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에게 시는
‘파꽃’처럼 밀어낸 생(生)의 물밀듯한 집중
박 성 현
안도현 시인은 국회에서 박근혜의 탄핵안이 가결된 2016년 12월 9일, 트위터에 “자랑스러운 국민이 박근혜를 이겼다. 박근혜의 직무는 정지되었다. 이제 나는 시를 쓰고 또 쓸 것이다.”라는 짧고 강렬한 문장을 남긴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지 무려 4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물고기가 스스로 아가미를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데, 그는 왜 ‘금시령’(禁詩令)을 내리면서까지 시대의 암흑을 온몸으로 받아냈던 것일까. 부활한 유신, 그 야만과 비열, 공포를 끌어내리고자 그는 스스로를 거대한 공백으로 만들고자 한 것일까. 침묵으로 항거하는, 절실하고 사무쳐서 더욱 맹렬할 뿐인 오체투지로서!
그가 시 쓰기를 꾹, 꾹 눌러 돌려세웠던 그 긴 절명의 시간 동안 한반도의 언어들은 정처를 두지 못했다. 유신의 망령들이 또 다시 국가를 농락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막았을 때도 우리의 말은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짐작할 뿐이지만, 그는 매순간 갈기갈기 찢기는 마음들을 붙잡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모질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흔들리는 옥수수 그림자를 경작하는 사람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파종의 힘」)는 ‘파종의 힘’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4년 만의 신작에도 시인의 내적 갈등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차오르고 있다 켜진다 따돌린다 떼쓰고 만지고 / 다짐받고 투항하고 촐랑대는데 싸르륵거린다 내린다 / 망해도 좋아, 날 좀 내버려둬, 작렬하고 있다 모여든다 / 흩어진다 뿌린다 두드러진다 더듬거린다 쿨럭이다가 / 다물어진다 수런댄다 미끌어지고 있다 갈망한다(「뒤척인다」). 그러므로 그의 절필은 “이 세상 밖에서 아프다, 아프다 하지 마라”(「몽유도원도」)라고 외쳤던, 오로지 세상 ‘안’에서의 울음이었다.
광장에 촛불이 타올랐다. 광장만이 아니라 한반도 구석구석까지 촛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저 지독한 광기를 도려냈다.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방법과 가치를 새롭게 썼다. 그 힘으로, 시인은 다시 시를 쓴다. ‘쓰고 또 쓸 것’이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시가 숭숭 박힌 검은 맨발로 말이다.
나는 안도현 시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금시령’에서 유신의 부활과 완전한 몰락이라는 시대적 상징과 기막힌 알레고리를 읽는다. 결국 그의 ‘금시령’은 부활한 유신의 거대한 공백이었으며, 새로운 국가를 갈망하는 국민의 염원을 집약시킨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가 끝도 없이 추구했던 방법적 사랑의 하나라고 믿는다.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 이 세상에 태어나서 /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 이 세상 전체를 /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안도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이, 그는 단 한 사람(그에게 ‘한 사람’이란 국민이다)을 위해서라도 이 세상 전체를 받아들이는 지독한 ‘사랑’을 실천했던 것.
*
안도현 시인에게 시는 일상의 경이(驚異)다. 1985년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상재한 이래, 그는 일상의 문턱을 떠나지 않았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 명징함과 모호함의 경계쯤에 시를 두고 싶었”(‘시인의 말’, 북항)다는 내적 갈등을 겪어야 했지만 그의 문장은 오히려 그 일상을 더욱 파고든다. 그는 “나는 다만 꽃의 내부에서 자지러지던 향기와 햇볕이 약탈해간 물기를 생각해보지만 내가 쓰는 몇 줄의 손수레 같고 가설 점포 같은 시가 바로 노점 같은 것”(「노점(露店)」)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에게 시는 “풀벌레 소리만 듣고도 그 풀벌레가 경작하는 풀잎을 그려”(「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내고, “짝새가 날아가는 공중의 높이만큼 날개 아래 파닥거리는, 사무치게 떨리는 귀한 것”(「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이다. 너무 흔해 아무런 감각도 불러들이지 않는 것들이 그 마음들의 바탕이며, 시인은 이 감각의 익명성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에게 ‘세계’란 언제든지 시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 생생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과도 같다. 이를테면, 그는 “꽃게가 간장 속에 /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 어찌할 수 없어서 /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 한때의 어스름을 /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스며드는 것」)면서 개체의 죽음을 공동체적 죽음으로 확장하거나,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북항」)라면서 사소한 이름들에 묻은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한다.
뿐만 아니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일기」)라고 일갈하면서, 지나쳐버릴 뿐인 일상 곳곳에 결속된 숭고과 비밀스러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유일무이한 언어로 건축하며, 또한 시를 가장 ‘시-답게’ 직조하면서도 결코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가장 명징한 모국어이자 우리를 일깨우는 서정의 치명적인 희열이다.
거의 모든 시에서 그는 ‘웃음’을 표현하되 ‘울음’과 ‘통곡’을 잊지 않으며, 밤이 낮으로 스며드는 상실과 우울에서도 아득히 먼 별빛을 이끌어낸다. 비유하자면 그의 시는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그 안에서 옛날이 지금을 만나 새로운 별자리를 형성하는 어떤 것”(벤야민)이다. 성좌처럼 엮어져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개별적이고 고유한 의미를 새겨 넣는 난장(亂場)—누가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안도현, 「사랑」)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의 시를 모국어가 표현해내는 가장 날카로운 서정이자 형이상학적 도취로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인의 문장들은 우리의 온몸을 휘감아 돌며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퍼서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 「그릇」 전문
시인 스스로가 ‘금시령’의 빗장을 풀지 않으면서, 4년 동안 30년 넘게 쓰던 (시작) 메모도 닫아버리고 죽어라 읽었던 시도 게을리 했어도 그는 결코 불안해하지 않았다.*이를 증명하듯 그는 위 시에서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여기서 백년이 족히 넘었을 ‘사기그릇’이란 그가 평생을 품어왔고 또한 누대로 전하고 싶은 ‘시’의 상징임은 명백하다.
그런데 그 ‘그릇’이 심상치 않다. “국을 퍼서 밥상에 올릴 수도 없”을 만큼 뭔가가 달라진 것이다. 물론 백년의 시간을 건너와 애초의 가치가 사뭇 달라진 게 그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아무래도 그릇은 그릇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뭔가에 사로잡힌 듯 그 너머에 골몰한다. 그는 한참을 살펴보다 그릇의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는 것이다. 멀어서 백년이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만 시인은 드문드문 이가 빠지고 뭉툭해진 ‘둘레’가 그릇의 아가미처럼 느껴진다. 호흡과 맥박도 가깝고 그것이 살아온 삶의 각각도 손에 닿을 듯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 그릇은 나를 얻었다”는 문장은, 따라서 대상을 투영하는 시인 고유의 감각적 ‘특이(特異)’면서도 사유의 ‘밀도’다. 동시에 시인에게 덮친 저 불가해한 지난 4년을 털어내고 다시 시를 쓰고자 하는 ‘의지’가 아닐까.
시인이 그릇의 ‘둘레’에 내포된 의미를 생각하면 할수록 시 쓰기의 욕망이 점점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그가 ‘둘레’에 입술을 대는 순간, 은밀하게 봉해진 그것의 내력이 한꺼번에 시인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둘레란 그릇의 ‘형상’을 만드는 자리이고, 또한 ‘깊이’와 ‘관능’을 생산해내는 세계와의 유일한 접촉/결합이다. ‘그릇’을 지탱하는 ‘강도’(剛度)로 꽉 차 있고, 바깥과 안을 구분하며 항상 ‘그릇’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시인도 마찬가지. 그는 ‘둘레’를 내면화하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시 쓰기가 어디를 지향하는지를 확인한다.
다시 시인은 백년을 건너온 ‘그릇’ 앞에 앉아 있다. 누빈 외투처럼 멀고 고요하다. “백년 넘게 물을 건너느라 발목이 시큰거린다”(「물 건너는 자작나무」)는 ‘자작나무’처럼 그것은 속으로 웅크려들며 달그락거린다. 그는 손끝으로 투명한 소리를 내다가, 그 소리의 여울에 이끌려 입술을 대어본다. 온기는 없고 대신 빗금이 까칠하다. ‘둘레’에도 백년을 견뎌온 치명적인 상처들이 가득한 것이다. 평생 가족을 짊어지고 산 아버지의 기울어진 어깨처럼 온갖 것들이 할퀴고 간 ‘빗금’ 말이다. 과연 빗금이 없는 둘레 혹은 그릇이 있을까, 생각하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그릇은 충분할 것이다. 생활이란 오히려 얇고 가난한 빗금을 만드는 일이다. 그는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는 ‘자잘한 빗금들이’ 마치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릇으로, 둘레로 스민 먼 울음들의 시간, 그것은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어서, 시인은 ‘둘레’에 남겨진 ‘빗금’을 완강하게 껴안았던 것이다.
*
누구나 다 공감하겠지만, 안도현의 시에는 저녁 무렵의 밥 짓는 냄새가 난다. 골목골목으로 퍼진 멀고 그리운 냄새들이 문장마다 스며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는 누이가 부는 작은 휘파람이나 시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가벼운 발자국, 혹은 문간에 버려졌지만 여전히 온기를 품은 연탄재와 같다. “젖은 길과 마른 지붕, / 우는 말과 울지 않는 바퀴, / 쓰러지는 나무와 일어서는 눈보라, / 취하는 술과 취하지 않는 비탈, / 납작한 빵과 두꺼운 가난”(「술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다.
그는 일상의 친화력과 질긴 생명력을 믿으며, 그것의 매혹과 꿈, 가능성을 되살려낸다. 그는 끊임없이 걷고 바라보고 냄새 맡고 생각한다. 버려진 풀꽃조차 그에게는 빛나는 삶이다.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삶을 축적한 거대한 도서관이자, 결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뿐인 ‘시간’이다. 언어가 되기를 기다리는 무수한 일상의 사물들이 그의 행간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가 “이 세상 가장 서러운 곳에 별똥별 씨앗을 밀어올리느라 다리가 퉁퉁 부은 어머니, // 마당 안에 극지가 아홉 평 있으므로 // 아, 파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그냥 혼자 사무치자 // 먼 기차 대가리야, 흰 나비 한 마리도 들이받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파꽃」)고 노래할 때마다 느닷없이 고요와 침묵이 찾아온다. 파꽃이 밀어내는 생(生)의 물밀듯한 집중 같은.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 「공양」 전문
‘공양’이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먼저 살피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감정이입’이나 ‘공감’과는 달리 스스로를 하나씩 지우면서 타자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다. ‘나는 타자다’라는 랭보의 말처럼 ‘공양’은 공동체가 견지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의 하나다. 지난 4년의 마음을 헤아려볼 때, 시인이 자선 대표시로 이 시를 내놓은 까닭도 ‘공양’이 우리에게 주는 가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을 공양한답시고 우리에게 내놓는다. 먹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은 또 어떤가. 단비에 젖어 촉촉하겠지만 그것도 두꺼운 서류철과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는 무척 먼 일이다. 꽃잎을 밀어올리기 이틀 전에 백도라지 줄기가 흔들리는 미동(微動)도 우리가 느끼기에는 요원할 뿐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과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도 꿋꿋하게 내놓는다. 마음이 무너져 여유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시인이 내미는 공양들은 멀고 쓸쓸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인의 공양은 (세속의)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더 큰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시인은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을 얻기 위해 잠시 세상의 다른 소리들을 닫는다. 그때 귀는 활짝 열리고 고막을 찢을 듯한 붕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싸리꽃을 흔드는, 마치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스르는 연어들처럼 삶을 깨우는 거대한 ‘날갯짓소리’가 나는 것이다. 여간 해서 맡기 힘든 “칡꽃 향기 육십 평”이나 현미경으로도 잡기 힘든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도 마찬가지. 짙은 안개에 내던져진 인간의 감각을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익명화된 육체의 오감을 닫아야 한다.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매미가 울기 시작할 때,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깬 것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을 낮춰 건져낸 ‘공양’은 그가 평생을 바쳐 집중한 삶에 대한 통찰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망령들에게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고, 치욕을 완전히 걷어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이다. 우리는 이미 그 언어의 마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당신과 늘 함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