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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교회’를 읽고
후박나무 (허정)
2021. 12. 9. 21:19
‘내가 꿈꾸는 교회’를 읽고
개심사에 손원영교수님이 찾아와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지가 한 달은 되어간다. 그때 손수 사인을 해서 건네주신 ‘내가 꿈꾸는 교회’를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강남순교수의 ‘질문 빈곤 사회’를 읽고 ‘괜찮은 크리스챤’이라는 독후감을 쓴 적이 있기에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책을 보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책을 다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아, 이렇게 훌륭한 책을 왜 일찍 읽지 않았지?”라는 자책을 했다. 이 책은 ‘질문 빈곤 사회’가 가진 포용성과 긴장감을 갖추고 있을뿐더러 현장에서 느낀 절망과 희망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독교계에 손원영교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이다.
손원영교수는 2016년 김천 개운사 법당의 불상이 개신교인에 의해 처참히 파괴된 사건에 개신교 신자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복구비용모금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파면되었다. 그후로 복직을 위한 1인시위와 소송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 뉴스에서 이 사건을 보았을 때 “아직 개신교에도 양심있는 사람이 있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페이스북에서 친구가 되어 가끔씩 올라오는 교수님의 글을 보고 지냈었는데 개심사 근처가 고향인 교수님이 개심사를 찾아 왔던 것이다.
교수님이 꿈꾸는 세상은 불교적으로 보면 대승보살의 염원이기도하다는 생각이든다. 그만큼 저자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폭 넓다. 여름 안거(安倨) 겨울안거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거나 무소유, 사성제, 육바라밀등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불교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를 찾아 떠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오는 심우도를 보면서 교회가 참 자아를 찾은 심우소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아마 이러한 불교에 대한 이해와 자비심이 바탕이 되어 불상훼손 사건에 대해 대신 사과하고 모금운동까지 나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성경공부와 같이 중요시 생각하며 죽어서 천국에 가는 내세 지향적 종교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는 불이(不二)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는 삶은 소유에 집착하는 삶이기에 지금 여기에 순간순간 충실한 것이야말로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의 사상과 너무나 닮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오랜 도반이 들려주는 이야기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실제로 그는 가나안교회를 운영하면서 일방적인 설교를 하는 대신에 교우들이 함께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묵상하고, 소감을 나누는 방식의 '공동체적 설교'를 실천하고 있다. 나도 서산 천장사 일요법회를 운영할 때 “듣는 불교에서 말하는 불교로”라는 표어를 앞에 내걸고 다같이 경전을 읽고 소감나누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법회를 한 적이 있다. 선방에 스님들을 돌아가며 일요법회 법사로 초청하여 스님들과 불자들이 소통하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법회가 끝나면 근처의 사찰을 찾아가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갖었다. 가나안 교회의 공동체적인 설교방식과 나의 일요법회 운영방식이 비슷한 한 것 같아서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저자가 고등학교 때 어느 전도사가 "우리 조상들 모두 예수를 안 믿어서 지옥에 갔다.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가족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라는 발언이 참말인지 아니면 거짓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는 고백이나 찬송가중에서 "어여뻐도 못 가요 하나님나라,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나라“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는 이야기에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나도 그런 이유들로 교회를 멀리 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수따니빠따를 인용하며 불교의 무소유는 개인의 무소유로 해석하고 교회는 '공동체적 무소유'로 인식하는 점이다. 사실 승가공동체의 무소유야말로 사찰과 종단이 시설이나 건물에 대한 소유권은 없지만 승가의 구성원이면 누구나 사용권은 있는 그런 '공동체적 무소유'다. 요즘 나는 이러한 승가의 운영전통이 파괴되어 사찰이 돈 버는 사업장이 되어가는 것에 분노하여 비판하는 글을 쓰고 있다. 우리민족이 오천년 동안 믿어온 하나님인 ‘환웅’을 성서의 '야훼'와 같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불교가 고통에 대한 통찰이 깊지만 모두 개인 차원의 고통이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대속적 고난이 더 수승하다는 인식도 아쉽다. 그렇치만 이러한 차이가 있으므로 각자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다름은 자연스럽다.
"종교가 쇠락한 것은, 밖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종교 자체가 터무니없고 흐리멍덩하고 억지스럽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이 신조로 대체되고 사랑이 습관으로 대체될 때, 과거의 영광 때문에 오늘의 위기가 무시될 때, 신앙이 살아 솟구치는 샘[泉]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물이 될 때, 종교가 동정(同情)의 목소리 대신 권위의 이름으로만 말을 할 때, 그 메시지는 무의미한 헛소리가 되고 만다."라는 인용문은 기독교계나 불교계나 다 같이 들어야 할 뜨끔한 충고다. 교회나 사찰이 편안하고 소통하고 배려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각자가 서있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스님들과 불자님들도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카일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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