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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이해에도 차원이 있다…경전 부정 심각하다

후박나무 (허정) 2015. 9. 10. 21:25
깨달음과 이해에도 차원이 있다…경전 부정 심각하다

 

허정스님, 현응스님의 글에 반박
승인 2015.09.09  (수)  22:08:23
불교포커스  |  budgate@hanmail.net
  
불교포커스 자료사진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사진>이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에 대해 반론을 8일 천장사 카페(cafe.daum.net/amjaesa)에 올렸다.
허정스님은 이 글에서 “현응스님의 의견대로라면 니까야의 절반 이상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 것”, "경전 자체를 부정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마땅히 다양한 사상과 계율전통이 부딪치고 튕겨지며 갑론을박의 치열한 논쟁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하는데도 우리 불교계는 너무 조용하다”면서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문제제기를 발판삼아 치열한 토론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앞서 현응스님은 4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기조발제자로 나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를 주제로 발표했으며,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 깨달음은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는 주장을 폈다. 편집자

 

 

 

다음은 허정스님의 ‘깨달음과 이해에도 차원이 있다-현응스님의 글을 읽고’ 전문.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9월 4일 열린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주제발표를 하였다. 인터넷 기사로 접하다가 뒤늦게 올라온 전문을 읽어보니 기사에서 보던 것과 분위기가 다르게 다가왔다.(그래서 소감문을 다시 쓴다)

그동안 현응스님은 조용한 불교계에 묵직한 충고를 던져왔다. 2011년 ‘한국불교 중흥의 길을 향하여’라는 글에서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명칭의 적합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될 때가 되었다며 조계종명을 바꿔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으며, 2014년 ‘조계종단의 미래와 과제’라는 글에서 조계종단의 현실은 ‘무소유 공동체’냐, ‘사유화 각자도생’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분기점에 놓여 있으며 손을 놓고 있으면 5년 이내에도 종단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이번에 발표한 글에서도 수십 년 이상 참선 수행하는데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고, 깨달음의 내용보다는 깨닫는 방법론에만 관심을 두는 문제를 지적하여 불교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자비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실제로 한국불교에서는 깨달았다고 하는 선지식들에게서 보여지는 행동과 말이 기대에 못 미쳐서 스승 없이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경전을 읽고 도반끼리 토론하고 탁마하는 문화도 사라져서 서로가 답답해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깨달음=정견이라고 말하면서도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펼치다보니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보다는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되었다. 이해라는 용어로 깨달음을 표현하고 싶으면 깨달음과 이해에도 차원이 있다는 방식으로 표현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현응스님의 발제문을 살펴보고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마하박가에서 제자들이 초전법륜경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찬탄할 때 그들이 아라한과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보이듯~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찬탄은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들은 제자들(수다원)의 찬탄이다. 그래서 이들은 부처님 앞으로 출가를 요청하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오너라,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한다. 분명히 그들에게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초전법륜경을 듣고 5비구는 차례로 예류과를 얻고 다시 무아상경을 설하자 그들 모두는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과를 얻는 장면이 너무나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그들이 단지 며칠사이에 대화와 토론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이해하고 현대인들도 그들처럼 대화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그들의 깨달음이 일반적인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선 부처님 자신이 설법을 망설일 정도로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어렵다고 생각했다는 점, 이 세상에 깨달음의 내용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을 일부러 찾았다는 점, 이전에 자신의 스승이었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차선책으로 5비구를 선택하여 그 먼 길을 갔다는 점, 5비구는 이미 치열한 수행을 해오던 수행자들이었다는 점, 5비구가 처음에 초전법륜경을 듣고 예류과의 깨달음만을 얻었다는 점, 나중에 무아경을 설할 때 5비구가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점, 부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고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신다는 점,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누구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짧은 시간 안에 아라한이 된다는 일반화는 무리가 있다. 참고로 호진스님도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의 안냐(Añña)가 여러 한문 경전에서 知, 解, 了達등으로 번역되었음을 보고 이 때의 깨달음을 이해(解)로 보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은 체험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둘째, 사띠(念,憶念)를 “잘 기억하여 그 내용을 사유하는 일’이라는 것으로만 해석하면 수행을 설하는 경전에서 문맥에 맞게 해석되지 않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대념처경의 호흡관찰 설명에서와 같이 “그는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쉰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그는 기억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기억하면서 숨을 내쉰다.”라고 해석하면 문장이 어색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알아차림, 마음챙김의 뜻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직접 경전의 문맥을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셋째,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바다처럼 점점 깊어진다”고 점차적인 단계가 있음을 설명하였고, 수행체계도 견도 수도 무학도와 상응하는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으로 4성제를 설명하였다. 경전에서 깨달음과 정견은 다른 용어로 표현되고 다른 내용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정견의 종류, 깨달음의 종류도 단계별로 설명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성인4과와 삼매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후대에 편입된 것이라면 그와 관련된 신통, 족쇄, 37조도품등 많은 교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만 삼매라는 단어가 천 번 이상 나오고 앙굿따라 니까야에도 천 번 가까이 나온다. 현응스님의 의견대로라면 니까야의 절반 이상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번 발제문은 경전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경전 자체를 부정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 현응스님이 근거로 삼는 마하박가에도 처음부터 삼매에 들어 해탈의 즐거움을 음미하는 부처님의 모습이 묘사되고 범천의 권청, 야사 아버지가 야사를 볼 수 없도록 신통을 부리는 장면, 악마 빠삐만과의 대화, 가섭삼형제를 제도할 때 사용하신 신통들이 나타나고 있다.

넷째, 올바른 견해는 번뇌와 함께하는 정견(유루의 정견)과 번뇌가 없는 정견(무루의 정견)의 2가지가 있는데 현응스님이 말한 바른 견해는 무루의 정견에 가깝다. 무루의 견해는 오근과 오력의 구성요소 중에 하나인 지혜의 능력(慧根), 지혜의 힘(慧力) 그리고 칠각지의 하나인 탐구의 깨달음 고리(擇法覺支)와 같은 것들이다. 이 바른 견해는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바른 사유와 바른 마음챙김과 함께하며 바른 선정을 발생시키는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된다. 또한 경전에서 바른 견해는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된 결과 그리고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수행법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을 예류자로 설명하기도 하므로 무루의 바른 견해=예류자의 견해=견도라는 등식이 성립할 것이다. 이 예류자의 견해가 아라한의 견해와는 큰 차이가 있는데 예류자에게는 아직 감각적 욕망(kāmarāga), 적의(paṭigha), 색계에 대한 탐욕(rūparāga), 무색계에 대한 탐욕(arūparāga), 자만(慢, māna), 들뜸(掉擧,uddhacca), 무명(無明,avijjā)이라는 족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깨달음’이라고 말할 때 그 깨달음이 아라한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교리적으로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된다.

마지막으로, 현응스님은 자신의 주장을 펴면서 이것은 “학술적 이론적 규명이 아닌, 한국불교 현실을 개선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글을 쓴 것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교육원장이라는 신분으로 발표한 것이기에 불자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의 수행자들의 병폐는 전통적으로 대승경전과 선어록만을 배워왔고 화두 드는 법만을 배웠지 부처님의 생애와 부처님의 수행방식, 깨달음의 내용을 자세히 배우지 못해서 발생한 결과일 것이다. 지금은 초기경전을 불교공부의 근거로 삼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대승불교권 안에 오래도록 살다보니 초기경전을 보더라도 대승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사람이 많고 그 사람들 중에는 경전에 나온 신통력은 모두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믿는 분도 있고 ‘명색’을 모두 정신으로 봐야 한다는 분도 있으며 윤회를 인정치 않는 분들도 상당수가 있다. 워낙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시각의 경전들이 모든 들어와 있으니 각자 다른 주장을 펼쳐도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경전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다양한 사상과 계율전통이 부딪치고 튕겨지며 갑론을박의 치열한 논쟁이 들불처럼 일어나야 하는데도 우리 불교계는 너무 조용하다.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문제제기를 발판삼아 치열한 토론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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