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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대화

후박나무 (허정) 2022. 9. 13. 08:59

 

비폭력대화

 

 

어제 백장암 공양간 앞에 나무그늘에서 주지스님과 불자들이 차를 마시는 곳에 합석하게되었다. 주지스님은 절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차를 내어주는데 그곳에 지나가던 나그네가 잠깐 들린 것이다. 차를 마시다가 문득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보살님이 비폭력대화 강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 분에게 비폭력 대화에 대해서 대충 듣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대화를 할수록 더 친근하게 만드는 대화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비폭력대화를  배우면 배울수록 비폭력 대화는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적극 동의했다. 부처님은 대화의 달인이라서 대화의 기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짱끼의 경(M95)에서는 “만약 사람이 믿음이 생긴다면  ‘이와 같이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절제있는 대화를 강조하셨다. 내가 소개한 부처님 말씀에 대중들은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차담이 끝나고 내방에 와서 비폭력대화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보게 되었다. 비폭력대화(NVC)는 마셜 로젠버그 박사에 의해 고안되었다. NVCNonviolent Communication의 약자로 비폭력대화로 번역된다. 때로는 연민의 대화(Compassionate Communication)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할 때도 종종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비폭력대화는 다른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잘 맺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말하기와 듣기방법이며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비폭력대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방법을 재구성하도록 이끌어준다. 현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객관적인 관찰을 하지 못해서  자기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적인 느낌으로 착각하여 분노하고 짜증내는 일이 많다.비폭력대화는 관찰-느낌-욕구-부탁의 순서로 진행된다. 폭략적인 대화를 하는 이를 '자칼'로 비폭력대화를 하는 이를 '기린'으로 비유하고 자신의 언어가 느낌인지, 판단인지, 평가인지를 잘 파악하라고 주문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객관적인 느낌을 말하지 않고 평가와 욕구를 말해버린 다는 것이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내가 오해를 받고 있다고 느껴진다."는 말들은  느낌이 아니라 내가 나를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평소에 느낌과 생각을 자주 혼동하여 갈등을 자초한다. 

 

 

부처님은 진리를 수호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비폭력대화와 상통한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사람이 믿음이 생긴다면  ‘이와 같이 나는 믿는다.’라고 말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바라드와자여, 만약 사람이 만족하게 된다면, ‘이와 같이 나는 만족한다.’라고 말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규정하지 않아야 하며 만약 사람이 전승을 받아들인다면, ‘이와 같이 나는 전승한다.’라고 말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아야하며 만약 사람이 견해를 이해한다면, ‘이와 같이 나는 견해를 이해한다.’라고 말하고,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이 진리를 수호하는 것입니다.”(M95)라고 말한다. 자신의 믿음이나 견해가 있어도 나의 믿음이다. 나의 견해다.라고 말하는것에 그쳐야지 여러사람들에게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가치판단까지 나아가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해서 진리는 수호되지만 그 진리를 깨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가 탐욕에 기초한 반응, 성냄에 기초한 반응, 어리석음에 기초한 반응에 대하여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탐욕의 상태에 있으면서 탐욕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이 사람이 성냄의 상태에 있으면서 성냄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고 어리석음의 상태에 있으면서 어리석음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관찰하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사람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가 탐욕에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며 성냄에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며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라면 그와 대화하고 그와 사귈수록 배움은 커질거라고 설명한다.

 

불교의 비폭력 대화는 이러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언어생활을 잘 하는 것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언어는 단독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대사십경(M117)에서 바른언어를 사용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바른 견해와 바른 정진과 바른 알아차림을 들고 있다. 이것은 다리가 세개 달린 솥과 같이 하나만 없어도 쓰러지게 되어 있다. 

"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언어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고, 중상모략하는 것을 삼가고, 욕설하는 것을 삼가고, 잡담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바른 언어이다그릇된 언어를 버리고 바른 언어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의 바른 정진이다. 그는 잘 알아차려 그릇된 언어를 버리고, 바른 언어를 하며 머문다. 이것이 그의 바른 알아차림이다. 이처럼 이 세 가지 법이 '바른 언어'를 따르고 에워싸나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이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는 언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진 견해와 알아차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가 하는 언어가 관찰인지, 사실인지,생각인지,진단인지,판단인지, 차근차근 관찰하며 이해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수행이 필요하다. 불교는 이러한 언어 생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바른 삶(팔정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에 바탕이 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즉 세가지 번뇌를 열가지 족쇄로 확대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청정도론에서 설명하듯이 탐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 성내는 기질을 가진 사람, 어리석움의 기질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이 무엇을 보거나 들을때도 각각의 특질이 드러난다.

“탐하는 기질을 가진 자는 형상이 조금만 마음에 들어도 그것을 보고선 놀랍다는 듯이 오랫동안 쳐다본다. 사소한 덕이라도 집착하고 큰 허물이라도 헤아리지 않는다. 떠날 때에도 떠나기 싫은 듯이 아쉬워하면서 떠난다. 성내는 기질을 가진 자는 형상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하찮은 허물도 지적하고 큰 덕도 헤아리지 않는다. 떠날 때에도 떠나고 싶은 것처럼 하고 털끝만큼도 아쉬워함이 없이 떠난다. 어리석은 기질을 자긴 자는 어떤 형상이던지 그것을 보고선 남들이 하는 대로 한다. 남들이 비난하는 것을 들으면 자기도 비난하고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 칭찬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무관심하다. 이 방법은 소리를 듣는 것 등에서도 적용된다.”

 

볼 때만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걸을 때도 그 특질이 드러난다.

"탐하는 기질을 가진자는 자연스런 걸음걸이로 갈 때 신중하게 가고 천천히 발을 내려놓고 반듯이 발을 내려놓으며 반듯이 들어올리고 그의 발자국은 만곡이 있어 중앙이 땅에 닿지 않는다. 성내는 기질을 가진 자는 발끝으로 땅을 파듯 걷는다. 급히 발을 내려놓고 급히 들어올린다. 그의 발자국은 질질 끌려져있다. 어리석은 기질을 가진 자는 혼란스런 걸음걸이로 걷는다. 당혹한 사람처럼 발을 내려놓고 당혹한 사람처럼 발을 들어올린다. 그의 발자국은 급하게 눌러져있다.“

 

비폭력대화의 시작은 불교수행에서 아주 중요하게 설명되는 사띠(sati)수행이다. 호흡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은 나를 과거나 미래로 헤메이지 않게 한다. 부처님은 이 사념처수행은 근심과 탄식과 비탄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하시며 많이 닦을 수록 엉청난 이익이 있다고 강조하셨다. 비폭력 대화는 이 관찰을 특별히 일상의 언어생활에 적용한 것이다. 언어생활은 인간의 삶에서 대부분을 차지 할 정도로 중요하다. 일상의 대화가 파멸과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긍정과 수용과 이해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자신의 상태를 관찰을 하고나서 느낌과 생각을 구분하고 그것에 대해 적절히 반응하는 비폭력대화는 사실 특별한 방법이라기 보다는 수행자와 불자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이다. 언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십선법에서 언어에 대한 조항이 4개로 가장 많은 것에서도 드러난다.그런데 불자들은 이러한 언어를 대화에 적용하지 못하고 다만 법당에서 妄語衆罪今日懺悔(망어중죄금일참회), 綺語衆罪今日懺悔(기어중죄금일참회), 兩舌衆罪今日懺悔(양설중죄금일참회), 惡口衆罪今日懺悔(악구중죄금일참회)라고 염불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거짓말, 아첨, 이간질, 욕설을 하지 말라고만 했지 왜 그런 말을 하게되며 그런 말을 하게되는 이유를 추적하고 반복되지 않도록하는 훈련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관찰-느낌-욕구-부탁의 순서로 진행되는 비폭력대화는 불자들이 정어를 새로운 방법으로 익히고 훈련하는 방법이다. 비폭력대화를 보면서 팔정도를 현시대에 맞게 풀어내는 숙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인 승가도 이것을 배워서 현대적인 포교방법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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