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걸기

승가가 위의(威儀)를 잃지 않으려면 ……

후박나무 (허정) 2011. 7. 6. 13:00

 

정부 여당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문을 닫았던 조계종이 만 여섯 달 만에 문을 열고,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관계 단절이었지, 지난 여섯 달 동안에도 불교계의 약삭빠른(?) 인사들은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몰래 찾아온 그들을 만나 굵직굵직한 불사 청탁을 하거나 “관계 정상화가 되면 서로 돕자”는 약속을 하곤 했던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종단의 방침만 믿고 아무에게도 불사 부탁을 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다른 스님들은 이 와중에도 다 불사 부탁을 하고 정치권 인사와 친하게 어울리고 하더라. 나만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볼 멘 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과거 정권에 예속되어 질질 끌려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그래도 지난 여섯 달 동안 비교적 잘 참아 넘긴 셈입니다. 물론 멀지 않은 시기에 큰 선거를 두 차례나 치러야 하는 정치권의 입장 때문에 옛날에 비하여 일이 덜 어려워진 측면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치권에게 “아, 뜨거워! 잘못 건드렸군. 앞으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만은 분명해보이니 나름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관계를 끊었던 효과’를 거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난해 정치권에 대해 문을 닫고 열흘 만에 열린 조계종의 전국 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총무원장은 “그 동안 종단은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대규모 불사를 해왔고 이것이 오랜 관행이 돼 정부 지원을 많이 받는 것이 주지 소임을 잘 사는 것으로 비쳐져왔다”며 지난날의 행태를 반성하고, “1년 불사할 것을 10년 하고, 10년 할 것을 100년에 하겠다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하다”며 진정한 불교 자립을 위한 전 종도의 의식 전환을 촉구하였습니다.

아니 이것은 종도들에 대한 촉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총무원장 자신의 다짐이었습니다. 단위 사찰의 불사뿐 아니라 조계종 중앙 단위의 거대한 불사를 추진하면서 정부의 예산 지원에 기대면서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고 불교가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구나!” 싶어서 환영하고, 기대를 드러내기도 하였지요. 물론 한편에서는 “그 동안 여당의 하수인 노릇만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자주 자립이냐?”면서 비아냥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주류는 아니었고, ‘늘 있는 불만 세력’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여섯 달이 흘렀고, 정부 여당이 작은 성의를 보인다고 판단한 조계종에서는 지난 6월 7일 “정부 여당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담화문 발표를 두고도 “그래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비아냥대는 사람들에서부터 “적절한 때에 나온 최선의 조치”라며 적극 찬성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반응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산속에 살면서 도시 소식에 어두운 저도 뒤늦게 이 담화문 발표 소식을 들었고 그 중에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종교인으로서의 자세, 승가의 위의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 한 마디에 희망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승가가 위의(威儀)를 잃지 않고 의연하고 당당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 처할지라도 종단이나 불교계가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이 땅의 종교인들이 스스로의 위엄을 지키고 어떠한 외부 권력에 기대거나 그들을 악용하려 하지 않는다면, 종교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신뢰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국가도 편안하여 그야말로 ‘국태민안(國泰民安)’한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이 담화문 발표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끊을 수 없으니, 이 답답함을 어찌 해야 할지요. 관계 정상화 발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권 유력 인사를 통해 “선원을 새로 지어 달라, 일주문을 지어 달라. ……”며 떼를 쓰는 일이 한두 곳에서 벌어지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냉난방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선원 시설이 없어서 참선 수행이 어렵고 제대로 된 선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일주문이 없어서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늘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할 수 없을까요?

그런데 승가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일이 이쯤에서 멈춘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 제 답답한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어떤 때는 당장이라도 산을 뛰쳐나가 서울 한복판에 있는 조계종 총무원 청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라도 펼치고 싶어집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답답한지 속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요식을 앞두고 해인사를 떠나 서울로 가신 종정스님께서 정치권 인사 여럿을 만났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가야산 깊은 산속에 머무시며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시던 어른께서 서울 나들이를 하셨으니, 종단 인사뿐 아니라 정관계 인사를 비롯한 일반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어른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이 만남이 정치인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총무원과 사전 조율을 거치지도 않았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5월 10일은 아직 조계종이 정부 여당과의 관계 정상화를 선언하지 않은 상태였고 이 말은 곧 ‘정치권 인사와의 공식 접촉을 금하였던 종무지침'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총무원 실무자도 아니고 중진 승려도 아니며 조계종의 최고 어른인 종정스님이 종단 지침에 어긋나는 비공식적이고 비적절한 만남을 갖도록 주선한 인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적절한 예방을 주선한 자리에서는 “해인사의 고려 팔만대장경판이 손상될 가능성이 높아서 이를 대체할 동판대장경 제작 불사를 진행 중인데 이를 국가에서 지원해달라”는 말씀(?)이 ‘종정스님의 뜻’이라면서 전해졌다고 하더군요. 여간해서 뵙기 어려운 어른을, 그것도 조계종과의 관계 단절 상황에서 예방을 요청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초청을 받고 간 자리에서 종정께서 하신 말씀이니 정치인들로서야 반갑기 짝이 없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이었거든요.

누가 누구의 이익을 위하여 꾸민 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종정스님까지 이런 부탁을 하시게 하는 것이 승가의 위의를 잃는 일의 가장 뚜렷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만약 동판대장경 불사가 진정으로 불교계의 바람이고 종정스님의 확고한 뜻이라면,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그야말로 4부대중이 마음을 합쳐서 화합 불사를 추진해야 옳지 특정 인사가 개인적으로, 그것도 ‘종정스님의 뜻’을 빙자해 몰래 추진한다면 설사 국가 예산 지원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불교도와 일반 시민사회의 저항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종정스님의 뜻’인 줄로만 알고 순수한 마음에서 일을 도와준 정치권 인사들만 곤혹스런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종단에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종정스님의 위의를 잃게 하고 종단의 위상과 자부심을 땅바닥에까지 추락시킨 인사를 찾아내서 철저하게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무거운 징계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종정스님을 바르게 모실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슷한 사태에 대하여 종단 집행부가 아무런 제재를 취할 수 없고 그래서 승가의 위의가 계속해서 추락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발 어른들이 앞장서서, 아니면 어른의 뜻을 빙자해서 승가의 위의를 잃는 일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총무원에서도 “승가의 위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에만 그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승가 위의 실추’가 될 수 있는 사례들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만약 종단의 지침을 어기고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에는 어떤 처벌이 따르게 될지’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선언으로만 남게 되면 이것은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며, 말 잘 듣는 사람만 가만히 있다가 “나만 바보였잖아?”라면서 종단을 원망하고 약삭빠른 인사들은 “웃기지 말아!”라며 비웃는 일이 되풀이되고 말 것입니다.

때 이른 장맛비가 맹렬합니다.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계곡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 것만 같아 겁이 나기까지 합니다. 제발 너무 큰 피해를 안겨주지 않고 이 장마가 물러가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도 승가의 위의와 위엄을 잃는 일 없이 더욱 탄탄하게 발전하여 정토를 가꾸는 중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불기 2555년 7월 3일

지리산에서 澄潭 두 손 모음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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