의 문하에서 6년을 공부하고法印을 얻었다. 孝恭王 15년(911)에 귀국하여 永同 靈覺山에 머물다가 高麗 太祖의 부름에 응해 스승의 禮遇를 받았으며, 太祖 15년(932)에 海州須彌山의 남쪽 기슭에 廣照寺가 창건되자 거기에 머물러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利嚴은 그 곳에서 모여드는 學人들을 일깨워 禪法을 폈으므로,
문하에 處光·道忍·貞能·慶崇 등 수백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須彌山의 한門派를 이루기에 이르렀다.30)
利嚴에게는 훌륭한 제자가 배출되었던 모양이나 그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 계통의 계승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기가 힘들다.
⑨ 礙陽山門
앞에서 본 祖師禮餓義文에는 曝陽山祖師를 道憲으로 하고 있으나, 실질적 인 開山祖는 靜眞國師 親讓이다. 이 山門의 開山으로 인해 비로소 이29) 〈慧目山高達院國師元宗大師碑〉(上同, pp.207∼215).
30) 〈須彌山廣照寺眞澈大師碑〉(上同, p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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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九山禪門이 완성되는 것이므로, 礙陽山門의 성립시기를 밝히는 일은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먼저 道憲의 행적을 들고 다음에 親讓의 행적을 봄으로써 그 史實을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道憲(824∼882)은 字가 智誅이며 諡號가 智證이다. 일찍이 출가히여惠隱에게 禪을 배워 그 法을 이었는데, 惠隱의 스승은 遵範이며 遵範에게法을 전한 스승은 神行이다. 神行(704∼779)은 일찍이 法朗에게서 释法을 배웠으나 唐으로 가서 北宗 神秀 계통의 志空으로부터 다시 법을 받고귀국하여 北宗禪을 폈다고 한다.31) 그러므로 道憲은 北宗禪 계통이 되는데 그 뒤 賢溪山 安樂寺에 머물다가 어느 信士의 청으로 曦陽山에 새로지은 절(鳳巖寺)로 가서 좀 지내다가 다시 賢溪山으로 가서 생을 마쳤다.
그래서 그를 賢溪 山智證大師·賢溪善知識이라 일컬었으며, 그가 한때 머물렀던 曦陽山 鳳巖寺에는 그의 碑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32)
兢讓(878∼956)은 尊號가 奉宗大師(新羅 景哀王으로부터 받음) 또는證空大師(高麗 光宗에게서 받음)이며 諡號가 靜眞이다. 일찍이 西穴院 楊孚로부터 배움을 받았는데 그 스승 楊孚가 바로 道憲의 嗣法弟子이므로道憲은 兢讓의 師祖가 된다. 兢讓은 孝恭王 4년(900)에 中國으로 건너가谷山 道緣에게서 法을 얻고, 景哀王 1년(924)에 귀국하여 康州 伯嚴寺에머물렀다. 그러다가 高麗 太祖 18년(935)에 더 나은 道場을 찾아 曦陽山으로 가서 마침 그의 師祖이던 道憲이 머물렀던 절이 허물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그 터에 새로 鳳巖寺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에서 그는 道場을 넓혀 祖道를 크게 선양하여 太祖로부터 光宗에 이르는 역대 왕의 尊信을 받았으며, 逈超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曦陽山門의 家風을 확립하였다.33)
위의 智證(道憲)·靜眞(兢譲) 두 禪師의 행적을 담은 兩碑에 의하면 道憲이 鳳巖山寺에 먼저 머물렀기는 하나, 하나의 山門을 열지 못하고 오래31) 〈斷俗寺神行禪師碑〉(上同, pp.114∼116).
32) 〈鳳巖寺智證大師碑〉(上同, pp.88∼96).
33) 〈曦陽山鳳巖寺靜眞大師碑〉(上同, pp.19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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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아 賢溪山으로 되돌아 가버렸으며, 그 뒤 절이 廢寺가 된 다음에 그곳을 우연히 들르게 된 兢讓이 다시금 절을 일으켜 禪門 道場을 새로이열었다는 것이므로, 曦陽山門의 실제 開山祖는 분명히 兢讓이며 아울러 그開山時期는 兢讓이 그 곳에 처음 들어간 高麗太祖 18년 이후로 보아야할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두 碑文을 비교해 보면 法統上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앞에서 본 道憲의 法系는 그의 碑(智證碑)에 의한 것으로,
北宗(神秀)· 志空-神行-遵範-道憲-楊孚-兢讓이 되며, 兢讓의 碑(靜眞碑)에서는 南宗(慈能)…神璧-慧昭(新羅)-道憲-楊孚-兢讓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의 慧昭(774∼850)는 全州 金馬 사람으로 哀莊王 5년(804)에唐으로 갔다가 滄洲 神鑑에게서 心印을 얻었으며, 거기서 東方聖人이란 말을 들었는데 興德王 5년(830)에 귀국하였고, 처음 尙州 長栢寺에 머물다가 智異山 玉泉寺(現 雙溪寺)로 옮겨가 道化를 크게 떨친 禪師였다.34)
이 慧昭의 행적을 담고 있는 그의 碑(眞鑑碑)와 앞의 智證碑는 撰者가동일인(崔致遠)인데도 두 碑에서는 전혀 慧昭와 道憲이 師弟間이라는 언급이 없다. 오히려 智證碑에서는 道憲의 系譜를 앞에서 든 바와 같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반면에 南宗禪의 傳來者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雙溪慧昭의 이름이 들어있는데에도 전혀 道憲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이고있다. 그러므로 崔致遠이 두 碑文(眞鑑碑와 智證碑)을 撰할 당시에도 慧昭와 道憲이 師弟관계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두 禪師는 애초에 師弟間이 될 수 없는 각기(南宗과 北宗이라는) 계통을 달리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兢讓의 (靜眞)碑에서는 神行 遵範 慧隱에 이어지는 北宗禪系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곧바로 慧能-懷讓-道一-神鑑으로 이어지는 南宗禪法을 받아온 慧昭가 道憲에게 전하고 道憲이 楊孚에게 전함으로써 兢讓이 眞鑑 慧昭의 曾法孫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兢讓에 이르러 그34)〈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碑〉(上同, pp.6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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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系를 北宗에서 南宗으로 바꾸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 할 수 있다.
兢讓 자신이 唐에서 南宗系의 道緣으로부터 南頓의 禪法을 받아오면서 이미 北宗禪은 버린 셈이 되지만, 실은 그 때(羅末 麗初)에는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는 南宗의 세력에 北宗禪이 자취를 감춘 형편이었으므로 法脉이끊기게 된 道憲과 楊孚를 (山門形成이 안되어 이미 法系가 斷切된 상태인) 雙溪 慧昭의 法系에다 붙임으로써, 兢讓 자신과 연결지어 南宗으로 살려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35)
그와 같이 兢讓에 의해 開山된 曦陽山門에서는 그 뒤를 이은 逈超가 있었으나 자료가 없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고, 그 제자에 圓空國師 智宗이 있어서 행적을 남기고 있다.
智宗(930∼1018)은 曦陽山의 逈超에게서 法을 배움받은 뒤 光宗 10년(959)에 中國으로 가서 永明 延壽(904∼975)로부터 心印을 얻었으며, 國淸寺 淨光으로부터는 天台敎觀을 배우고 光宗 21년(970)에 귀국하였다.
왕의 청으로 金光禪院에 있다가 成宗 때 積石寺로 옮겨갔으며, 穆宗은 光天遍炤至覺 知滿圓默禪師의 호를 가하고 佛恩寺와 外帝釋院에 住持시켰고,
顯宗은 廣明寺에 있게 하여 法號를 寂然이라 하고 또 王師로 삼아 普化란호를 가하였다. 그가 만년에 曦陽山門과 관련있는 賢溪山 居頓寺에 들어가坐化한 것으로 보아 曦陽山門人으로서의 위치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이라 하겠다.36)
그 뒤 神宗과 高宗代에 걸쳐 활동했던 圓眞國師 承迪(1171∼1221)도일찍이 曦陽山 鳳巖寺 洞純에게로 가서 得度된 曦陽山人이었다.37)
이상에서와 같이 九山禪門은 각기 그 法系와 傳統을 相承하여 , 나중에全 禪門이 曹溪宗이라는 하나의 宗名을 갖게 된 뒤에도 高麗王朝의 마지35) 拙稿, 〈曦陽山禪派의 成立과 그 法系에 대하여〉《韓國佛敎學》 4, 1979).
36) 〈賢溪山居頓寺圆空國師碑〉(《金石總覽》上, pp.253∼259).
37) 〈寶鏡寺圓眞國師碑〉(上同, p.449∼453). 〈慈雲寺眞明國師碑〉(上同, pp.
594). “陽山圓眞 國師”라고 하여 圆眞國師 承逈이 曦陽山門人임을 明記하고있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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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까지 줄곧 그 계통을 지켜왔던 것으로 보인다.
2. 九山門의 成立과 그 性格
이제 앞에서 대략 九山門 各派의 開山과 그 家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땅에 소위 祖師禪法을 제일 먼저 전한 이로는 法朗으로 알려져 있고, 그 다음이 法朗의 제자였다고도 하는 神行으로 되어 있다. 法朗은 中國禪의 四祖 道信(580∼651)에게서 法을 얻어 귀국하였다고 하나,38) 道信의 生時에 귀국하였다면 그 寂年인 新羅 眞德女王 5년(651) 이전의 일이 되니 三國時代에 이미 禪法을 전해온 셈이 된다.
그러나 그의 제자로 되어있는 神行이 704년(聖德王 3年)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서 年代상의 차이가 많아 의문점이 없지도 않다. 현재 碑文이 남아 있어서 행적이 뚜렷한 神行은 惠恭王 15년(779)에 76세로 智異山 斷俗寺에서 입적하였다39)는 것이므로, 그가 귀국하여 활동한 때는 景德王(742∼765) 및 惠恭王代가 된다. 그러므로 통일 전성기에 이미 北宗禪이 神行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처럼 北宗禪이 일찍이 들어와 있어서 神行으로부터 遵範·惠隱·道憲·楊孚에로 이어져 왔으나, 楊孚 代에 그 法系가 단절되고 도리어 道憲과 楊孚가 南宗의 慧昭系로 연결되어졌음을 앞에서 본 바가 있다. 아무리 일찍이四祖禪(法朗에 의해)과 北宗禪(神行에 의해)이 전래되었다고 해도 그 활동이 미미하고 傳法의 맥이 단절되어 버렸다면, 그 禪法이 전해져 왔다는사실만 남을 뿐이지 실제 그 禪法은 新羅를 답습하여 高麗代에 확립된 海38) 前掲 〈智證大師碑〉 (上同, pp.90∼91).
“……唐四祖爲五世父 東渐于海 遡游數之 雙峰子法朗· 朗大師從大毉之大證……·”
39) 註 31)과 同(《金石總覽》上,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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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의 禪宗(九山禪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역사적 사실에서 볼 때 韓國禪宗의 확립은 九山禪門의 성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九山門은 韓國禪宗이 확립된 초기적현상일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禪門(派) 형태로도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그와 같은 海東의 禪宗인 九山禪門은 迦智山祖師 道義를 그 初傳者로 삼기 때문에 앞의 體澄(普照)碑文에서 보았듯이 그를 新羅(禪)의 제1祖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九山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이 海東 최초의 禪宗은 新羅후기의 道義를 그 初傳者로 하여 차례차례 자리를 잡았으나 실은 高麗代에 들어와서 須彌山門과 曦陽山派가 이루어짐으로써 그 완성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종래에 九山의 성립을 新羅代로 본 學者도 있으나,40) 이는 앞에서 본 祖師禮懺儀文의 아홉번째 祖師이름이 新羅의 洪陟(實相山祖師)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祖師儀文대로 따르더라도 須彌山派는 高麗代에 성립된 것이 분명하다.
須彌山門의 근거가 되는 廣照寺가 高麗太祖 15년(932)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山門의 형성을 그 이후로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兢讓이 鳳巖寺를 새로 일으켜 거기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太祖 18년(935)이므로 曦陽山門의 성립은 더 뒤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개 山門의 형성은 道場이 정해진 뒤 門徒들이 배출되어 그 師門을 계승하여 家風을 확립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須彌山 祖師 利嚴은 太祖 19년(936)에 입적하였으므로 太祖의 말년(26年·943)을 전후해서 그 山門이 드러나고, 兢讓은光宗 7년(956)에 입적하였기 때문에 光宗代(950∼975) 쯤에 山門이 확립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상에서와 같이 대충 살펴본 바에 의하여 九山이라 통칭되는 禪門(海東에서의 禪宗)이 성립된 것은 高麗(太祖에서 光宗에 이르는) 초기의 일40) 金映遂,〈曹溪禪宗에 就하여〉(《震檀學報》9, 1938).
崔柄憲,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韓國史研究》7, 197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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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아흡 山門이 그 때 일시에 함께 이루어졌다는것은 아니다. 新羅 말부터 자리 잡아오던 山門이 九山門이라는 하나의 禪世界 즉 禪門을 형성하게 된 結果的 時期가 그 때였다고 할 수가 있다.
앞 장의 각 山門 開山을 통해 대강 그 윤곽들이 드러나 있는 일이지만九山禪은 모두가 南宗禪 일색으로 되어 있다. 南宗 즉 南頓禪이란 菩提達摩를 祖로 하는 中國禪이 제6祖 慧能(638∼713) 代에 이르러 北宗과 南宗으로 나뉘어지면서, 慧能을 그 正統으로 삼는 계통을 일컫는 것 이다.
그런데 新羅 후기에 禪法을 전해온 각 山門의 開祖들은 모두가 다 馬祖道一(709∼788)의 孫弟子로 되어 있다. 兢讓의 碑文에 있는 曦陽山派의주장대로 眞鑑 慧昭를 曦陽山門의 祖로 볼 경우 모두 8명의 禪師가 다같이 소위 洪州宗(江西派) 馬祖의 門孫이 된다.
新羅 南宗의 初傳者인 道義(迦智山 祖師)를 비롯하여 洪陟(實相山 祖師)과 慧徹(桐裏山 祖師)의 3師는 다같이 西堂 智藏의 제자이며, 無染(聖住山 祖師)은 麻谷 寶徹의 法嗣이고, 道允(師子山 祖師)은 南泉 普願의 法을 받았으며, 玄昱(鳳林山 祖師)은 章敬 懷暉에게서, 梵日(闍崛山 祖師)은鹽官 齊安에게서 각각 法을 얻었고, 雙溪 慧昭(曦陽山門 初傳祖로 追遵된)
는 滄州 神鑑의 法을 이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들 智藏·寶徹·普願·懷暉·齊安·神鑑은 모두가 道一의 제자이기 때문에, 新羅末에 직접이거나 간접이거나 한 山門의 祖로 받들린 여덟 祖師가 다 馬祖 道一의 法孫이 되며 아울러 六祖 慧能의 玄法孫이 되는 것이다.
高麗에 와서 開山된 須彌山 祖師 利嚴의 法師 雲居 道膺은 中國 曹洞宗祖師인 洞山 良价의 제자인데, 良价는 藥山 惟嚴의 孫弟子로서 慧能의 高足 중의 하나인 靑原 行思(?∼740)의 玄法孫이 된다. 또 曦陽山의 실제開山人인 兢讓에게 法을 전한 谷山 道綠은 石霜 慶諸의 嫡嗣이며 惟儼의曾法孫이므로 역시 靑原 行思의 계통이 된다. 그러나 馬祖의 法師 南岳 懷讓과 靑原 行思는 말할 것도 없이 六祖 慧能의 대표적인 제자이므로,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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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의 두 開山祖(利嚴·兢讓)가 비록 馬祖의 法系는 아니라고 해도 南宗禪계통임에는 틀림이 없다.
九山禪門 형성의 源流가 되는 南宗禪 法系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대략다음과 같다.
아래의 略表를 통해 新羅代의 傳法 및 開山祖는 모두가 江西 또는 洪州宗으로 일컫는 馬祖 道一의 法孫이며, 高麗代 開山의 두 禪師는 六祖 下靑原 行思 밑으로 石頭 希遷∼藥山 惟儼에 이어지는 曹洞宗과 石霜 慶諸 계통의 法을 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九山禪門 형성에 있어서는 江西派(洪州宗)니 曹洞宗이니 石霜系니, 또는 더 넓게 南岳(懷讓)系니 靑原(行思) 派니 하는 분파적 구별같은 것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오직曹溪 慧能을 한결같이 祖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馬祖 門孫으로서 南宗 第1傳者로 알려져 있는 道義가 智藏에게로 가기에 앞서 처음 曹溪(寶林寺)에 이르러 祖師(慧能)의 影堂에 禮拜코자 했을때 堂의 門扇이 저절로 열렸다가 세 번 절하고 나오니 문이 또한 저절로닫혔다는 故事41)를 통하여, 南宗(二祖)禪의 秘法(門)이 海東을 향해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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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다는 海東 傳法의 正統的 必然性을 나타내는 상징적 암시로도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또 眞鑑 慧昭를 曹溪(六祖)의 玄孫(則禪師乃曹溪之玄孫)42)이라고 한 것을 비롯하여, 新羅代의 南宗禪에 속하는 여러 禪師들의現存碑文에서 曹溪 慧能을 祖로 삼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高麗代 開山인 須彌山의 利嚴碑43)에도 “曹溪를 祖師로 삼아 法水가 길이 흘렀다”고 하였으며, 曦陽山의 兢讓碑44)에도曹溪가 祖임을 밝히고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利嚴은 南岳系가 아닌 靑原系로서 曹洞宗의 道膺에게서 法을 받고 왔으면서도, 新羅代 南岳系 馬祖 門孫들의경우와 마찬가지로 曹溪 六祖를 祖로 삼고 있다. 특히 北宗禪(道憲∼楊孚)
系의 禪法을 배우고 唐의 道緣(靑原… 石霜系)에게서 法을 받은 兢讓이그의 法祖 法師였던 道憲과 楊孚 마저도 慧昭의 法統에 속하게 하여, 그山門을 曹溪의 法脉에다 연결시켜 놓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九山門이 모두 그 傳法의 先後와 門派의 同異를 가리지 않고 다같이 曹溪를 祖로 하는 하나의 祖師禪門으로 展開시켜 왔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비록 山門은 아흡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모두가 함께曹溪(慧能)를 祖로 삼고 그 禪法(曹溪禪)을 參究하였으므로, 九山禪門의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高麗 초에 확립된 曹溪를 祖로 하는 海東의禪宗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Ⅱ. 曹溪宗名을 쓴 때와 그 까닭
앞에서 본 바와 같이 九山門은 曹溪(六祖)를 祖로 하는 释門이기 때문에, 이 九山門을 하나의 宗으로 볼 때 曹溪의 禪宗 즉 曹溪宗이라고 하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九山門의 參學僧徒들이 처음으로 僧科應試의 허락을 王으로부터받게 되는 제13대 宣宗 元年(1084)까지도, 九山이 僧科를 치를만큼 하나의 宗派 자격을 갖추었으면서도 당시 敎宗들이 華嚴業·瑜伽業·律業 등으로불리우듯 宗名이나 業名이 따로 없이 九山門이라 통칭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曹溪라는 宗名이 등장하여 九山門을 하나의 宗으로 묶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曹溪라는 宗名이 언제 확정되었으며, 또 어떠한 까닭으로 宗名을 曹溪라고 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여기에서 차례로살펴보고자 한다.
1. 宗名 확정과 그 時期
현존 자료에서 曹溪宗이란 宗名을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는 사례는 明宗 2년(1172)에 이루어진 大鑑國師 坦然(1069∼1158)의 碑題에서라고할 것이다. 거기에는 ‘高麗國 曹溪宗 崛山下 斷俗寺 大鑑國師’45)라고 있다.
이 碑題를 통해서 闍崛山이 曹溪宗에 속해 있음을 보게 되므로, 闍崛山을 포함한 九山門이 曹溪宗이라는 하나의 宗名속에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아울러서 曹溪宗은 曹溪를 祖로 하는 九山禪門 전체를 하나의 宗으로하여 붙여진 宗名임을 알 수가 있다.일찍이《朝鮮佛敎通史》46)에서는 牧牛子 知訥(1158∼1210)이 松廣山45) 李之茂 撰, 〈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金石總覽》 上,p.562. 聞慶 金龍寺藏寫本에 依한 것임).
吉祥寺로 들어가 曹溪山 修禪社로 山名과 寺名을 고치고부터 비로소 曹溪宗이 設立되었다고 하였다. 즉
高麗中世 佛日普照…… 移居松廣山吉祥寺 結定慧社 大揚禪風 熙宗即位 命號改爲 曹溪山修禪社 曹溪設宗 始見于此.
라고 하여, 그 제목까지도 ‘普照後始設曹溪宗’이라 하였다.
여기에 있는 대로 熙宗(1205∼1211)이 즉위하여 曹溪山 修禪社로 改號하고부터 비로소 曹溪宗이 세워진 것이라면, 高麗 曹溪宗의 始設은 제21대 熙宗 元年(1205)의 일이 된다. 그런데 앞에서 본 坦然(大鑑)碑가 세워진 것이 제19대 明宗 2년(1172)의 일이므로 熙宗 1년보다는 33년 이전이 된다. 曹溪宗이 비로소 設立되었다는 해보다 이미 33년 전에 세워진坦然碑에 曹溪宗이라는 분명한 宗名이 새겨져 있으므로, 普照 知訥이 曹溪宗을 始設했다는 것에는 상당한 모순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그 著者(李能和)는 同書에서, 普照 知訥 이후에 普照의 계통 외에 臨濟宗 출신의 禪師들도 曹溪宗이라 일컬었는데 그 뿐만이아니고 普照 이전의 臨濟宗 계통 禪師도 또한 曹溪宗이라 일컬은 이가 있다고 하여 그 예로 大鑑國師碑文을 옮겨놓고 있다.47) 坦然의 碑가 知訥의曹溪山 이전에 세워졌고 거기에 曹溪宗名이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확인하고도 知訥이 비로소 曹溪宗을 세웠다고 하면서, 그 이전에도 臨濟宗계통의(高麗)禪師가 曹溪宗이라 일컬은 사례가 있다고만 했을 뿐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高麗의 曹溪宗은 분명히 知訥에 의해 始設되었는데, 그 이전에 臨濟系 禪師 중에서도 曹溪宗이라고 일컬은 예가 있으니까 知訥 始設의 曹溪宗 외에 高麗에는 또 하나의 曹溪宗이 이미 存立해 있은 셈이 된다.46) 李能和, 《朝鮮佛敎通史》下, (新文館 1918) p.336.47) 上同書, p.501.
‘‘雖得法於臨濟之派 仍未免曹溪宗師之法稱矣 非徒普照國師以後臨濟法孫 仍稱曹溪宗也 普照國師以前 臨濟法孫 亦有稱曹溪宗者.” “高麗國曹溪宗崛山下断俗寺大鑑國師之碑銘…….”
다시 말해서 그 通史에 의한다면 高麗에는 臨濟系의 曹溪宗과 知訥系의曹溪宗이라는 두 曹溪宗이 別立해 있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坦然碑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高麗國 曹溪宗이 존립해 있는데 똑같은 이름의 曹溪宗이 다시 세워질 수가 있겠으며, 또 설사 새로이 따로 別立시켰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이름의 宗이 세워져 있었으니까 始設(曹溪宗)이라고해서는 맞지가 않는다고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曹溪山은 어디까지나山名(기왕의 松廣山을 改名한)이기 때문에 修禪社(처음 定慧社였으나 그이웃에 이미 定意寺가 있었으므로 고쳤음)를 밝힐 경우에는 언제나 曹溪山修禪社라고 하였을 따름이지 한번도 그 앞에 曹溪宗이라는 宗名을 붙인사례를 볼 수가 없으며,48) 오히려 曹溪山 앞에 大乘禪宗이라 표명한 사례는 보이고 있다.49)
여러 가지 現存史料의 사례로 보아 知訥의 曹溪山 修禪社 開設보다 상당한 이전에 高麗에는 이미 曹溪宗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있다. 특히 曹溪山 修禪社重創記50)에 보면, 松廣山 吉祥寺였던 그 곳이新羅 때의 古刹이었는데 퇴락하여 仁宗朝에 山僧 釋照가 다시 重刱하였으나 그의 死後 다시금 廢墟의 지경에 이르렀으며, 그 때 曹溪의 名僧이었던知訥(時曹溪名 僧知訥)이 이름을 숨겨 산속에 살다가 비로소 八公山의 淸凉崛에 들어가서 禪觀을 專修하니 배움을 따르는 이가 대성황을 이루어그 장소가 너무 협소하므로 제자 守愚로 하여금 結社하여 安禪할 곳을 두루 찾게 한 결과 얻어진 터가 바로 그 곳(松廣山 吉祥寺 즉 曹溪山 修禪社 터)이었다고 있다.48) 〈曹溪山修禪社 佛日普照國師碑銘〉(《東文選》 卷 117).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 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東國李相國集》및《金石總覽》上, pp.460∼461).
〈曹溪山修禪社第五世慈眞國師碑〉(《朝鮮佛敎通史》p.366).
〈曹溪山修禪社第六世圓鑑國師碑銘〉(上同, p.368).
〈海東曹溪山修禪社第十世 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 慧鑑國師碑銘〉(上同,
p.370.《金石總覽》上, p.601.《益齋亂稿》所載) 등.
49) 〈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朝鮮寺刹史料》上, p.274 및《佛敎通史》下, p.346).
50) 上同 (《寺利史料》上, pp.274∼275 및 《佛敎通史》下,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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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曹溪名僧이었다는 그 때는 그가 松廣山 즉曹溪山에 가서 山名을 고치고 修禪社를 크게 떨치기 훨씬 이전의 일이므로, 이 曹溪는 분명히 山名이 아니고 宗名이며 따라서 知訥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이 重創記는 知訥 生存時의 記錄임)에서마저도 曹溪山 修禪社 이전에 벌써 그를 曹溪宗僧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 할 것이다.
曹溪宗이라고 明記된 자료로서는 앞에서 언급한 坦然의 碑題가 가장 오래된 사례라고 할 수는 있으나, 실은 曹溪라는 두 자만으로 宗名을 뜻하거나 宗을 나타내는 사례는 그보다 앞서서 보이고 있다. 대충 몇 가지 사례를 뽑아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大禪師 祖膺이 乙巳年(仁宗 3년 1125)에 曹溪選에 中格했다고 있다.51)
이 글은 酿泉 龍門寺重修碑에 있는데 여기에는 실은 乙巳年이라고만 있을 뿐 仁宗 3년이란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龍門寺重修碑가 明宗 15년乙巳(1185)에 세워졌으므로, 그 바로 앞(60년전)의 乙巳가 곧 仁宗 3년(1125)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仁宗 3년에 曹溪選 즉 曹溪宗 僧選(僧科)이 있었 옴을 알 수가 있고, 이 曹溪選의 曹溪는 말할 것도 없이 曹溪宗을 가리킨 것이며 아울러 曹溪宗은 이미 그 이전에 존립해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② 仁宗 10년(1132)에 세운 僊鳳寺 大覺國師碑에는, ‘祐世僧統(義天)이宋에 가서 거기에 있던 天台·賢首·南山·慈恩·曹溪·西天(印度) 梵學 등을 한꺼번에 다 전해왔다’52)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西天梵學을 제외한 명칭들은 모두가 義天(1055∼1101)의 入宋 당시 그 곳에 盛했던 宗派들의 이름이다. 山名과 人名으로 보이고 있으51) 李知命 撰, 〈重修龍門寺記〉(《金石總覽》上, p. 10).
“大禪師祖膺……年十四投慧照國師門弟禪師英甫落采 乙巳年曹溪選中格.”
52) 林存 撰, 〈南嵩山僊風寺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之碑銘〉(上同, p.332).
“僧統一來上國 所有天台賢首南山慈恩曹溪西天梵學 一時傳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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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실은 그 宗의 大成者를 가리키는 칭호이면서도 각 종파를 지칭한 것으로 天台宗·賢首(華厳)宗·南山(律)宗·慈恩(法相)宗·曹溪(禪)宗이 된다. 모두가 山名 寺名(賢首 제외)으로 된 宗의 완성자 칭호를 쓰고 있기 때문에당시 禪의 主宗을 이루고 있던 慧能의 南宗禪을 曹溪라고 표현하는 것은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때 中國에서는 曹溪라는 宗名을 쓰지않았으므로, 이는 高麗的인 당시의 宗名을 거기에 붙였던 것이 아니었던가싶다. 즉 僊鳳寺碑를 세운 仁宗 10년(1132)에는 이미 벌써부터 高麗에曹溪宗이 있었고, 그 曹溪宗은 唐의 曹溪(六祖)를 祖로 하는 宗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엿보게 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③ 그리고 同碑 陰記에는, 高麗 國初에 크게 행해졌던 業(宗)으로 曹溪·
華嚴·瑜伽를 들고 있다.53)
高麗의 초에 크게 성하였던 세 종파(業)중에서 曹溪를 그 첫번째로 들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존의 여러 자료들에는 고려 초기에 華嚴業과 瑜伽業은 보이고 있어도 曹溪業은 보이지 않는다.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九山禪門이 성하였으므로, 여기에서의 曹溪도 九山門을 가리키는 것임을 쉽게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大覺國師墓誌銘54)에는 義天이 공부할 당시 (高麗初期)의 6學宗 중에禪寂宗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이 禪寂宗은 종파적인 성격보다는 專攻分野的인 專門修業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므로, 55) 國初 大行의 業 중에 들어갈만한 명칭이지만 그(大覺墓誌) 외의 아무데에서도 그러한 宗名을 다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禪寂宗 역시 九山門의 專業的인 면을 일컬은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정작 九山門을 業(宗)名으로 지칭하는 경우에는 꼭 曹溪라고 하고 있다. 이는 禪寂宗이 당시의 九山門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며, 따라서 九山門을 지칭하는 宗(業)名이 曹溪였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53) 〈僊鳳寺大覺國師碑陰記》(黃壽永, 《增補 韓國金石遺文》 p.470).
‘‘而與先國初大行曹溪華嚴瑜伽軌 軌範齊等 世謂之 四大業也.”
54) 朴浩 撰,〈興王寺故國師 大覺和尚墓誌銘〉(《金石總贷》 上, p.294).
55) 拙稿, 〈五敎九山에 대하여〉(《佛敎學報》16,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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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므로 高麗초기에 가장 성하였던 九山禪과 華嚴 및 瑜伽業을 순서대로 언급하면서 오직 九山禪만을 曹溪라고 고쳐 부르고 있는 것은, 僊鳳碑建立 당시(仁宗 10年·1132)에 九山禪門을 이미 曹溪宗이라 부르고 있었던 까닭임이 자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④《楡岾寺事蹟記》56)에는, 明宗 19년(1189)에 曹溪大禪師 益蔵이 金剛山 楡岾寺에 來任하였다고 있다.
물론 明宗 19년은 坦然碑가 세워진 明宗 2년보다는 뒤가 되지만, 禪宗法階의 最高位인 大释師가 앞서 祖膺의 경우처럼 曹溪宗 僧選에 합격한것은 몇 십 년 이전의 일로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도 曹溪라고만 되어있으나 宗名으로 보아 曹溪宗의 大禪師임을 알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대충 살펴봄으로써 비록 曹溪라고 있으나 山名이나 人名(慧 能)이 아닌 宗名으로 쓰였음을 알 수가 있는데, 坦然碑의 경우를 포함하여 曹溪宗名에 관한 사례로서 모두 다섯 가지를 본 셈이다. 이 중에서그 기록상의 연대가 가장 앞서는 것이 祖膺의 曹溪選 中格의 해가 되는仁宗 3년(1125)이며, 그 다음이 曹溪를 九山禪門(曹溪六祖를 祖로 하는)
의 宗名으로 표기하고 있는 僊鳳寺碑 建立 때인 仁宗 10년(1132)이라고할 것이다.
曹溪宗이라는 세 글자로 宗名을 나타낸 첫 현존사례가 되는 坦然碑도그 건립이 明宗 2년(1172)이지 바로 그 때 曹溪宗이 설립된 것은 물론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仁宗 3년(1125)에 曹溪選을 치렀다고 해서 曹溪宗 僧選이 바로 그 해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坦然만 하더라도 19세에 출가했을 때가 宣宗 4년(1087)이니 그로부터 90에 세상을 떠날 때(1158)까지 70여년을 禪僧생활을 한 셈이 되는데, 그 동안 曹溪宗이라는 宗名을 쓰지 않았던 그에게 그가 입적한 14년 뒤에 세우게 된 碑56) 閔漬 撰, 〈金剛山楡岾寺事蹟記;〉(《楡岾寺本末寺誌》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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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에다가 비로소 曹溪宗이라는 宗名을 붙여주었을 리는 만무하므로 그의생전에 이미 宗名을 썼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高麗의 종파는 초기에서 중엽에 이르기까지에는 주로 業이라 썼고, 중엽에서 후기로 향할 무렵에 宗이란 명칭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이고 있다. 앞에서 본 僊鳳寺碑에서도 曹溪·華嚴·瑜伽. 天台를 4大業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때(仁宗 10년·1132 碑建立)까지도 각 종파의 호칭에 宗을 붙이지 않고 業으로 썼던 것같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 曹溪業이 종파명으로 대두되었을 가능한 上限時點은 대략 언제쯤이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海東의 佛敎史에 있어서 宗派(業이란 이름으로)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高麗 초기부터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때는 주로 僧科(僧選또는 選試)制度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같이 보이고 있다. 현존 자료에 있어서 종파형태의 業이란 말이 光宗(950∼975)代 이전에는 보이지않는데, 일반 科擧制가 光宗 9년(958)에 비롯된 뒤 僧科制도 생겨난 것으로 본다면 僧科制實施이전에 안보이던 業(宗派形態)이 光宗 또는 그 이후에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특히 天台宗의 경우에서 그 실례를 볼 수가 있으니, 三國·新羅時代에 이미 전해져 있었던 天台敎觀이었으나 大覺國師義天(1055∼1101)이 肅宗 2년(1097)에완성된 國淸寺에서 그 敎觀을 開講함으로써 비로소 高麗 天台宗의 출발을보게 되는데, 실제에 있어서 乾統元年 즉 肅宗 6년(1101)에 大覺(義天)이奉恩寺에서 100명의 學慶者에게 시험을 보여 40여명의 賢良을 뽑음으로써 세상에서 말하는 4大業의 하나인 天台宗이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는것이다.57)
그와 같이 僧科와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본다면 九山門 參學僧徒들이 처57) 註 53)과 同.
“乾統元年辛巳 大覺始舉宏網 抄學憂者一百人 坐奉恩寺以宗經論一百二十卷試取賢良四(?)十餘人 而與先國初……四大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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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으로 選試에 임하게된 시기를 전후해서 九山門을 曹溪라는 하나의 宗(業)名으로 정착시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僧科制의 실시는 光宗代로 볼수가 있으나 이 때는 주로 敎宗계통의 僧選이었던 모양이며, 禪宗계통 특히 九山禪 參學徒가 비로소 選試에 응할 수 있게 된 때는 宣宗 元年(1084)의 일로 되어 있다. 그 때 普濟寺僧 貞雙 등이 王에게 奏請하여 九山門 參學僧徒들도 進士科처럼 選試를 치를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58)
그리고 또 앞에서 본 것처럼 曹溪宗(業)에 관한 현존 자료의 기록이 주로 仁宗 때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天台宗 開立에도 무슨영향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즉 天台宗이 開立된(1097∼1101)이전에는 曹溪라는 宗名은 볼 수가 없고 그 후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天台 智者大師의 天台를 宗名으로 하는 天台宗의 출발을 보고, 九山門도 曹溪 慧能大師의 曹溪를 宗名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던가하는 것이다.59)
지금까지 보아온 바를 종합해서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曹溪를 祖로 하는 九山禪門이 어떤 필요성에 의하여 曹溪라는 宗名으로 확정하게 되었는데 그 時期는 宣宗 元年(1084, 九山僧徒가 처음 僧選에 응할 수 있게 된)
전후와 肅宗 6년(1101, 天台宗 開立) 전후에 걸친 때 쯤으로 볼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2. 宗名 定着의 縁由
종래의 九山禪門이 曹溪라는 宗名을 갖게 되었다는 史實과 그 時期에관해서 대강을 살펴보았다.
58) 註 1)과 同.
59) 拙稿, 〈高麗의 曹溪宗名考〉《東國思想》 10·11,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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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九山門이 무슨 까닭으로 공통된 하나의 宗名을 가져야 했고,
또 曹溪라는 宗名을 어째서 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사실 曹溪란 六祖 慧能이 머물렀던 中國 廣東省 韶州 雙峰山 밑 寶林寺가 자리했던 곳의 地名으로 曹侯村의 시내(溪)라는 말인데, 이 곳에 六祖가 머물러서 禪宗을 크게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일러 曹溪(大師)라고 하게 되었다. 그래서 新羅末 이래의 우리 禪門에서는 曹溪를 六祖 慧能의 통칭으로 삼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앞 장에서 본 바와 같이 각 山門의 傳法 및 開山祖들이 모두 曹溪를 祖로 삼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中國의 南宗(曹溪)禪에는 여러 갈래로 派가 생기고 宗이 나뉘었다. 우리 海東에도 九山門派로 나뉘어졌으며, 後來 門孫 禪侶들이 分宗 派生된 中國의 禪法을새로이 전해 오기도 하였으나 이 땅에 돌아오면 한결같이 曹溪의 法孫으로서 자처하였었다.
앞에서 예를 든 외에도 이미 國內에서 深光(聖住山祖師 無染의 法嗣)의法을 받고 다시 中國으로 가서 九峯山 道乾으로부터 心要를 얻은 玄暉(897∼941)의 碑文에도, “曹溪를 祖로 하여 代를 이어 서로 전해 大師(玄暉)에 이르렀다”60)고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中國에 간 일도 없고 국내에서도 山門이 뚜렷하지 않으면서 雪嶽山 陳田寺에 이르러 道義의 靈塔과 그 眞影에 參禮하고 길이 제자가 될 것을 서원하였다는 小白山 運禪師(855∼937)의 碑61)에도, “曹溪之旨”와 “曹溪爲祖”가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高麗에 들어 와서 法眼宗 계통의 禪을 전한 고승들이 道峯 慧炬國師(淸凉 文益의 法嗣)62)를 비롯하여 앞에서 본 智宗 외에도 많이 귀국한 것으로 보이고 있으나,63) 法眼宗이 국내에 세워진 일도 없고 또한 九山門의60) 註 18)과 同, p.152.
“曹溪爲祖 代代相契至于大師.”
61) 崔彥撝 撰,〈毗▼(田+盧)<newCharhref="KC02726"/>庵眞空大師碑〉(《金石總覽》上, p. 137·139).
62) 《景德傳燈錄》 卷 25(《大正蔵經》卷 51,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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旣存 禪門을 변경시킨 일도 없었다고 할 것이다.
또 앞에서 본 바 있는 坦然(大鑑) 의 碑에는,
宗派로써 상고한다면 스님 (坦然)은 臨濟의 9代孫이다(以宗派考之師乃臨濟九代孫也). 64)
라고 있다. 물론 臨濟는 馬祖 道一의 法嗣인 百丈 懷海(720∼814)의 제자가 되는 黄檗 希運의 法을 이은 義玄(?∼867)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의계통을 臨濟宗이라고 한다. 그런데 同 碑文에서 坦然은 中國에 간 일도 없고 廣明寺에서 慧炤國師에게 배워 心要를 전해 받은 것으로만 되어 있으며, 이미 본 바와 같이 그 碑의 앞머리에는 “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이라고 되어 있다.
같은 同一人의 碑題에 분명히 曹溪宗의 崛山(闍崛山)下라고 하여 그 소속 宗과 山派를 밝혀놓고 있으면서도 그 碑文에서는 그의 宗派를 臨濟宗이라고 하였다. 즉 宗派를 따진다면 臨濟의 9代孫이라고 하였으니, 그 碑題에서도 그의 소속 宗을 臨濟宗으로 명시해 놓았어야 옳았을텐데 겉과안이 각각 다르게 되어 있으므로 모순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碑文에서의 宗派는 宗脈과 系派로 보아야 할 것이니, 흡사 利嚴이 洞山良价의 法嗣인 道膺에게서 法을 받았으므로 利嚴과 그 法孫들은 曹洞宗의宗脈과 系派에 속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비록 宗脉과 系派로 따진다면 洞山의 法孫이지만 高麗에서는 九山門 중의 하나인 須彌山派의 祖師이므로 그의 法孫들도 나중에 九山門이 宗名을갖게될 때 高麗國 曹溪宗 須彌山下 아무개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坦然도 그의 法師(慧炤)를 따라 宗脉과 系派로 따진다면 臨濟의 9代孫63) 上同, 卷 26,〈永明延壽禪師傳〉(上同, p. 22 上).
“高麗國王覽師言敎 遣使…… 彼國僧三十六人親承印記 前後歸本國 各化一方.”
64) 註 45)와 同(《金石總覽》上, p.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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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지만 高麗國 禪僧으로서의 현재 위치로는 분명히 曹溪宗 闍崛山下斷俗寺大鑑 坦然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도 高麗초의 禪宗인 九山禪門이 曹溪라는 하나의 선명한 宗名을 가지게 됨으로써각자의 宗脉이나 系派에 상관없이 모두가 曹溪宗人이 되며, 따라서 高麗의山門禪派 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엽 이후로 내려오면서 坦然의 경우처럼 각 山門 禪派는 九山禪門 形成과 曹溪宗의 展開 모두 曹溪라는 宗名속에 包容되어 曹溪를 祖로 하는 雲孫들임을 자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한 사실을드러내고 있는 현존의 사례 몇 가지를 실례로 들어볼 수가 있다.
曹溪山 修禪社 제1世祖가 되는 知訥(1158∼1210)의 碑에 보면, 그가8세에 曹溪雲孫 宗暉禪師에게로 가서 得度되었다65)고 있다. 그리고 또 그는 六祖壇經跋文에서,
우리들 雲孫이 祖師의 密傳을 직접 이어 받지는 못하였으나, 마땅히이와 같은 顯傳門의 誠實한 말씀을 의지하여 自心이 본래의 부처임을返照하여야 한다.66)
라고 하여,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參學禪侶들이 曹溪(六祖)의 雲孫임을 公言하고 있다. 또 知訥의 曾法孫이며 曹溪山 修禪社 제4世主가 되는 眞明國師 混元(1191∼1271)도 品(梵)日의 雲孫인 宗軒에게 得度되어 具足戒를 받았다고 있다.67)
그러한 사례들을 통하여 曹溪宗임을 그 碑에서 밝히고 있는 坦然은 물65) 〈曹溪山松廣寺 佛日普照國師碑銘〉(《金石總覽》 下, p.950).
“年甫八歲 投曹溪雲孫宗陣禪師祝髮受具戒.”
66) 〈六祖大師法壇經跋〉(光緒 9年刊《六祖法寶壇經》87張後葉 및《韓國佛敎全書》 4, p.739 下).
“我等雲孫 旣未親承密傳 當依如此顯傳門 誠實之語 返照自心本來是佛.”
67) 金坵 撰, 〈卧龍山慈雲寺 眞明國師碑銘〉(《金石總覽》 上, p.593).
“……品日雲孫禪師宗軒 披剃受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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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이고, 비록 宗名을 밝히고 있지 않은 曹溪山 修禪社의 開祖를 비롯한 권속들도 曹溪(六祖)의 雲孫(물론 品日의 雲孫도 거기에 포함됨)임을 천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九山門 중의 迦智山派에 속하면서도 牧牛子(知訥)를 遙嗣하였다는 一然(1206∼1289)도 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 寺住持 圓徑冲照大禪師 一然68)이라고 하고 있다. 말할 것도없이 知納(闍崛山 또는 曹溪山門)을 遙嗣하였거나 상관없이 원래의 迦智山門 禪侣이며 또한 高麗의 曹溪宗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할 것이다.
그리고 또 ー然碑의 銘文에는 다음과 같이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勝幡西振舌覆大千 唯是法輪密付單傳 竺乾列宿中夏五葉
世隔人回光光相接 曹溪一派東浸扶桑69)
즉, 如來의 깃발이 서쪽에서 떨치니 그 가르침이 三千大千世界를 뒤덮었으며, 오직 이 진리의 수레바퀴가 迦葉에게 전해져서 印度의 28祖師와 中國5祖師를 거쳐 代代相承해 왔는데, 曹溪 (中國 5祖師 중에서 맨 끝이며 西天 28祖 達摩를 中夏 初祖로 쳐서 제6祖인 慧能)의 한 파가 동쪽으로 흘러서 高麗에 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曹溪의 한 파가 바로 高麗의曹溪宗임을 알 수가 있고, 이 曹溪宗은 曹溪 六祖의 禪에 의해 이루어진하나의 宗派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曹溪 후에 생겨난 宗脉 系派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같이 曹溪를 祖로 삼아 曹溪의 宗을 형성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에 의하여 曹溪宗의 宗體는 九山門의 성격과 전혀68) 《三國遺事》卷 5 初頭에 撰者로서 明記되어 있다.
그의 碑文에는 “高麗國義興花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 (《金石總覽》上, p.469)라고 있다.
69) 上同 碑의 銘(《金石總覽》上,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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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九山門이 曹溪를 祖로 삼았던 그 傳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다를 것이 없다고 하겠으나, 曹溪(業)라는 宗名으로 九山門이 派的 개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종전과 다르다고 할 수있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九山門이 曹溪라는 宗(業)名을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九山 모두가 曹溪를 祖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와 같은宗名을 붙이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무래도 앞에서 본 것처럼 僧科(특히九山 參學徒의 僧選)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僧科를 치르자면 九山으로 흩어져 있는 山門형태로는 어려울 것이므로 기존 敎宗系의華嚴業이나 瑜伽業들처럼 하나의 종파(業)형태를 형성시킬 필요가 있었을것이다.
그리고 大覺國師 義天이 天台敎觀을 開講할 때 九山門의 學行이 높은禪侶들을 모아서 크게 敎觀을 闡揚함으로써 九山門 禪師들이 天台宗 쪽으로 많이 옮아간 것으로 보이고 있다.70) 그로 인해 九山禪門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니,71) 그러한 旣存 禪門의 弱化를 만회하기 위하여서도하나의 종파(曹溪業)로서의 결속이 필요했으리라고 볼 수가 있다. 실은 九山門 禪侶들이 비로소 僧科에 응시하게 된 것은 이미 앞에서 본 바대로宣宗 元年(1084)의 일이지만, 義天이 國淸寺에서 天台敎觀을 開講하고(肅宗 2年-1097) 天台宗 大選을 행한 때(肅宗 6年·1101)까지는 어쩌면 曹溪業이라는 하나의 宗名으로 완전한 정착을 하지 못하였던 것 같기도 하며,
70) 〈國清寺妙應大禪師墓誌〉(上同, pp.558∼559).
“師諱敎雄…………禪師翼宗爲師 會大覺國師肇立台宗 募集達摩九山門高行釋流方且弘揚敎觀 開ー佛乘最上法門 宗禪師樂聞其敎遂就學焉 師亦隨之……乾統元年 國家始關台宗大選……而師褒然爲擧首答 在上上品.”
《金石總覽》에는 乾統九年이라 있으나 元年의 誤植임.
71) 〈雲門寺圓應國師碑銘〉(《金石總覽》上, p.349).
“大覺國師西游於宋 傳華嚴義兼學天台敎觀 以哲宗元祐元年丙寅歸 尊崇智者別立宗家 于時叢 林衲子傾屬台宗者十六七 師(圓應國師 學一)哀祖道凋落 介然孤立以身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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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九山 門 禪侶들의 自派內 僧選應試熱도 매우 不振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여겨진다.
義天이 國淸寺에서 達摩九山門의 學德과 修行이 높은 禪侶들을 募集하여 天台敎觀을 크게 천양하였다는 것에서 九山門이 당시에 이미 曹溪라는業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한 종파로서의 정착을 확고하게하지 못한듯한 인상을 풍겨준다고 하겠다. 또 그때 九山門(雙峯寺)에서 禪師였던 스승 翼宗을 따라 國淸寺로 가서 天台敎觀을 受講하였던 敎雄(1076∼1142)이 처음으로 시행된 天台大選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가 기왕에 소속되어 있었던 山門 및 그 僧選의 不振을 엿볼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僧科에 합격하여 승진하는 法階가 敎宗系는 그 上位가首座·僧統이며 禪宗系는 禪師와 大禪師인데, 天台宗의 法階가 禪宗과 같으므로 九山門이 凡稱的 禪宗을 宗名으로 삼는 편보다는 曹溪宗을 택하는것이 훨씬 선명하다고 할 수가 있다. 어쨌든 天台宗 開立이라는 사실이 종래의 九山門으로 하여금 曹溪宗으로 정착되게 하는데 적지 않은 작용이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상에서 본 曹溪宗名 定着의 綠由를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수 가 있지 않을까 싶다.
첫째, 曹溪를 祖로 하는 하나의 종파(曹溪派)이기 때문이다.
둘째, 九山門 參學僧徒도 僧科에 應試하게 됨으로써 宗(業)의 형성이필연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義天이 처음 天台 敎觀을 開講할 때 九山門의 禪侶(高行釋流)들이 대거 天台宗으로 옮아가고 天台宗大選에 應試하는 등 九山禪門의 弱勢와 不振을 초래하게 되었으므로, 宗勢의 强化와 禪門의 結束을 위해서도宗名(曹溪)정착이 필요했을 것이다.
네째, 僧科 中格후의 禪僧法階가 敎宗系의 首座·僧統에 配對되는 것이禪師·大禪師인데, 天台宗僧도 禪宗系의 法階 그대로를 받았으므로 中國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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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처럼 (九山)禪門을 凡稱的 禪宗이라 하지 않고 曹溪宗이라 함으로써天台宗과의 확연한 구분을 짓고자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Ⅲ. 曹溪山 修禪社와 後期의 曹溪宗界
지금까지 앞 장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曹溪를 祖로 하는 禪門이 高麗에들어와서 아홉 산을 중심으로 하여 자리를 잡고 각기 그 門風을 相承振作시켰었다. 그러다가 九山門禪侶들도 敎宗系의 다른 業(종파)들처럼 僧科에참여하게 되고, 이어서 禪宗法階를 같이 하게 된 天台宗이 開立되는 때를전후해서 曹溪라는 業(宗)名이 보이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天台宗이 開立되면서 九山門의 高行釋流가 많이 天台敎觀을 受講하고 그리로 옮아갔기(叢林衲子 傾屬台宗者 十六七) 때문에 祖道가 凋落했음인지, 그로부터 曹溪의 祖門에 훌륭한 禪德의 배출이 미미하고 그宗勢가 상당히 떨치지 못한듯한 인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때에 曹溪山修禪社를 중심으로 하여 침체된 祖道를 다시 일으켜 宗風을 중흥시킨 大禪德이 출현하였으니, 그가 바로 佛日普照國師 知訥이다.
이 장에서는 먼저 知訥의 曹溪山 修禪社를 중심으로 하는 曹溪宗의 중흥과 그 계승을 보고, 다음에 國亡에 이르기까지의 宗內 사정과 修禪社 外的인 흐름을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1. 曹溪山의 修禪中興
大覺國師 義天 당시 天台宗이 처음 세워질 때 叢林(禪門)의 衲子(禪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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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열에 예닐곱은 天台宗으로 옮아갔기 때문에 祖道의 凋落을 개탄하고홀로 祖門을 몸으로 버틴 禪德이 있었는데, 그가 곧 圓應國師 學ー(1052
∼1144)이었다.
肅宗 4년(1099)에 義天이 弘圓寺에서 圓覺會를 마련하고 學ー을 副講師로 삼았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曹溪의 禪門을 지켰던 그는 생을마칠 때까지 後學을 일깨우고 禪悅과 布施에 힘썼다.72)
學ー과 비슷한 시대에 禪門을 대표하는 인물로 慧炤(照)國師가 있었으나 앞에서 본 바 외에는 자세한 행적을 알 수가 없고, 그 문하에 坦然(1069∼1158)과 之印(1102∼1158)같은 禪德이 배출되었다. 坦然 역시그 스승 慧炤와 함께 앞의 闍崛山門 조에서 간략하게 본 바가 있으므로여기에서는 생략한다.
之印은 睿宗의 王子로 일찍이 출가하여 大禪師의 位階에 오르고 毅宗으로부터 廣智라는 法號를 받았다. 또한 국왕이 榮寵을 베풀고자 하였으나그는 항상 山寺에 머물기를 좋아하였으며, 禪修 외에도 敎觀에 해박하고詩文에도 능하였다고 한다.73)
그 뒤 얼마동안 禪門의 인물을 찾기가 어려운 형편인 때에 明宗과 神宗代 에 걸쳐 禪師 . *禪師가 되고 康宗 때에 王師가 된 바 있는 靜覺國師志謙 (1145∼1229)이 보이고 있다. 志謙은 禪會에 자주 主盟이 되기도하였고 그 門下에 제자도 적지 않았으며, 《宗門圓相集》이 란 撰書도 남겨놓았다.74)
그와 같이 몇몇 禪德들이 배출되었으나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을 때 知訥이 출현하여 曹溪宗勢를 크게 떨치게 하였다.
自號가 牧牛子인 知訥(1158∼1210)은 8세에 출가하여 曹溪雲孫 宗暉72) 註 71)과 同.
73) 〈智勒寺廣智大禪師墓誌銘〉(《金石總覽》上, pp.377∼379).
74) 〈華蔵寺靜覺國師碑銘〉(《東國李相國集》및《金石總覽》) 上, pp.576∼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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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得度되었다. 明宗 12년(1182) 25세에 僧選에 합격하였으나 南遊하여 昌平 淸源寺에 머물렀으며, 여기에서《六祖壇經》을 읽고 自得한 바가있었다. 그 3년 뒤에 下柯山 普門寺에서 大藏經을 열람하다가 唐 李通玄의 華嚴論을 보게 되어 그로부터 마음을 圓頓觀門에 두었다. 때마침 舊友得才가 八公山 居 祖寺에 초청하였으므로 그 곳으로 가서 定慧社를 결성하고 諸業의 高士를 널리 맞아들여 習定 均慧(定慧雙修)의 精進을 함께하였다. 그러나 居祖寺는 道場이 좁아 많은 學衆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제자 守愚를 江南으로 보내어 安禪處를 찾게 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이옮아가게 된 곳이 順天 松廣山 吉祥寺였다.
知訥은 神宗 원년(1198)에 居祖寺를 떠나 松廣山으로 가는 도중에 智異山의 上無住庵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內觀을 專精하고 外綠을 끊어 더욱 心源을 밝혔다. 그러다가《大慧語錄》의 語句(禪不在靜處 亦不在閑處 不在日用應緣處 不在思量分別處…)에서 문득 크게 깨달은 바가있었다. 그가 松廣山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大衆을 거느리게 된 것은 神宗 3년(1200)의 일이었다.
松廣山 吉祥寺를 曹溪山 定慧社로 고쳤으나 이웃에 定慧寺가 이미 있었으므로 修禪社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입적할 때까지 11년 동안을 祖道를 선양하고 淸衆을 일깨웠으므로, 俗人士庶로서 修禪社에 入社한 이가수 백 명에 이르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金剛經》을 持誦하도록 권하였으며, 法을 세우고 義를 말할 때에는《六祖壇經》을 典據하였고, 또李通玄의 華嚴論과《大慧語錄》을 補助참고로 삼았다.
知訥은 曹溪山 修禪社(熙宗이 즉위하여 山·社名을 고치게 하고 親書題搒 했다 함)를 근본 道場으로 하여 宗旨를 크게 發揚하다가 熙宗 6년(1210)에 53세(法臘 36)로 입적하였다.75) 그가 남긴 著述에는, 《定慧結75) 金君綬 撰,〈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東文選》 卷 117,《金石總覽》下, pp.949∼952). 註 49), 〈修禪社重創記〉및 覺岸 撰, 《東師列傳》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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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文》·《誠初心學人文》·《修心訣》·《眞心直說》·《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念佛要門》·《華嚴論節要》·《法集別行錄節要并入私記》등이있다.
또 그의 碑文에 의하면 그는 평소에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徑截門의3
門76)을 열어서 接化하였는데, 이 3門에 의해 수행하여 信入하는 이가 많았으므로 禪學의 盛함이 예나 근래에 비할 데가 없었다(…依而修行信入者多焉禪 學之盛近古莫比)는 것이다. 그에게는 慧諶·正宣·守愚·冲湛·湛靈·廓照·夢船·端諶·仁敏·正誠·解空·可休·覺純 등의 많은 제자가 있어서, 修禪 定慧의 牧牛子家風을 크게 떨치므로써 曹溪宗門의 침체 不振을 씻을 수가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知訥이 차지하는 위치는 韓國佛敎史 위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高麗 曹溪宗에 있어서는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본다.77)
① 佛日普照國師 知訥의 뒤를 이어 修禪社의 제2世主가 된 이는 眞覺國師 慧諶(1178∼1234) 이다.
그의 自號는 無衣子인데, 출가 전에 일찍이 司馬試에 올라 太學館에 들어갔으며, 홀어머니의 看病을 위해 歸鄕하여 侍病하면서 觀佛三昧에 들었을 정도로 佛心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 어머니의 별세 후에 출가하였다. 그때 마침 知訥이 曹溪山 修禪社를 開創하여 道化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그리로 가서 得度되고 또 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 修禪 精究하여 知訥의 法76) 李鍾益, 《韓國佛敎の研究-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國書刊行會, 1980)
pp.110∼111 등에는, 이 三門에 ‘無心合道門’과 ‘念佛三昧門’을 첨가하고 있다.
77) 林錫珍,〈普照國師研究〉(《佛敎》101∼103, 1942∼1943).
林錫珍, 《乘禪宗曹溪山 松廣寺訪》 普照國師條(松廣寺, 1965) pp.57∼77.
金仍石,〈佛日普照國師〉(《佛敎學報》2, 東國大學校 佛敎文化研究所,
1964).
李鍾益,〈普照國師의 禪敎觀〉(《佛敎學報》9, 1973).
李鍾益, 《韓國佛敎の研究-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國書刊行會, 1980)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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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었으며 스승이 그 修禪社의 法主를 맡기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그는智異山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뜻을 어길 수가 없어서 曹溪山 修禪社의 제2世主가 되어 스승의 뒤를 이었다.
慧諶에게는《禪門拈頌》30卷·《禪門綱要》1卷·語錄 및 詩集 각 2卷의撰述이 있었으며, 夢如·眞訓·覺雲·麻谷 등의 제자가 배출되었다.78)
② 慧諶의 뒤를 이어 修禪社 제3世主가 된 이는 淸眞國師 夢如(?∼1252)이다. 碑文이 湮滅되어 그의 자세한 행적을 알 수가 없다.
夢如의 法을 이은 제자 眞明國師 混元(1191∼1271)이 修禪社 제4世가되었다. 混元은 어려서 출가하여 梵日의 雲孫 宗軒에게 得度되고 受具한뒤, 雙峯寺의 辯靑牛를 찾아 道를 묻고, 曹溪山의 慧諶에게로 가서 許認을받아 그 제자 夢如를 師事하여 法印을 얻었다.
高宗 32년(1245)에 禪源社의 落成法會에 主盟이 되었다가 그 이듬해그 곳에 가서 精錬의 衲子 200명을 거느리고 開堂하였으며, 그 뒤 다시曹溪山에 머물면서 修禪社의 法主가 되었다.79)
③ 修禪社 제5世 圓悟國師 天英(1215∼1286)은 15세에 출가하여 曹溪山 제2世 慧諶에게 得度되었다. 그 뒤 禪選 上上科에 합격하고 南遊하다가 다시 曹溪山으로 가서 夢如에게 더욱 慧解를 밝혔으며, 混元을 師事하여 法要를 깨치고 나중에 禪源社 法主가 되었고, 오래지 않아 曹溪山 제5
世가 되었다.80)
④ 曹溪山 제6世가 되는 圓鑑國師 冲止(1226∼1282)는 처음 法名이法桓이었고, 自號가 宓庵老人이었다. 출가 전 일찍이 登科하고 官職을 얻78) 李奎報 撰, 〈曹溪山第二世 修禪社主 眞覺國師碑銘〉(《東國李相國集》下 및《金石總覽》 上, pp. 460∼464). 《東師列傳》1 등.
79) 金坵 撰,〈卧龍山慈雲寺 眞明國師碑銘〉(《東文選》卷 117 및 《金石總覽》上, pp.593∼595).
80) 李益培 撰, 〈曹溪山修禪社第五世 慈眞圓悟國師碑〉(《金石總覽》上, pp.59
5∼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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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日本에 使節로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29세 때 禪源社로 가서 法主 天英에게 得度되어 受具하였다. 그로부터 講肄를 歷恭하다가 金海 甘露社에머물렀고, 뒤에 曹溪山으로 돌아가 스승 天英을 이어 修禪社 제6世主가되었다. 나중에 元으로 가서 元帝의 尊信을 받고 돌아왔는데 , 그는《圓鑑集》·《圓鑑國師語録》·《宓庵和尙雜著》등의 저술을 남겼다.81)
冲止에게는 靜眼·眞寂·神悅 등 제자가 많았던 모양이나 자세한 것을 알수가 없고, 修禪社도 제7世 慈靜國師·제8世 慈覺國師·제9世 湛堂國師가뒤를 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碑文이 湮滅되어 그 幀額과 塔題에 의거하여諡號와 代數만을 알 뿐이다.
⑤ 후대에 내려오면서 知訥의 法統을 이어 曹溪山의 家風을 크게 떨친이들이 적지 않았으나 그 傳記들이 湮滅되어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있는이는 제10世 萬恒과 제13世 復丘라고 할 수가 있다.
慧鑑國師 萬恒(1249∼1319)은 일찍이 曹溪山 제5世 天英에게 得度된뒤 金剛山과 智異山 등에서 苦修練行하다가, 忠烈王에 의해 三藏社와 朗月·雲興·禪源 등社에 歷住하며 道化를 폈다. 제자가 700여 명에 이르고士大夫로서 그 아래 入社하는 이가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忠宣王은 別傳宗主重續祖 燈妙用尊者라는 法號를 가하였다.82)
⑥ 제13世라 하여 修禪社主의 代數는 상당히 늦지만 覺眞國師(覺嚴尊者) 復丘(1270∼1355) 또한 10세에 출가하여, 曹溪山 제5世天英에게 得度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天英의 입적 후 大禪師 道英을 師事하였으며, 白巖寺에서 同志와 10여 년을 參究하고 나중에 修禪社主로 曹溪山에 머물며20여년 宗風을 宣揚하다가 다시 白巖 및 佛岬寺로 옮겨 갔으며 , 몇 차례에 걸쳐 轉藏法會를 베푸는 등 參禪과 講經으로 道化를 펴다가 淨土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禪源社의 白華와 迦智山의 麻谷 등 뛰어난81) 金曛 撰, 〈曹溪山修禪社第六世圓鑑國師碑銘〉(《金石總覽》下, pp.1035∼1036 및 《圓鑑集》 附錄)
82) 李齊賢 撰, 〈海東曹溪山修禪社第十世 慧經國師碑銘〉(《東文選》 卷 118,
《益齋亂稿》및 《金石總覽》上, pp.6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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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를 비롯하여 元珪·衍昷 등 천여 명이 있어서, 普照 知訥의 法風을 이었다고 한다.83)
⑦ 제11世 慈圓國師와 제12世 慧覺國師를 그 諡號만 알 수 있듯이 修禪肚 제14世 淨慧國師와 제15世 弘眞國師도 碑文의 湮滅로 전혀 그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그로 미루어 高麗末에 修禪社의 전통은 제15代에까지존속되다가 거기에서 거의 단절되다시피 衰運을 맞이한 듯하다. 그 증거로는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 제15世를 계승한 제16세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松廣寺에 제16
世祖師로 모셔져 있는 高峯 法藏(1350∼1428)은 제15世 弘眞國師의 제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아예 曹溪山 계통의 禪侶가 아니다. 또한 法藏은高麗의 修禪社 時代에는 그 곳에 가본 일도 없으니, 그는 朝鮮 太祖 4년(1395)에 우연히 그 곳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퇴락해진 寺宇를 重新하고 머문 일이 있었다. 그 때는 분명히 朝鮮時代였고 그 절도 修禪社가 아닌 松廣寺로 불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高麗王朝가 어지러운 末期에는 修禪社라 하지 않고 松廣寺라 하였으며, 또한 曹溪山 출신이 아닌 他山門 출신이 住持로 임명되어 왔었다는 점이다. 즉 修禪社와 法系가 전연 다른 懒翁 惠勤·幻庵 混修·慧庵 尙聰·釋宏 등이 松廣寺 住持를 역임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84)
그러므로 제15世까지 相承하며 牧牛子(知訥) 家風의 本山이었던 曹溪山修禪社는, 더 계승할 힘을 잃고 社名까지도 松廣寺로 바뀌어지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修禪社 開設 후의 宗內動向
83) 李達衷 撰, 〈王師大曹溪宗師者 覺儼眞尊者 覺眞國師碑銘〉《東文選》 118
및 《金石總覽》 上, pp.659∼661).
84) 앞의 高峯 法蔵을 포함하여 釋宏 등의 松廣寺 住職에 관해서는 前掲《松廣寺誌》에 자세히 전해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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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訥의 修禪社 家風은 自派內의 相承만으로 그쳤던 것이 아니고 다른山門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禪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침체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 결과로 다른 山派의 禪者들이 그의 修禪社 마당을 거쳐가고, 심지어는 그의 死後에 그 法을 遙嗣하는 사례까지도 있게 되었다. 또한 후대에훌륭한 禪匠들이 出世하여 高麗 末의 禪界를 매우 다채롭고 장엄하게 하였다.
그러한 현상을 前後 兩期로 나눈다면 앞 쪽의 대표적인 사례로 承逈과一然을 들 수가 있고, 뒷쪽의 대표적 禪匠으로는 景閑·普愚·惠勤 등을 들수가 있을 것이다.
1) 修禪社 밖의 宗風振作
知訥이 曹溪禪을 중흥시킴으로 인하여 修禪社 외의 禪門에서도 뛰어난禪德들이 배출되었는데, 曦陽山門 출신인 承逈도 그 중의 하나이다.
① 圓眞國師 承逈(1171∼1221)은 일찍이 출가하여 曦陽山 鳳巖寺 洞純에게 得度되었다. 그 뒤 여러 곳으로 遊山하다가 曹溪山 修禪社로 가서 知訥에게 法要를 물었으며, 다시 五臺山으로 갔다가 文殊眞身의 冥感을 얻고淸平山으로 가서 居士 李資玄(1061∼1125)의 遺蹟을 통해 느낀바 있어《楞嚴經》을 閱讀하고 크게 깨쳤다. 이로부터 發願하여 法敎를 펼칠 때에는 楞嚴으로써 그 머리로 삼았으며, 高宗 때에 크게 禪旨를 펴고 大禪師가되었다.85)
承逈이 曦陽山人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본 바가 있지만, 그는 그 출신으로는 曦陽山 계통이면서도 知訥의 修禪家風을 배웠고, 또 淸平居士 李資玄의 소위 楞嚴禪을 遠嗣 계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承逈의 제자 중에 大禪師 鏡智가 있었는데, 그는 일찍이 承逈에게서 得85) 〈寶镜寺住持大禪師圓《國師碑銘〉(《金石總覽》上, pp.44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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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되어 曦陽山門에 籍을 두었었다. 나중에 曹溪山 제4세 混元(眞明國師)
을 恭敬 尊重하여 제자의 禮로 師事하였으므로, 朝廷의 認許를 받아 闍崛山門으로 籍을 옮겼다. 그리하여 그는 圓眞國飾 承逈의 제자 자리를 떠나眞明國師 混元의 제자가 되면서, 曦陽山門이 아닌 闍崛山門의 祖師 品(梵)
日의 雲孫이 되어 斷俗寺(당시 崛山門系의 寺刹)에 머물렀다고 한다.86)
鏡智에 관한 행적을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混元의 碑를 통한 그와 같은 사실을 보게 됨으로써, 그 스승 承逈은 修禪社 제1祖 知訥의 가르침을직접 받았고, 제자인 鏡智는 修禪社 제4世 混元의 제자로 들어가 山門의籍까지도 옮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承逈은 일시적으로 法要를 묻고 修禪社를 떠났지만, 鏡智는 移籍까지 하면서 混元(修禪社 제4世主)의 門人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曹溪山 제4世 混元 당시에도曹溪山의 門衆이 品日雲孫 즉 闍崛山門에 속해(籍을 두고) 있었음을 알수가 있게 된다고 하겠다.
② 이상의 경우와는 달리 知訥이나 또는 修禪社의 法主에게로 가서 직접 師事하거나 受學하지도 않고, 知訥의 死後에 그의 法을 遙嗣한 禪德이있다. 그가 곧《三國遺事》의 撰者인 普覺國師 ー然이다.
ー然(1206∼1289)은 처음 法名이 見明이었고 字는 晦然이며, 自號를睦庵이라고 하였다. 그는 일찍이 陳田寺(迦智山門系) 大雄에게 得度되고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뒤 두루 禪林을 찾고 僧選에 합격한 다음에는 包山寶幢庵으로 가서 禪觀을 닦았다. 그 후 여러 寺庵으로 옮아 머물다가 高宗46년(1259)에 大禪師가 되고 元宗 2년(1261)에 王命으로 京師에 가서禪月社에 머물며 開堂하였는데, 이 때 知訥의 法을(死後이므로) 멀리 이었다(遙嗣牧牛 和尙)고 한다.
그 뒤 吾魚社에 머물다가 仁弘社의 法主가 되어 크게 重興하고는 社名86) 前揭 〈慈雲寺 眞明國師碑〉(《金石總覽》 上, p.594).
“大禪師鏡智 小投陽山圓眞國師祝髮 敬重於師(混元) 事以門人之禮 因受 旨 移箱於崛山爲 品日孫 住斷俗寺…….”
《金石總覽》에서는 鏡智가 鐘智로 誤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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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仁興으로 고쳤으며, 包山 東麓의 涌泉寺를 重新하여 佛日社로 하였다.
忠烈王 때 雲門寺와 廣明寺에서 玄風을 떨쳐 王의 尊信을 받다가 同王9
년(1283)에 國師(元의 國師를 피해 國尊이라 했음)가 되고 圓徑冲照라는尊號를 받았으나, 老母를 모시기 위해 舊山으로 내려갔다가 麟角寺에 들어가 九山門의 都會를 다시 열어 叢林의 흥성함을 近古에 드물게 하였다. 그는《語錄》2卷 《偈頌雜著》3卷·《重編曹洞五位》2卷·《祖圖》2卷·《大藏須知錄》3卷·《諸乘法數》7卷·《祖庭事苑》30卷·《禪門拈頌事苑》30卷 등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87)
이상의 저술들은 그의 碑(普覺國師碑)에 擧目되어 있는 것만을 옮긴 것인데, 여기에서도 ‘백여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百餘卷行于世)라고 있기때문에 위의 8種 외에도 더 저술이 있을 듯한 암시를 받기는 하지만, 실은 거기에 民族文化의 寶書인《三國遺事》(5卷)가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三國遺事》를 포함해서 그의 알려진 저술이 9種 84권 (《佛國寺事蹟》제외)이 되는 셈인데, 대단히 많은 저술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현존자료를 통해 보여지고 있는 高麗 전체 (禪·敎)의 高僧들 중에서 가장 많은저술을 남긴 편에 속하며 특히 우리 佛敎史에 있어서 韓國禪師(新羅末에서 朝鮮末까지)로서는 제일 많은 분량의 저술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一然의 행적을 보면 그가 중흥시켰거나 새로 창설한 社가 碑文에 나타나 있는 것만도 네 군데(定林社·禪月社·仁興社·佛日社)가 된다. 高麗代의 社는 共同修行結社를 뜻하는 말인데, 그러한 修行結社가 설치되어있는 寺庵들은 그 절 이름에 社를 붙여 쓰는 것이 거의 통례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ー然이 修禪의 지도와 선양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으며, 그 밖에도 雲海寺 大藏落成會(禪敎名德 百명을 모은 자리)의主盟과 雲門寺에서 玄風을 大聞한 것 및 麟角寺에서의 九山門 都會 등을통한 그의 禪門振作 활동이 매우 컸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87) 閔漬 撰, 〈高麗國義興花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 (《金石總覽》上, pp. 469∼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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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末期의 曹溪宗界
高麗 후기로 내려오면서 훌륭한 禪德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景閑과 普愚와 惠勤을 대표적인 禪匠으로 꼽을 만하다.
① 景閑(1290∼1374)은 호가 白雲이며, 어려서 출가하여 배움에 힘썼던 것으로는 보이고 있으나 그 出家寺와 師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어느 해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中國으로 들어가 忠定王 3년(1351) 5
월에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 가서 臨濟 제18代인 石屋 淸珙을 만나 그 法을 얻었다.
그리고 또한 指空(印度僧으로 元에 와 있었음)을 찾아가 法을 묻기도하였다. 귀국한 뒤 海州 神光寺의 住持로도 있었고, 또 恭愍王 19년(1370)에는 工夫 選의 試官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國內에서의 法系는 전혀 알 수가 없으나 臨濟禪의 淸珙을 이었고또 印度 108代 祖師( 天 百八代祖) 指空의 영향을 입어서인지 주로 無心無念을 究竟으로 삼는 禪風을 보여 주었다.88) 그는 淸珙으로부터 臨濟禪을 이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臨濟宗人이 아니고 高麗의 曹溪宗 禪師였다는 것은, 그의 語錄 序에서 牧隱 李穡(1328∼1396)이 “高麗 曹溪大禪師景閑 號白雲”이 라 시작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그에게는 현재《白雲和尙語錄》(2卷)과《佛祖直指心體要節》(2卷)의 두 가지 저술만이전해져 있어서 자세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그의 語錄을 통하여 그 自得의 境地와 禪의 세계를 엿볼 수가 있으며, 또한 거기에 太古·懶翁 등 당대 禪門의 大家들과 그 門徒들의 이름이 등장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그가 당시 佛敎界에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를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② 圓證國師 普愚(1301∼1382)는 호가 太古이며, 13세에 출가하여 槍巖寺의 廣智에게 得度되었다. 그 뒤 여러 叢林을 찾고 19세에 萬法歸ー의88) 《白雲和尚語錄》(卷頭에 李穡과 李玖의 序가 있음) 宣光 戊午(高麗 禑王 4
年·1378) 川寧 鷲岩寺板. 현재《韓國佛敎全書》 제6册에 收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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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頭를 參究하였으며, 城西의 甘露寺에 머물면서 疑團을 풀었다. 37세 때松都의 栴檀園에서 無字를 參究하고 이듬해 활연히 크게 깨쳤으며, 忠惠復位 2년(1341)에 三角山 重興寺에 머물러 雲集하는 學者를 提接하고 그절 동쪽에 太古庵을 지어 살며〈太古庵歌〉한 편을 지었다.
忠穆王 2년(1346)에 元으로 가서 燕京의 大觀寺에 머물다가 湖州 霞霧山 石屋 淸珙을 찾아가서 印可를 얻었다. 그 뒤 元帝의 청으로 永寧寺에서開堂說法하여 道化를 펴다가, 忠穆王 4년에 귀국하여 廣州 小雪山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그 때 恭愍王의 간청으로 山을 나와 說法하매 王室 및 士庶가 많이 귀의하였으며, 王師가 되어 廣明寺에 머물다가 辭任이 허락되지않아 밤을 타서 몰래 小雪山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鳳巖寺와 寶林寺의 住持를 역임하고 또 法住寺에 있었으며, 辛旽이 伏誅된 뒤 國師가 되어 塋原寺에 있었고, 또 陽山寺로 옮겼다. 禑王이 國師로 再封하였는데 小雪山으로 가서 입적하였다.
普愚(虛)의 法語와 詩文을 모은《太古集》(2卷)이 전해져 있으며, 그의門下에는 正辯智雄尊者 普覺國師混修(1320∼1392)·妙辯智圓應尊者 智鑑國師 粲英(1328∼1390)·內願堂妙嚴尊者 祖異·內願堂國一都大禪師元珪 등당대의 쟁쟁한 禪匠을 망라한 천 수백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89)
諡號 圓證보다도 太古國師로 많이 알려져 있는 普愚는 景閑과 같이 中國의 石屋으로부터 臨濟禪을 전해온 것으로 되어있다. 景閑이 指空과 인연이 있은 것에 비해 普愚는 石屋으로부터 臨濟正脉을 순수하게 이은 때문인지, 또는 그 門下에 훌륭한 제자가 많이 배출되고 또 자신이 王師 國師를 역임하였었기 때문인지, 후대(朝鮮中期 이후)에 와서 太古를 海東初祖또는 東方 第一祖로 推尊하고 있다.90)
89) 維昌 撰,〈高麗國國師大曹溪嗣祖 摩訶悉多羅利雄尊者謚圓證 行狀〉(《太古集》附錄).
李穡 撰,〈高麗國國師 利雄尊者圓證塔碑銘〉《太古集》 附錄 및 《金石總覽》上, pp.525∼529).
90) 彥機 撰,〈清虛堂行狀〉(《清虛堂集》卷 4 附錄 및 《鞭羊堂集》卷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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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太古 普愚를 언급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九山 통합의 문제이다. 흔히 普愚가 九山을 統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으나91) 실은 그가九山을 통합한 적이 없고 또한 그 후에도 엄연히 九山이란 말이 보이고있다. 아마도 太古의 行狀에 九山을 一門으로 통합해야 할 것과 漢陽(지금서울)으로 遷都할 것을 건의한 것이 있는데 이 부분의 해석을 잘못한 데에서 생긴 착오로 볼 수가 있다.
그 부분을 略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本京是三陽之地 禪爲一本 配陽之德 而九爲三陽數故 以九祖之道 可以裨之 ……而九老陽 一爲初陽 老而衰也理之常 而又立都之時 九山之來旣久 不如反其初 爲新陽之 爲愈也 此數之變也 當是時也 若統爲一門…… 王氣在此都 以復古初全盛之時 難矣哉 若南遷漢陽 行向所陳之言自然化孚六合 澤被萬靈矣 玄陵曰 大哉言乎 ‘勅戒左右從而行之 不幸譣詖間作 師之志未滿 唯緇林鬱鬱耳.92)
原文의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 이유는 高麗 曹溪宗의 展開變遷에 있어서 九山의 통합문제가 그만큼 비중이 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실제 高麗 王朝 末期에 와서 太古 普愚에 의해 九山門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면 이는 참으로 우리 佛敎 宗派史에 있어서 大書特筆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摘出해 본 것처럼 ‘開京의 三陽之地에 九山이 裨補(可以裨之)가되지만 九는 老陽이고 一은 新陽이라 이미 老衰한 九(老陽)를 버리기 위“……吾東方太古和尚 人中國…….”
采永 撰,《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
“海東正脉第一祖 太古普愚和尚.”
亘璇, 《太古庵歌科釋》.
“海東初祖高麗國師太古和尚.” 등.
91) 權相老,〈韓國禪宗略史〉(《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張元圭,〈曹溪宗의 成立과 發展에 對한 考察〉(《佛敎學報》 1, 1963) 등.
92) 李穡 撰, 〈檜巖寺 西天提納薄陁尊者浮屠銘〉(《金石總背》下, pp. 1283∼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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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九山을 一門으로 통합해야 하며, 그래서 新陽之地인 漢陽으로 南遷하는것이 國家 興盛에 이롭다’는 뜻의 九山統合論이므로 宗派統合史的 意義는전혀 결여된 듯하며, 또한 ‘恭愍王은 그 건의를 따르도록 했으나 論該間作으로 太古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緇林(禪侶들)만이 울울할 따름이라’
고 하여 그 와해된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③ 禪覺王師 惠勤(1320∼1376)은 舊名이 元慧이고 호는 懒翁이며 居室은 江月軒이다. 20세에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功德山 妙寂庵의 了然에게로 가서 출가하였다. 여러 곳을 다니다가 楊州 檜巖寺에 머물러 4년을 精修하고 開悟하였다. 忠穆王 3년(1347)에 元으로가서 燕京의 法源寺에 있던 指空을 만났다.
指空(提納薄陀尊者)은 印度 마가다國의 王子로 출가하여 迦葉으로부터百八傳의 法을 얻었다해서 그를 西天 108代 祖師라고 한다. 그는 당시 中國에 와 있었는데, 앞서 忠肅王代에 高麗를 다녀간 일이 있는 高僧이다.93)
惠勤은 指空에게서 法을 얻었으며, 또 淨慈寺로 가서 당시 石屋 淸珙과함께 臨濟 18代孫인 平山 處林을 만났다. 그 뒤 明州의 補陀洛迦山에 觀音을 참례하고 育王寺와 務州 伏龍山 등에서 高德禪匠을 만났으며, 다시燕京으로 가서 元帝의 청으로 廣濟寺에 머물러 開堂 說法하여 크게 道化를 떨쳤다. 다시 法源寺에 가서 指空의 付嘱을 받고, 恭愍王 7년(1358)에귀국하였다.
遼陽·平壤·東海 등에서 說法하다가 臺山 象頭庵에 들어가 있었는데, 恭愍王 10년에 王의 청으로 王城에 가서 心要를 설하였으며, 王의 간청으로海州 神光寺에 있게 되었는데 紅巾賊의 侵寇로 모두 피란을 갔으나 그는혼자 남아 있었다. 그 뒤 여러 곳으로 다니다가 廣明寺와 檜巖寺에 머물렀93) 覺宏錄, 〈普濟尊者禪覺懶翁和尚行狀〉(《懶翁集》).
李穡 撰,〈槍巖寺禪覺王師碑〉(《金石總覽》上, pp.498∼502).
李穡 撰, 〈神勒寺普濟舍利石鍾記〉(上同, pp.514∼518).
李穡 撰, 〈妙香山安心寺石鍾之碑〉(上同, pp.519∼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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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王師가 되어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法號를 받고,
松廣寺에 住持하다가 다시 檜巖寺로 갔다. 거기에서 法을 펴니 四民이 廢業하기에 이를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朝廷에서는 멀리 密陽 瑩源寺로 옮겨가게 하였으므로, 그리로 가는 도중에 驪州 神勒寺에서 病을얻어 며칠을 머물다가 그는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에게는 語錄(《懶翁和尙語錄》)과 歌頌(《懶翁和尚歌頌》·《普濟尊者三種歌》)이 남겨져 있으며, 門下에 國師 混修(普愚의 제자이기도 함) 國一大禪師 日昇·自超·釋希·智淵 등 많은 제자가 있었다.94)
거의 같은 시대에 高麗末의 曹溪宗勢를 크게 떨치게 하였던 3大家 중에서 惠勤이 가장 年下였지만, 당시 또는 후대의 佛敎界에 끼친 바는 누구보다도 그 영향이 컸었다고 할 수가 있다. 山林에서 修释 提接하는 것이 禪家의 전통인데도, 그는 說法으로 帝王士庶를 일깨웠고 특히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士女)들이 구름처럼 그의 法會에 모여들었다는 것이니,95) 惠勤의禪風은 禪思想史的인 측면에서도 再考察되어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그가 얼마나 후대 佛敎界(禪界뿐 아니라)에 영향이컸었던가 하는 것은 그를 釋迦佛의 後身으로 經說化되기까지 하였으며,96)
오늘의 佛敎 儀禮集에도 三和尚請의 중심 證明法師로 들어있다는 사실97)
94) “懶翁設文殊會于楊州檜巖寺 中外士女無貴賤 賫布帛果餌施與 恐不及寺門嗔咽憲府遺吏禁斥 婦女 都堂又令閉關尙不能禁.”(《高麗史》 卷 133, 列博 46 辛禑 2年 4月條).
“京外四衆 雲臻輻湊 莫知其數.”(前揭 覺宏撰 行狀).
“懶翁住檜巖寺 士女奔波 有儒生三人相謂曰 彼髡有何幻術 而使人驚駿如此……”(成俔 撰, 《傭齋叢話》卷 6) 등.
95) 《祖源通錄撮要》卷 4, 王師普濟尊者 惠勤(《佛致學報》 21, 附錄 p.228).
‘‘幟盛光明經云 世尊吿迦葉尊者曰 我滅度後後五百歲 吾法乃行新羅…… 庚申之間 有一比丘作 大沙門 作大佛事破諸外道 號曰普濟懶翁 其會曰工夫選 迦葉當知 我身是也.”
96) 安震湖 編, 《釋門儀範》下, pp.117∼118.
97) 《太宗實錄》 卷 3, 2年 4月 甲戌條.
“伏惟殿下 若以掃除佛氏之道爲難則 禪宗合爲曹溪 五敎合爲華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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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예로 들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맺 음
高麗時代의 佛敎宗派史에 있어서 그 비중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禪門九山 및 曹溪宗의 展開와 그 변천에 관해서 전반적으로 그 대충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서 唐으로부터 전해져 온 曹溪(慧能)의 禪이 여러 山門으로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혹은 뿌리를 내리고 혹은 그 흐름이 단절되기도하다가, 高麗代에 이르러 海東의 禪으로 그 형태를 정착시킨 것이 九山門이었었다. 그러므로 九山禪門은 高麗 초에 형성된 韓國的인 禪世界의 초기적 단계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한 九山門이 완전한 종파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 曹溪宗의 시대라고할 수가 있는데. 비록 曹溪라는 하나의 宗名을 갖기는 했어도 그 구성은엄연히 九山門이었다. 九山이라는 말은 高麗의 끝까지 쓰여졌고 또한 高麗禪門의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曹溪라는 宗名이 붙여지면서 九山은하나의 종파에 소속된 門派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다.
曹溪라는 하나의 종파형태를 갖게 되면서 각 山門들은 현저한 침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그러한 침체기에 禪門 중흥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이 曹溪山 修禪社의 開設이었다. 비 록 九山이라는 명칭이 말기에까지 이어지긴 하였으나 서너 山門을 제외하고는 그 이름조차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旣存山門은 弱化되어 있었다. 그러한 때에 曹溪山 修禪社의새로운 출범 은 曹溪宗 전체에 중흥의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고할 수가 있다.
그 결과 高麗 후기에는 많은 禪匠들이 배출되어 禪門에 一大壯觀을 이루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斥佛策이 시작된 朝鮮朝의 太宗 초에, ‘‘禪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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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쳐서 曹溪宗(하나의 宗)으로 하고 敎宗을 합쳐서 華嚴宗으로 해야한다”98)고 할 정도였으며, 宗名을 모두 박탈당한 廢佛의 시대에도 朝鮮廢佛期의 中興祖라 할 수 있는 西山大師 休靜(1520∼1604)과 그 제자 惟政(1544∼1610)이 曹溪宗人임을 자처99)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연구지원비에 의해 이루어졌음.)
98) 《禪家龜鑑》(松廣寺開刊本)初頭에 “曹溪退隱述 이라 있고, 그 跋文 끝에 “曹溪宗遺 四溟 隱峰惟政· ”이라 있다.
99) 각주 번호 중복 확인 9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