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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뿟따 이야기

 

 

사리뿟따 이야기

Saariputta

The Marshal of the Dhamma

 

 냐나뽀니까 스님 지음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9092)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들어가는 말 …… 5

법을 찾아서 …… 7

   초년기 … 7

   숙세의 서원 … 19

   『본생경』에 나타난 사리뿟따 … 23

인간 사리뿟따 …… 28

   상수제자 … 28

   도움을 주는 이 … 36

   성냄이 없는 이 … 41

   친구와 친척들 … 48

   명상수행자 … 57

법륜을 굴리는 이 …… 64

   여러 가지 경 … 64

   아비담마 … 74

피안을 향하여 …… 77

   마지막 빚을 갚다 … 77

   쭌다경 … 88

   욱까첼라경 … 93

사리뿟따와 관련된 경 …… 95

덧붙이는 말: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사리에 관한 기록 … 108

주해

 

 

들어가는 말

  

스리랑카의 절에 가면 부처님상 양옆에 두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나한상은 한쪽 어깨에 가사를 걸친 편단 우견(偏袒右肩) 차림으로 두 손을 합장하고 공경하는 자세로 서있다. 그들의 발치에서는 신심 깊은 신도들이 바친 꽃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두 분 나한이 누구냐 하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Saariputta, 舍利弗,舍利子)와 마하목갈라나(Mahaa-Moggallaana, 目連 目건連)이다. 사리뿟따는 부처님 오른편에, 목갈라나는 왼편에 서있는데 그것은 바로 두 분이 생전에 차지했던 자리인 것이다.

19세기 중엽 산치 대탑이 발굴되었을 때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들어있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북쪽의 사리함에는 마하목갈라나의 사리가, 남쪽의 사리함에는 사리뿟따의 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역사가 2천년 이상 인간 삶의 무상한 드라마를 연출하며 흐르는 동안 그들은 그런 모습으로 함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이 일어났다 스러지고, 고대 그리스의 영화는 이미 아득한 추억으로 변한 지 오래고, 새로운 종교들이 세력을 다투면서 심지어는 검붉은 피와 불로 지구를 물들이다가 종국에는 테베나 바빌론의 전설이나 매한가지가 되고 말았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지도 못한 세대들이 태어났다 사라져 가는 동안 상업주의의 물결은 문명의 거대한 중심축을 서서히 동양으로부터 서양으로 옮겨놓고 말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에 아랑곳없이 성스러운 두 제자의 유골은 고스란히 보존되어왔고, 정작 그들을 낳아준 고향 땅에서는 잊혀졌지만 두 분에 대한 기억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파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소중히 간직되어 왔다. 그리고 두 분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에는 구전으로, 나중에는 그 어떤 종교의 성전보다 훨씬 방대하고 상세한 삼장(三藏)의 기록을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상좌부 불교국가에서는 이 두 분이 부처님 다음으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다. 불교 역사에서 부처님의 존함만큼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분들의 이름이다. 그들의 생애를 둘러싸고 그토록 많은 전설들이 생겨났다면, 이는 두 분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하다보니 세월과 더불어 자연스레 생겨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이분들이 그토록 높이 존경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부처님 직계 제자들만큼 스승을 지극히 섬기며 참된 길을 걸었던 예가 과연 다른 종교에도 있었던가. 이 책을 읽다 보면 여러분은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 지혜의 깊이나 넓이, 해탈의 교리를 가르치는 능력 등에서 수승하기가 부처님 다음이던 사문 사리뿟따의 이야기이다. 삼장에는 그분의 전 생애를 체계적으로 서술한 곳은 없다. 그러나 경전과 주석서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 그분에 관한 토막이야기들을 모아 볼 수 있으며 그 중에는 꽤 중요한 이야기들도 있다. 그분의 삶은 부처님의 생애나 교화사업과 매우 밀접하게 맞물려 있어서 때로는 보조자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몇몇 대목에서는 그분이 교사이자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서, 친근하고 사려 깊은 도반으로서, 손아래 비구들의 이로움을 지켜주는 보호자로서, 스승의 교의를 충실하게 담는 저장고로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법의 장군[法將]으로 불리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분은 과연 예사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인내와 성실함이 비길 데 없고, 생각과 말과 행동이 겸손하고 고결하며, 자신에게 베풀어진 조그만 친절도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며 마음속에 간직하는 그런 장군이었다. 그분은 아라한들, 일체의 번뇌망상을 여읜 성자들 가운데서도, 밤하늘을 수놓는 무수한 별 가운데 환히 빛나는 보름달 같은 존재였다.

이제 심오한 지성과 숭고한 인간성을 지녔고 위대한 스승의 참제자였던 이 분의 이야기를 심혈을 기울여 써보려 한다. 완벽한 품격을 지녔고 가장 높은 경지까지 자신을 끌어올려 완전히 해탈한 분의 이야기, 그런 분이 도반들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고 처신했던가하는 이야기가 이 불충분한 기록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인간이 어떤 경지까지 이를 수 있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통해서 믿음과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전기는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고 최상의 보답을 받는 셈이 될 것이다.

 

 

법을 찾아서

 

초년기

이 이야기는 인도의 라자가하(王舍城)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빠띠사와 꼴리따라는 두 브라만 마을에서 시작된다. 때는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기 몇년 전이었다. 우빠띠사 마을1)에 사는 브라만의 아내 루빠사리(Ruupasari)라는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같은 날 꼴리따 마을에 사는 목갈리(Moggalli)라는 브라만 여인도 아기를 갖게 되었다. 이 두 집안은 7대에 걸쳐서 우의를 맺어 서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태기가 보이는 날부터 양가의 식구들은 장차 어머니가 될 이 두 부인을 정성껏 보살폈고 10개월 후 같은 날에 두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이름짓는 날이 되자 루빠사리의 아들은 우빠띠사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그 집안이 마을에서 가장 권세 높은 집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목갈리의 아들은 꼴리따라고 이름지었다.

이 두 소년은 자라면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모든 분야에 걸쳐서 많은 지식을 완벽하게 습득하였다. 두 청년을 따르는 브라만 젊은이들이 각각 5백 명이나 되어서 강이나 공원으로 운동이나 휴식을 하러 갈 때면 우빠띠사는 5백 대의 가마를 대동하곤 했고 꼴리따도 5백 대의 마차와 함께 가곤 했다.

당시 라자가하에서는 매년 열리는 산마루 축제[山頂祭]가 벌어졌다. 이 두 청년은 둘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축제를 관람하였다. 우스운 장면에는 함께 웃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에는 함께 흥분했다. 돈을 써가며 다른 구경거리도 보았다. 이런 식으로 두 청년은 이틀 동안 축제를 즐겼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자 전에 없던 생각이 그들의 마음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어, 더 이상 웃을 수도 흥을 느낄 수도 없게 되었다. 놀이와 춤을 구경하며 앉아있을 때 문득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무서운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떠올랐던 것이다. 일단 이런 참담한 생각에 사로잡히자 그들의 태도는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암울한 기분은 점차 떨쳐낼 수 없는 의문이 되어 두 사람에게 뚜렷이 부각되었다.

'도대체 여기서 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 사람들 모두 100살도 되기 전에 죽어버릴 것이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가르침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며 두 청년은 셋째 날의 축제가 진행되는 동안 줄곧 그곳에 앉아있었다. 꼴리따는 의기소침하여 생각에 잠겨있는 우빠띠사에게 물었다.

"왜 그러지, 우빠띠사? 자네는 요 며칠 전처럼 즐거워 보이지도 않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아. 뭔가 근심스러운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꼴리따, 이런 허황된 구경거리를 보고있는 게 전혀 이로울 것이 없는 것 같아. 쓸데없는 짓이란 말이야. 이런 축제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니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나서야만 하겠어. 그런데 꼴리따, 자네도 역시 뭔가 불만스러운 것 같군."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네."

친구도 같은 생각이었음을 알게 된 우빠띠사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한 것 같아. 하지만 구원을 찾기 위한 길은 한 가지밖에 없어.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이지. 그런데 어느 문하에서 수행생활을 해야 할까?"

그 당시 라자가하에는 산자야(Sa~njaya)라는 유행승(遊行僧, paribbaajaka)이 한 무리의 제자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문하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우빠띠사와 꼴리따는 각자 거느리던 5백 명의 브라만 청년들을 이끌고 산자야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이 제자가 된 후 산자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후원도 풍족해졌다. 얼마되지 않아 산자야의 가르침을 완전히 익히게 된 두 친구는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다.

"스승님의 가르침은 이것이 전부입니까, 아니면 더 있습니까?"

"이것이 전부라네. 그대들은 내가 아는 것을 모두 다 배웠어."

이 대답을 듣자 그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그의 밑에서 수행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구원의 가르침을 찾아 출가를 했으나 이 스승의 밑에서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인도는 광활하다. 크고 작은 수많은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 우리가 찾고있는 가르침을 주실 스승을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현명한 수도자나 브라만이 어디 있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면 두 청년은 언제나 그리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랬지만 남들이 던지는 질문에는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이 두 사람은 막상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의문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인도 전역을 다 둘러본 후에 이들은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누구든지 먼저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반드시 상대방에게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이는 형제와 같은 깊은 우애로 맺어진 두 청년 사이의 맹세였다.

이런 결의를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존이신 부처님께서 라자가하로 오시게 되었다. 그 시기는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고 첫 번째 우안거를 마치신 직후, 길떠나 가르침을 베푸실 때였다. 성불하시기 전에 빔비사라 왕에게 깨달음을 얻게 되면 라자가하를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신 약속을 지키려고 나서신 것이다. 세존께서는 가야를 떠나 설법을 펴시며 라자가하로 오셨고 빔비사라 왕이 바친 죽림정사(Ve.luvana)에 거처를 정하셨다.

부처님께서 해탈의 가르침을 세상에 펴기 위해 여러 곳으로 보내신 최초의 아라한 61명 중에는 앗사지라는 장로가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기 전에 함께 있었던 다섯 수행자 중의 한 사람이자 옛 도반이었고, 세존께서 정등각을 얻으신 후에 첫 제자가 된 다섯 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아침 우빠띠사는 라자가하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발우를 손에 들고 탁발을 위해 집집마다 돌고있는 앗사지를 보게 되었다. 앗사지의 고결하고도 평온한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우빠띠사는 생각에 잠겼다. '내 평생 저와 같은 수도자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저분은 필시 아라한이거나 아니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 수행하는 분임이 분명하다. 저분에게로 가서 물어봐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지금 저분은 탁발하러 가는 길이니 가서 질문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구하는 자가 하는 법도대로 나도 저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장로 앗사지가 탁발을 마치고 공양을 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고있을 때 우빠띠사는 자기가 들고 다니던 방석을 놓아 자리를 마련하고 장로에게 권했다. 장로가 거기에 앉아서 공양을 마치자 우빠띠사는 자기 물통에서 물을 따라주었다. 이렇듯 우빠띠사는 앗사지에게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예의를 깎듯이 갖추었다.

두 사람이 예절에 맞게 인사를 공손하게 나누고 난 후, 우빠띠사는 말을 꺼냈다.

"벗이여, 당신께서는 참으로 평온해 보입니다. 안색도 맑고 밝아 보이고요. 당신께서는 어느 분의 문하에 출가하셨습니까? 스승은 누구이며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계신지요?"

"벗이여, 사꺄(Saakya)족의 후예로서 그 가문으로부터 출가한 위대한 수행자가 한 분 계십니다. 나는 세존이신 그 분의 문하로 출가하였으며, 그 성스러운 분이 바로 나의 스승이시고 나는 그 분의 진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앗사지는 말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시며 무엇을 설하시는지요?"

이런 질문을 받자 앗사지는 생각에 잠겼다. '이런 방랑하는 사문들은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대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심오한지를 이 청년에게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나는 수행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출가한 지도 얼마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같은 가르침과 수행을 접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그래서 진리[, Dhamma]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에 우빠띠사는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저는 우빠띠사라고 합니다. 다만 얼마라도 당신의 법력이 미치는 한 알려 주십시오. 온갖 수단을 다하여 그 의미를 깨우치는 것은 저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게송으로 덧붙여 말했다.

 말씀해 주실 것이 많건 적건
    알고싶은 건 그 속에 담긴 뜻 그것입니다.
   오직 소망은 그 의미를 아는 것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랍니다.

 이에 대하여 장로 앗사지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원인이 있어 생겨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여래께선 그 원인을 일러 주셨나니,
    또 이 모든 것들이 멸한다는 것, 그것까지도.
    대사문께서는 이렇게 설하셨습니다.2)

이 게송의 처음 두 구절을 듣고서 우빠띠사는 번뇌를 벗어나 불법에 대한 흠없는 통찰을 이룸으로써 불사의 첫걸음인 예류향에 들었고, 마지막 두 구절을 들을 때는 이미 예류과를 이루었다.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기서 해탈의 방법을 찾을 수 있겠구나!' 그리고는 장로에게 말했다. "존자시여, 진리에 대해 더이상 상세히 설명해 주실 것 없습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큰 스승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지금 죽림정사에 계십니다."

"그러면 존자시여, 먼저 가십시오. 제게는 진리를 만나면 같이 나누기로 약속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에게 알려 당신이 가신 길을 따라 함께 큰 스승님 앞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나서 우빠띠사는 그의 발아래 경배를 하고 유랑수행자들이 머물고 있는 숲으로 돌아갔다.

꼴리따는 가까이 오는 친구의 모습을 보자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내 친구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인다. 그가 불사의 경지를 찾은 게 틀림없구나!'

그래서 그 일에 대해 물어보자 우빠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네, 친구여, 불사의 경지를 찾았다네!" 그리고나서 장로 앗사지를 만났던 일에 관해 모두 이야기해주고 자신이 들은 게송을 읊어주었다. 게송이 끝났을 때 꼴리따 역시 예류과를 성취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벗이여, 큰 스승님께서는 어디 계신가?"

"지금 죽림정사에 머무신다고 나의 스승 앗사지 장로가 말씀하셨다네."

"우빠띠사, 그렇다면 우리 그리로 가서 큰 스승님을 만나보세." 라고 꼴리따가 말했다.

그러나 늘 스승을 존경하는 사람이었던 사리뿟따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우선 우리를 가르치시던 유행승 산자야에게 가서 불사의 길을 찾았음을 알려야 하네. 그분이 이 사실을 납득한다면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믿으니까 함께 큰 스승님을 뵈러 갈 것이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분도 도()와 과()를 성취할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두 친구는 산자야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시여,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그분의 법은 잘 설해져 있으며 그분을 따르는 승가는 바른 도를 지키고 있으니 우리와 함께 큰 스승님을 뵈러 가십시다."

"그대들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하며 산자야는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절했다. 오히려 그 두 사람에게 자기 집단의 공동지도자가 되어준다면 크나큰 이익과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심을 굽히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끝끝내 제자의 위치에 머물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스승께서는 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산자야는 생각했다. '저들은 아는 것이 많으니 내가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겠군.'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들은 가도 좋지만 난 못 가네."

"어찌하여 못 가십니까, 스승님?"

"나는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 아닌가. 내가 지금 다시 제자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되면, 이는 마치 큰 물통이 조그만 물병으로 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이제 와서 누구의 제자로 살아갈 수는 없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승이시여!"하고 그들이 간청했다.

"그냥 내버려두게, 이 사람들아, 자네들은 가도 좋지만 나는 못 가네."

"스승이시여,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구름처럼 모여들어 무리를 이루고 향과 꽃으로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분에게 가야 합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되려고 그러십니까?"

이 말에 산자야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이 사람들아, 이 세상에 현명한 사람이 많은 것 같은가, 아니면 어리석은 사람이 많은 것 같은가?"

"어리석은 사람은 많지만 현명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여보게들, 그것이 사실이라면, 현명한 자들은 현명한 수행자 고따마에게 갈 것이고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은 나에게 올 테지. , 이제 자네들이나 가보게. 나는 가지 않겠네."

그래서 두 친구는 이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스승이시여, 언젠가는 당신이 실수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떠난 후 산자야의 제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그의 사원은 거의 텅 비어 버렸다. 텅 빈 사원을 둘러보던 산자야는 뜨거운 피를 토했다. 그의 제자들 중의 5백 명이 우빠띠사와 꼴리따를 따라갔으나 그 중에 25십 명은 산자야에게 되돌아갔다. 나머지 25십 명과 더불어 두 친구는 본디 자기들을 따르던 이들을 이끌고 죽림정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부처님은 사부대중3)에 둘러싸여 법을 설하고 계셨다. 이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저기 오고있는 두 사람 우빠띠사와 꼴리따는 장차 나의 뛰어난 한 쌍의 제자가 될 것이다."

두 친구는 부처님 가까이 다가가서 지극한 마음으로 절을 한 후에 한 쪽에 앉았다. 자리를 잡은 후 이렇게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거두시어 세존의 문하에 출가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저희들이 구족계를 받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라, 비구들이여. 불법은 참으로 잘 설해졌도다. ()를 멸하기 위해 청정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라!" 이 말씀만으로 부처님께서는 두 존자를 받아들이셨다.

그리고나서 부처님께서 듣는 이들의 근기(根機)를 고려하시면서 설법을 계속하시자 우빠띠사와 꼴리따를 제외하고 거기에 있던 모든 이들이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하지만 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도과(道果)를 더 높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수제자로서 세존을 받들어야 할 두 사람의 타고난 숙명을 따르기 위해선 더 오랜 준비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친구가 부처님의 승단에 들어간 이후로는 경전이나 주석서에서 그들을 칭하여, 우빠띠사를 사리뿟따로, 꼴리따를 마하목갈라나로 부르고 있다.

목갈라나 존자는 집중적인 수행을 하기 위해 마가다국의 깔라왈라뿟따(Kallavaalaputta) 마을에 가서 탁발하며 지냈다. 그가 수계한지 7일째 되는 날, 맹렬히 정진하고 있던 중 피로와 혼침이 엄습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독려로 피로를 물리치고, 스승이 설명해주시는 '요소에 대한 관법[界業處, dhaatu kamma.t.thaana]'을 듣고 있는 동안 세 단계의 높은 도(일래향·불환향·아라한향)를 성취함으로써 완벽한 수제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편 사리뿟따 존자는 계속 스승 곁에 머물고 있었다. 스승의 처소 근처 멧돼지굴(sukarakhata-le.na)이라는 토굴에 기거하며 라자가하에 가서 탁발을 했다. 그가 입문한지 보름이 지났을 때 세존은 사리뿟따의 조카인 유행승 디가나카에게 설법을 해주셨다.4) 그때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뒤에 서서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었다. 마치 남을 위해 마련한 음식을 나누어 먹듯이 스승의 법문을 주의 깊게 음미하며 귀기울이고 있던 사리뿟따는 마침내 불제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여 아라한과와 사무애해5)를 한꺼번에 성취했다. 그리고 그의 조카는 법문이 끝났을 때 예류과에 들었다.

더러는 이런 의문을 가질는지 모르겠다. "사리뿟따는 대단히 지혜로운 분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런 그가 어찌 목갈라나보다 늦게 아라한과를 성취했을까?" 주석서에는 그만큼 준비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가난한 사람이 어디든 가려한다면 당장에 길을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왕이 떠나려면 엄청난 준비를 해야 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날 땅거미가 질 무렵, 부처님께서는 모든 제자를 불러모아서 새로 입문한 두 장로에게 상수제자의 지위를 내리셨다. 이에 대해 비구들 몇이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승께서는 상수제자의 자리를 먼저 입문한 제자들, 말하자면 오비구들에게 주셨어야 했어. 아니면 야사(Yasa)가 이끄는 55명의 비구들에게, 그도 아니면 30여 밧다왁기야(bhaddavaggiya, 吉祥)의 무리에게, 아니면 깟사빠(Kassapa) 3형제들에게 주셨어야 했어. 그런데 스승께서는 이 모든 훌륭한 장로들을 제쳐놓고 가장 늦게 입문한 이들에게 주셨단 말이야."

부처님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물으신 다음 이렇게 설명해주셨다. "나는 어떤 제자도 편애하지 않고 각자 서원한 대로 성취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서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는 전생에 한 번의 수확기 동안에 아홉 번이나 공양을 올렸는데, 그때 그는 수제자가 되고자 서원하지 않았다. 그의 서원은 누구보다 먼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고 결국 그리 되었다. 그러나 여러 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ii) 부처님 때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다. 이제 그 서원이 성취될 조건이 무르익은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이 서원했던 바를 성취토록 한 것이지 편애심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숙세의 서원

 

위의 부처님 말씀은 불교 사상의 근본적인 교의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즉 현재의 우리 모습과 우리 생의 운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탄생으로 시작되는 금생이라는 짧은 기간에 우리가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행했는가의 결과만이 아니라, 무시(無始) 이래의 윤회과정 속에 쌓이고 쌓인 과거 경험세계의 깊은 연원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수제자 사리뿟따의 이야기도 당연히 머나먼 옛날에 시작된 것이며 그 내막은 전설의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져 온 것이다. 전설이긴 하지만 황당무계한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가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런 전설들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 축소 환원시키기엔 너무나 심원하고 보편적인 원칙들을 웅변으로 서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런 큰 원칙들은, 설화적 사실들을 신성한 원형으로, 그리고 다시 그 원형을 종교적 이상으로 바꿀 때 비로소 적절한 의미전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특별한 이야기는 수만 겁의 과거 속으로 엄청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에 사리뿟따 존자가 될 존재는 부유한 브라만 가정에 태어나 사라다(Sarada)라고 불린다. 동시에 미래의 목갈라나도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시리왓다나(Sirivaddhana)라고 불린다. 두 가정은 서로 잘 알아 두 소년은 함께 놀고 가까운 친구가 된다.

사라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굉장히 많은 유산을 물려받는다. 그러나 머지않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운명을 고독 속에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해탈의 길을 찾아서 출가할 결심을 한다. 사라다는 친구 시리왓다나에게 가서 구도의 길에 함께 동참할 것을 청한다. 그러자 아직도 세속의 일에 너무 강하게 집착하고 있던 시리왓다나는 거절한다. 하지만 사라다는 그 결심이 확고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덥수룩한 머리로 고행의 삶을 살아간다. 별 어려움없이 곧바로 그는 세간에서 명상으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과 신통력을 통달했고 한 무리의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수행처는 많은 고행자 무리의 거처가 되었다.

그 때에 아노마닷시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그 분은 고따마 부처님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열 여덟 번째가 되는 부처님이시다. 어느 날 아노마닷시 부처님은 선정에서 깨어나 세상을 향해 '지혜의 그물'을 펼치시어 고행자 사라다와 그의 일행을 보셨다. 이 집단을 찾아가는 것이 많은 존재들에게 크게 유익하리라는 것을 아시고는 당신의 제자들을 뒤로하시고 그들의 수행처를 찾아 길 떠나셨다. 사라다는 그 방문객의 육신에서 고귀한 상호(相好)를 보고 즉시 그 분이 정각을 이루신 분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공손히 그 분에게 상석을 권하고 그의 제자들이 탁발해온 음식으로 공양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수행처로 모여들었다. 두 상수제자 니사바와 아노마가 이끄는 그 제자들은 모든 번뇌를 벗어난 10만 명의 아라한이었다. 고행자 사라다는 부처님을 공경하여, 꽃으로 장식된 넓은 차양을 펴들고 세존의 뒤에 서 있었다. 세존께서는 인식[]과 느낌[] 그리고 다른 정신작용들이 완전히 멈춘 선정의 상태인 멸진정(滅盡定, nirodhasamaapatti)에 드셨다. 세존께서는 일주일 내내 입정해 계셨고, 그 동안 사라다는 꽃으로 장식된 차양을 높이 펼쳐들고 서있었다.

일주일이 지나 멸진정에서 깨어나신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에게 고행자의 무리를 위해 이야기해 주도록 이르셨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고 세존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끝내시자 사라다 이외의 모든 고행제자들은 아라한과를 성취하였고 부처님께 당신의 승단에 받아주십사고 청했다. 그러나 사라다는 아라한과는 물론 다른 어떤 과도 성취하지 못하였다. 그가 상수제자 니사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니사바의 훌륭한 거동을 보고는 내세에 부처님의 첫번째 상수제자가 되고자하는 서원을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임이 끝나자 사라다는 아노마닷시 부처님께 다가가서 발아래 경배하고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일주일 내내 존경심으로 당신의 머리 위에 꽃의 차양을 받쳐드린 공덕이 있다면 신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도, 대범천의 지위도, 그 어떤 보답도 아니고 다만 미래에 정등각자의 상수제자가 되기를 서원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서원이 이루어지겠는가를 생각하셨다. 그리고 내세에로 지혜를 펼치시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아셨다. 그래서 사라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서원은 헛되지 않으리라. 수만 겁의 엄청난 시간이 흐른 미래에 고따마라는 이름의 부처가 세간에 출현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사리뿟따라는 이름으로 그 분의 상수제자인 법장이 될 것이다."

부처님이 떠난 후 사라다는 그의 친구 시리왓다나에게 가서 고따마 부처님의 두번째 상수제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하라고 재촉하였다. 이에 시리왓다나는 공양 장소를 성대하게 짓도록 하였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세존과 비구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렸다. 시리왓다나는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일주일 내내 공양을 올렸다. 이 잔치 말미에 모든 비구들에게 훌륭한 승복을 올린 후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이 공덕의 힘을 빌어 벗 사라다가 첫번째 상수제자가 되기로 한 바로 그 부처님의 두번째 상수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미래를 내다보시고 이 서원이 이루어질 것을 알게 되셨다. 그리고 시리왓다나에게 그가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될 것이고 목갈라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신통력 있는 비구가 될 것임을 예언하셨다.

두 친구는 저마다 수기(授記)를 받고 난 후에, 각자의 영역에서 선행에 전심전력하였다. 시리왓다나는 재가자로서 승가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돌보았고 다양한 자비행을 베풀었다. 사라다는 고행승으로서 그의 명상생활을 계속하였다. 두 사람이 죽어서 시리왓다나는 욕계천에 다시 태어났고, 사라다는 범주처(梵住處, brahmavihaara)에 숙달하여 범천의 세계에 다시 태어났다.

 

 

『본생경』에 나타난 사리뿟따

 

이 두 사람의 그 이후 행적에 관해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생사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 이 두 친구의 행로는 그들보다 훨씬 이전, 과거 스물 네 번째 부처님의 발아래 엎드려 최고의 부처가 되기를 서원했던 한 인물의 행로와 여러 차례 교차되고 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시대의 깨달은 분, 고따마 붓다가 되신 보디삿따[菩薩, Bodhisatta,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부처님]이다. 『본생경』은 보디삿따의 550번의 전생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리뿟따는 아난다와 비교한다면 몰라도 부처님의 그 어느 제자보다 자주 등장하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사리뿟따와 관계되는 몇 가지 전생담만을 살펴보겠다. 재생의 과정은 존재의 영역사이에 구분 없이 순환되는 것이어서 축생계로부터 인간계와 천상계로, 또 천상계에서 인간계나 축생계로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까닭에 사리뿟따와 보디삿따의 특별한 인연은 세세생생 다양하게 펼쳐지게 된다. 이제부터 이 두 분의 이러한 인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엮어보기로 한다.

보디삿따와 사리뿟따는 과거생에서 동물로 태어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언젠가 보디삿따가 우두머리 수사슴이었을 때, 자기 두 아들에게 지도자의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가르쳤다. 한 아들(사리뿟따)은 아버지의 충고를 충실히 따라 제 무리를 훌륭히 이끌었고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일축하고 제 고집대로만 하여 자기 무리를 재난으로 이끌었다. 그는 나중에 부처님의 질투심 많은 사촌 데와닷따로 태어나게 된다(『본생경』 11). 또 보디삿따가 왕궁의 거위였을 때는 두 아들(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이 태양을 앞질러 보겠다고 날다가 지쳐서 떨어지려 하자 보디삿따가 구해주었다(476). 그리고 보디삿따가 자고새로 태어났을 때 그는 친구인 원숭이(사리뿟따)와 코끼리(목갈라나)보다 앞선 자로서 이 두 친구의 선생이면서 지도자였는데 이 사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몸 받는 생에서의 관계를 알려주는 징후가 된다(37). 「토끼전생담」(316)에서도 보디삿따는 지혜로운 산토끼로 태어나 다시 지도자가 되었는데 원숭이(사리뿟따), 자칼(목갈라나) 그리고 수달(아난다)에게 계율과 자비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 신들의 왕인 삭까(제석천)가 그의 뜻이 얼마나 굳은지 시험하기 위해서 굶주린 브라만으로 변신하여 나타나자 그 산토끼는 그의 먹을거리가 되기 위해 불 속에 뛰어들었다.

 

이 미래의 두 상수제자는 여러 번 보디삿따의 생명을 구해주기도 하였다. 보디삿따가 사슴이었을 때 덫에 걸린 일이 있었는데 동무였던 딱따구리(사리뿟따)와 거북이(목갈라나)는 덫을 부수고 그를 구해낸다. 그때 거북이가 사냥꾼(데와닷따)에게 잡히지만 사슴과 딱따구리가 그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다(206). 그러나 보디삿따가 매번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어서 『본생경』에는 비극적인 운명의 이야기도 있다. 어떤 생에서는 그분께서 젊은 브라만 청년들에게 베다를 가르치는 자고새였을 때 사악한 고행자(데와닷따)가 그를 잡아먹는다(438). 사자(사리뿟따)와 호랑이(목갈라나)가 친구인 자고새를 만나러 왔다가 그 고행자의 수염에 붙어있는 깃털을 보고는 그가 극악한 짓을 했음을 알게 된다. 사자는 자비를 베풀고자 했으나 호랑이는 그 고행자를 갈가리 찢어서 시체를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이 사건에서도 두 제자의 기질이 상당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는 사자처럼 힘이 세면서도 너그럽고 온화했던 반면, 목갈라나는 마지막 생에서는 결국 깨달은 비구답게 해칠 줄 모르는 존재가 되었지만 여전히 호랑이 기상을 갖추고 있다.

『본생경』의 다른 곳에서는 보디삿따와 사리뿟따 둘 중의 한쪽이 인간이고 다른 쪽은 동물인 적도 있고 시혜자와 수혜자로서의 처지가 서로 뒤바뀐 적도 있다. 사리뿟따가 전사였을 때 보디삿따는 그의 군마였다(23). 보디삿따가 흰 코끼리로 태어나 베나레스 왕(사리뿟따)을 훌륭히 모시기도 하였다(122). 보디삿따는 자고새였고 사리뿟따는 그를 가르치는 현명한 고행자였던 적도 있다(277). 또 다른 생에서는 보디삿따가 사람이고 사리뿟따는 동물인 적도 있다. 예를 들어 은둔수행을 하던 보디삿따가 사악한 왕자(데와닷따)와 세 마리의 동물을 급류에서 구해낸 이야기도 있다. 그 동물들은 뱀(사리뿟따), (목갈라나), 앵무새(아난다)였는데, 감사의 표시로 숨겨둔 보물을 은둔자에게 드리려 하자 질투심 많은 왕자는 그를 제거하려 한다(73).

장차 중생제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될 이들은 천상에 몸을 받아 나기도 한다. 한번은 보디삿따가 제석천이었을 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각각 달의 신인 짠다와 해의 신인 수리야였다. 그들은 몇몇 다른 신들과 함께 악명 높은 구두쇠를 찾아가 베풀 줄 아는 삶을 살도록 교화한다(450). 보디삿따가 이들 미래의 제자를 이롭게 한 적이 더 많지만, 때로는 사리뿟따가 보디삿따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들이 반신(半神)인 뱀 나가(naaga)의 두 왕자로 태어났을 때 잔인한 브라만이 보디삿따를 잡아 구경꾼들 앞에서 요술을 부리게 한다. 형이었던 사리뿟따는 그를 찾아 나서서 이런 굴욕적인 삶으로부터 구해준다(543). 보디삿따가 덕성스러운 왕자 마하빠두마였을 때 계모가 그를 유혹한 적이 있었다. 이를 거절하자 계모는 그를 중상 모략하였고, 부왕은 그를 절벽에서 내던지게 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산신령이었던 사리뿟따가 그를 받아 안전하게 구해 준다(472).

『본생경』을 보면 보디삿따와 사리뿟따는 인간으로 태어난 적이 훨씬 더 많았다. 이야기마다 보디삿따는 예외 없이 최고의 덕과 지혜를 드러내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거기서 사리뿟따는 그분의 친구, 제자, 아들, 동생으로 나타나며 그분에게 도움을 드리고 있다. 어떤 생에서는 보디삿따가 왕이었고 사리뿟따는 마차를 끄는 시종이었다(151). 그들이 길에서 상대국의 왕(아난다)이 타고 가는 마차와 마주쳤을 때 사리뿟따와 상대국 왕의 시종(목갈라나)은 자기들이 모시는 왕의 장점을 서로 비교하게 된다. 목갈라나는 사리뿟따의 주인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 왕은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 다스리는데, 사리뿟따가 모시는 왕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명 깊은 「인욕전생담」(313)에서 인욕을 설하는 성자인 보디삿따는 사악한 깔라부 왕(데와닷따)에게서 온갖 모욕과 고문을 당한다. 깔라부 왕이 보디삿따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사지를 찢었을 때 장군인 사리뿟따는 보디삿따의 찢긴 몸을 싸매주면서 제발 복수심은 갖지 마시라고 간청한다.

『본생경』의 좀더 긴 이야기에서는 보디삿따가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게되면 사리뿟따도 그 구도행에 동참하는 일이 잦다. 두 사람의 기질에 그런 식의 출가 성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마지막 생에서도 출가를 하고 난 후에야 영적인 완성을 이루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보디삿따가 사제의 아들인 핫티빨라였을 때 그 나라의 왕에게 후사가 없자 왕위를 계승할 상속자로 지명된다. 그러나 세속 삶의 위험을 알아차린 그가 고행자가 되기로 결심하자 세 아우가 뒤를 따르는데 그 중 큰 동생이 미래의 사리뿟따였다(509). 「인드리야 전생담」(423)에서 보디삿따는 일곱 명의 상수제자를 거느린 고행자였다. 그 중에 연장자(사리뿟따)를 포함한 여섯 명은 결국 자신의 은둔처를 마련하려고 모두 떠나게 된다. 그러나 아누싯사(아난다)만은 그 분의 시봉자로 남는다. 이는 부처님과 아난다가 마지막 생애에서 맺을 관계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세속을 떠나려는 보디삿따의 결정을 사리뿟따가 항상 따랐던 것은 아니다. 한 번은 왕이었던 보디삿따가 고행자의 삶을 결심했을 때 그의 맏아들(사리뿟따)과 막내아들(라훌라)이 그 계획을 포기하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그는 아들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려고 내심 갈등을 겪는다(525). 또 다른 생에서는 보디삿따의 출가 결심이 흔들리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나라다라는 고행자였던 사리뿟따가 신통력으로 모습을 나타내어 그 결심을 확고히 하도록 힘을 북돋워준다(539).

업의 풍랑에 시달리면서 이 두 거룩한 존재는 재생의 윤회 속에 세세생생 이렇게 떠돌며 살았다. 그러나 무지한 중생과는 달리 그들의 방랑은 목적 없는 것도 아니었고 방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먼 과거에 세웠던 서원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십바라밀을 행하고 계행을 완성하고 동료애와 상호신뢰를 더욱 더 결속시키면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생을 보낸 후에야 그토록 오랫동안 갈구해 온 목적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이 25백년 전에 인도 중부에서 마지막 생을 받아 나셨을 때 한 분은 천상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신 고따마 부처님으로, 다른 한 분은 가장 뛰어난 제자인 법장 사리뿟따 존자로 태어난다.

 

인간 사리뿟따

 

상수제자

 

부처님께서는 「대보시경(『장부』 14)」에서 아흔 한 겁 전의 위빳시 부처로부터 시작되는 여섯 과거불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이분들이 누구며 이 세상에 나왔던 때는 언제며 어느 부족, 어느 계급 태생이고 얼마나 오래 살면서 교화하였는지 밝히신다. 그분들이 거느렸던 두 상수제자들이 각각 누구였는지도 말씀하시면서 매번 '한 쌍의 상수제자, 뛰어난 한 쌍'이라고 하신다. 『상응부』(47:14)에서는 당신께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거느렸듯이 모든 과거불도 다 한 쌍의 상수제자를 거느렸으며 모든 미래불도 한 쌍의 제자를 거느릴 것이라고 하신다. 이로써 상수제자라는 직위가 부처님 승단체제의 필수 요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 고따마 부처님께서 두 비구를 상수제자로 삼으신 것도 그분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정해져 있는 어떤 틀에 따라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정등각자가 따랐고 미래의 모든 계승자들이 따르게 되어있는 그러한 틀이다.

승단체제 안에서 상수제자의 기본적 역할은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이 굳건히 뿌리내려 인간과 천상의 많은 존재에게 정신적 변화를 가져오고 해탈의 수레가 될 수 있도록 세존을 도와 드리는 것이 그 첫째이다. 둘째는 다른 비구들의 수행을 지도하면서 진실로 본받을만한 모범이 되는 일이다. 셋째는 승가의 운영을 돕는 일이다. 특히 세존께서 독거(獨居)에 드시거나 긴요한 일로 홀로 길을 떠나시면 승가를 돌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승단체제의 수장으로 언제고 지고의 권위를 지니시기에, 상수제자를 지명한다는 것이 오늘날 민주사회의 권력이양과 같은 것은 아니다. 모든 가르침은 유일한 원천, 세존으로부터 나온다. 그분만이 길을 보여주실 수 있고 그분만이 '사람을 가장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다. 임금이 나라 일을 보는 데 재상이 필요하듯이 법의 왕이신 부처님께서도 여러 제자를 그 재능에 따라 수행의 각 방면에 책임 맡기신 것이다. 맡은 일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두 상수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상수제자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나 특혜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상수제자가 되는 것은 승단체제 전반에 걸쳐 참으로 중차대한 책임을 맡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행을 거들어드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도와 정법이 '성공적으로 번성, 확산하여 널리 호응을 받는 가운데 천상과 인간세계에 잘 선양되게끔'(『장부』16; 『상응부』 51:10) 다지는 작업이다.

모든 부처님이 하필이면 한 쌍으로 상수제자를 지명하는 이유는 각기 다른 책임 영역과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자질간의 바람직한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몸소 모든 바라밀을 완성해낸 분이시며 '모든 면에서 완성에 이른 성자[正遍知]'이시다. 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중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깨달은 아라한이라 할지라도 각기 성품과 재능이 달라서, 알맞은 소임이 차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부처는 예외 없이 맡은 바 책임 영역을 나누어 잘 살필 수 있도록 좌우에 두 상수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 둘 중에 오른쪽이 부처님과 제일 가깝다고 여겨지는 지혜제일의 제자인데, 고따마 부처님의 경우에는 사리뿟따 존자였다. 승단 체제에 있어서 그가 특별히 맡은 소임은 불법을 체계화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는 것이다. 진리를 궁극에까지 꿰뚫는 깊은 통찰력과 천양만태의 현상계에 대한 날카로운 식별력으로 법의 미묘한 함축적 의미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아주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의 책임이다. 이런 일은 승단체제의 수장이신 부처님께서 몸소 하실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왼쪽에 서있는 또 한 분의 상수제자는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데 뛰어난 분이다. 고따마 부처님의 승가에서는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신통력은 완전하게 무아의 깨달음을 이룬 뒤에 얻어지는 것으로서 남을 지배하거나 자기를 과시하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신통력은 정()수행을 통달하는 데서 나온다. 정 수행은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 마음과 물질[名色], 그리고 그 양자의 미묘한 상호관계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을 깊이 이해하도록 해준다. 불법 특유의 자비정신을 지침으로 삼는 이 신통력은, 승단체제가 이 사바세계에 뿌리내리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또 점잖은 설법만으로는 감화하기 힘든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방편으로 쓰인다.

상수제자로서 사리뿟따가 해야 할 가장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하는 일인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법륜을 굴리는 이'로서의 그의 역할을 살펴볼 때에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서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함께 상수제자로서 어떻게 비구들의 모범이 되고 교사로서의 역할을 해냈는지, 그리고 어떻게 승가 운영을 보좌했는지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부처님께서는 승가의 여러 비구들에게 두 상수제자를 본보기로 따르라고 훈계하신 적이 있다. "비구들이여, 신심 깊은 비구는 이와 같은 올바른 서원을 품어야 할 것이다. ', 이 몸도 사리뿟따나 목갈라나처럼 되어지이다!' 이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나의 비구 제자들에게 모범이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증지부』 2:131). 계·정·혜 삼학을 통달함으로써 이 두 사람은 수행하는 비구들이 터득해 갖추어야 할 자질을 이미 체현하고 있었다. 또한 탁월한 분석력과 언어구사력을 갖고 있었던 그들은 젊은 비구들에게 교훈과 지침을 줄 수 있는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부처님은 「진리의 분별경[諸分別經]」에서 남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말씀하고 계시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가까이하고 그들을 따르라. 두 사람 다  현명한 비구이고, 동료 비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들이다. 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예류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중부』 141).

이 구절을 『중부』의 주석서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자신이 수계를 주었든 남이 주었든 관계없이 일단 제자로 받아들이면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병들면 돌보아주고, 명상주제를 주고, 마침내 그들이 예류과에 들어서 인간계에 들지 못할 위험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알게 되면 '이제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더 높은 성스러운 도에 이를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떠나보냈다. 이렇게 그들의 앞날에 관한 염려에서 벗어나면 그는 새로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목갈라나는 같은 방법으로 수행시키더라도 그들이 아라한과를 성취할 때까지는 염려를 놓지 않았다. 세존께서 '아주 작은 똥에서도 악취는 난다. 그처럼 ''하고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보다 짧더라도 일단 존재를 받으면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씀하신 바를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리뿟따는 제자를 가르칠 때에도 한량없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는 제자들이 예류과를 성취할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일깨우고 가르치곤 했다. 그런 다음에라야 그는 새 제자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중부』 주석서에서는 보통 사리뿟따가 제자를 예류과까지만 이끌었다고 하지만, 몇몇 비구에게는 더 높은 경지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감흥어』 주석서를 보면 "그때에 이미 높은 수행과정에 있던 비구들이 다음 더 높은 세 단계의 경지를 성취하기 위해 명상주제를 받으러 사리뿟따를 찾아가곤 했다."고 쓰여 있다. 그때까지 예류과였던 라꾼띠까 밧디야 장로6)도 사리뿟따의 가르침을 받은 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감흥어』 7-1).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당신이 안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짜뚜마 숫따(『중부』 67)」를 보면 부처님께서 사리뿟따 존자가 자기 책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음을 꾸짖으시며 이 점을 분명히 하신 일이 있다. 한번은 새로 수계를 받은 비구들 여럿이 처음으로 부처님께 경배하러 왔다. 주석서에는 이들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서 수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짜뚜마에 도착해 숙소를 분배받고 난 그들은 거기에 있던 비구들과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부처님께서는 먼저 있던 비구들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시고, 새로 온 사람들 때문에 그렇게 소란스러웠음을 아시게 되었다. 새로 온 비구들까지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주석서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물러가거라 비구들이여, 여래는 너희들을 만나지 않겠노라. 너희들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새로 수계를 받은 비구들은 말씀에 따라 그곳을 떠났으나 재가불자 몇 사람이 간청을 드려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사리뿟따여, 여래가 비구들을 물러가게 하였을 때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사리뿟따가 아뢰었다. "세존께서 평온[, upekkha]에 드시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고자 하시니 저희들도 평온에 들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니라, 사리뿟따여! 다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라!"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목갈라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시자 그는 "세존께서 비구들을 물러가라고 하셨을 때에 저는 '세존께서는 평온에 드시어 지금 여기의 지복상태에 머물고자 하시니 사리뿟따와 나는 승가를 돌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옳도다! 목갈라나여, 바로 말하였다! 승가는 여래가 아니면 그대나 사리뿟따가 돌보아야 하느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 승가 계율을 정해주십사고 최초로 간청한 사람도 또한 사리뿟따 존자였다. 어떤 과거불의 교법은 오래 지속된 반면, 다른 과거불 교법은 그렇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그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법을 많이 설하지 않으셨거나, 제자들을 위해 규칙을 제정하지 않으셨거나, 계본의 낭송을 제도화하지 않으셨던 부처님들의 경우에는 교법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신 부처님의 교법은 오래 지속되었다."라고 하셨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일어나 세존께 경배하고 이렇게 말씀 드렸다. "지금 바로 규율을 선포하시고 계본을 제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고귀한 삶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냥 두어라, 사리뿟따여. 언제 해야 할 지 여래는 아느니라. 승가에 타락의 징후가 드러나지 않는 한 제자들에게 규율을 만들지 않을 것이고 계본도 일러주지 않을 것이다."(『율장』 3:9-10).

교법이 가능한 한 오래 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사리뿟따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생각이라면, 계율은 반드시 필요한 시기가 되기까지는 제정하지 않으려는 것, 그것 또한 부처님 특유의 생각이었다. 당시 승가에서 가장 향상이 더딘 비구마저도 예류과에 도달했기에(이 점을 사리뿟따는 간과한 듯함) 아직은 비구생활의 계율을 정할 필요가 없다고 부처님께서는 설명하셨다.

부처님께서는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부처님의 사촌인 야심만만한 데와닷따가 젊은 비구들 한 무리를 외도로 유인해가자 두 제자를 보내어 다시 데려오도록 하신 적이 있다. 데와닷따는 승단을 별도로 이끌겠다고 선언하며 승가를 양분하고 난 후, 5백 명의 젊은 비구를 부추겨 영취산으로 데리고 갔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 데려오도록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영취산으로 보내셨다. 데와닷따는 두 장로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들이 부처님을 버리고 자기 무리에 동참하려고 결심한 줄 알았다. 그는 두 사람을 따뜻이 맞이하고 마치 그들이 자기 상수제자나 되는 듯 대했다. 그날 저녁 데와닷따가 쉬고 있을 때 두 장로는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여 예류과로 이끈 후, 그들을 세존께로 돌아오도록 설득했다(『율장』 2:199-200).

또 다른 예로는, 깃타기리에 살고 있던 뿌납바수와 앗사지(앞에 나온 장로 앗사지와는 다른 사람)가 이끌던 한 무리의 비구들이 비행을 저질렀을 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함께 승가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일이다. 그 비구들은 저녁에도 음식을 먹었고, 마을의 젊은 처녀들과 노래하고 춤을 주었으며, 속인들과 어울리는 등 승가의 위엄을 욕되게 하였다. 여러 차례 꾸짖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실을 고치려 하지 않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 계율 따르기를 거부한 그들에게 파문의 벌을 선언하셨다(『율장』 2:12; 3:182-83).

 

도움을 주는 이

 

많은 비구 중에서도 사리뿟따는 남을 돕는 일에 탁월하였다. 「데와다하경(『상응부』 22:2)」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현명하고 다른 비구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다."라고 당신의 훌륭한 제자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 주석서에서는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남을 돕는 방식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의 한 예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물질적인 도움과 법을 통한 도움, 두 길로 도움을 주는 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주석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다른 비구들이 이른 아침에 탁발하러 갈 때에도 사리뿟따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모두가 떠난 후에 도량을 구석구석 돌며 비질이 안된 곳은 쓸어내고 쓰레기가 남아있으면 치웠다. 침상이나 의자나 그릇이 제 자리에 있지 않으면 가지런히 놓았다. 불자가 아닌 수행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무질서한 것을 보게 되면 비구들을 욕하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그 다음, 그는 간병실로 가서 환자들을 위로해주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나서 필요한 것과 약품을 구하기 위해 늘 탁발을 다니던 곳이나 아니면 다른 적당한 곳으로 어린 사미들을 데리고 갔다. 약을 구하면 사미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병든 이 돌보는 것을 세존께서는 칭찬하셨네. 이제들 가보게나. 선한 이여, 조심하시게!" 사미들을 간병실로 돌려보낸 후에야 그는 탁발을 가거나 공양을 올리겠다고 한 집으로 가거나 하였다.

수행처에 머무를 때 사리뿟따의 일과는 늘 이와 같았다. 세존을 모시고 길을 떠날 때에도 그는 상수제자임을 의식해 신을 갖추어 신거나 햇빛가리개를 들지 않았으며 앞장서서 걸어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 사미에게 자신의 발우와 가사를 맡겨 일행을 따라가게 한 다음, 노약자나 어린 사람들을 돌보고 상처난 사람에게는 약을 발라주고 나서 같은 날 늦게나 다음 날 그들을 데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한번은 사람들을 보살피다가 앞서 간 일행이 쉬고 있는 곳에 아주 늦게 도착했다. 사리뿟따는 마땅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가사로 이슬을 가리고 앉은 채 밤을 지새야 했다. 그것을 보신 세존께서는 다음날 비구들을 모이게 하신 후 「자고새 전생담」(37)을 설하셨다. 그 이야기는 코끼리와 원숭이와 자고새가 누가 가장 연장자인가를 확실히 하고 나서 그분에게 존경을 표하며 함께 살았다는 내용이다. 그런 다음 부처님께서는 "숙소는 연장자 순으로 배정해야 한다."(『율장』 2:160-61)는 계율을 정하셨다.

사리뿟따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는 동시에 그 못지 않게 법의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요양실에서 나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미띠굿따라는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오온이 지속되는 한 모든 느낌이 바로 고()라오. 오온이 멸해야 고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의 관찰[念受]이라는 명상주제를 주고 나서 떠났다. 사미띠굿따는 그의 가르침을 따라 통찰력을 증진시켰고 아라한이 되어 육신통을 증득하였다(『장로게』 81게와 주석서).

또 다른 예로 사리뿟따가 부처님의 대시주자인 아나타삔디까에게 들려준 병상법문이 「예류도상응」에 있다(『상응부』 55:26). 머리가 으스러질 듯한 격심한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는 아나타삔디까에게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은 법문으로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이 재가신자를 위로하고 있다. 그가 예류도에 들었으니 이제 비참한 고통 속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끄는 나쁜 습성으로부터는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또한 그가 불법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성자에게 걸맞는 계행이라는 네 가지 예류지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켜 주었다. 아울러 그는 팔정도를 확고히 닦았고 그리하여 도과와 깨달음과 해탈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 아나타삔디까는 고통이 가라앉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다. 그는 감사의 표시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음식을 사리뿟따에게 공양했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가르침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사리뿟따를 은근히 나무라신 적이 있다. 브라만 다난자니의 임종의 자리에 사리뿟따 존자가 방문했다. 브라만들은 범천을 동경하고 있다고 생각한 존자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범천에 이르도록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설하였다. 하지만 해탈의 길은 가르쳐주지 않은 채 그의 설법을 마쳤던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가 돌아왔을 때 세존께서 물으셨다. "사리뿟따여, 브라만 다난자니에게 가르쳐 줄 것이 더 있었는데 왜 그의 생각을 열등한 범천세계에 머물게 두고 그 곁을 떠나왔느냐?" 이에 사리뿟따는 대답했다. "저는 '브라만들은 범천을 동경하니 브라만 다난자니를 범천의 브라만들과 합류하도록 안내해 주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 브라만 다난자니가 죽어서 다시 범천에 태어나지 않았느냐, 사리뿟따야."

「다난자니경(『중부』 97)」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윤회를 끝낼 수도 있는 사람이 열등한 범천에 태어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한 예로서 주목할만하다. 때로는 「삼명경(Tevijja Sutta)」에서처럼 부처님께서도 범천까지만 이끌어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다난자니의 경우, 그가 더 높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아셨던 반면, 사리뿟따는 중생의 근기를 알아보는 부처님의 혜안을 갖지 못해서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 결과, 다난자니는 범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고 해탈을 이루려면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태어나야만 했을 것이다.

찬나 장로가 앓아누워 심하게 고통받고 있을 때에 사리뿟따 존자가 마하쭌다 장로와 함께 그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사리뿟따는 필요한 약과 음식을 찾아 나서겠다고 했으나 찬나는 이미 죽을 결심을 했으니 그만 두라고 했다. 그런 결심을 거두라고 그에게 간청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없었고, 그들이 떠나고 난 뒤 찬나는 칼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찬나 장로는 잘못이 없노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죽어가는 동안 아라한과를 이루어 구경열반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찬노와다:찬나 훈계경(『중부』 144)」에 나온다.

아나타삔디까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께 자비심을 베풀어 자기를 찾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즉시 아난다와 함께 찾아온 사리뿟따는 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염리(厭離)에 대하여 감동적인 법문을 설해주었다(『중부』143). 조건지어진 세계의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하고 육근, 육경, 육식, 육촉, 육수(六受),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는 내용의 법문이었다. 이 심오한 설법에 감동되어 아나타삔디까는 눈물을 흘리며 이에 견줄만한 법문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이 법문을 듣고 얼마 후 아나타삔디까는 죽어서 도솔천에 다시 태어났다. 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어느날 밤 새로 천신이 된 아나타삔디까가 천신의 모습으로 기원정사를 방문하여 세존 앞에서 상수제자 사리뿟따를 칭송하는 게송을 읊었다.

지혜와 계행과 마음의 평화를

진정 사리뿟따는 갖추었도다.

아무리 빼어난 비구라도

그를 능가할 수 없으리.

다음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이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방문객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러자 아난다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 천신은 틀림없이 아나타삔디까일 것입니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에 대한 믿음이 돈독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의 추측이 맞다고 하셨다.

법으로 도움을 베풀 때에도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듯 감동적이었다. 그는 훌륭한 인도자이며 정신적으로도 탁월한 조언자였다. 사람을 이끄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을 예리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으며 그들에게 따뜻하고 동정어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지도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크게 고무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리뿟따는 자신이 지도하고 있는 비구들을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보살펴주며 다정한 훈계로 자제심을 길러주었다. 또 비구들이 정진을 잘 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해 주는 것을 보아도 그가 스승으로서 완벽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도반의 자질 또한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작게든 크게든 어떻게든 늘 도움을 베풀곤 했다. 스스로 성스러운 삶의 계행을 구족하고 있기에 남들의 계행이 구족되어 있는지도 바로 알 수 있었고, 덕성이 잠재해 있는 경우 그 성품을 계발하는데 능숙했으며, 계행이 완성된 경우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칭찬해 주었다. 정녕 그의 완벽한 성품은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섬세하고도 다정다감한 자질이 고양된 정신 속으로 넉넉하게 녹아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냄이 없는 이

 

『법구경』 주석서(389-90)에는 이 상수제자의 또 다른 탁월한 성품이라 할 참을성과 너그러움을 잘 드러내주는 일화가 있다. 부처님께서 머물고 계시던 기원정사 근처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존자께서는 참을성이 많으셔서 누가 모욕하고 때리더라도 도무지 화낼 줄을 모르신다." 하면서 사리뿟따의 훌륭한 성품을 칭송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브라만이 불쑥 끼여들었다.

"그렇게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바로 우리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그야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가 않습니다, 브라만이여."

"그렇다면 내가 그에게 시비를 걸어 화를 내게 해보겠소."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오!"

"내게 맡겨보시오. 다 하는 수가 있지."

사리뿟따 존자가 탁발을 하러 그곳을 지날 때 그 브라만은 뒤로 다가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등을 내리쳤다. "이게 뭐지" 하면서도 사리뿟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브라만은 온통 죄책감에 사로잡혀 장로의 발아래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리뿟따 장로는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의 참을성을 시험해 보려고 제가 당신 등을 때렸습니다." 브라만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랬나요? 뭐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존자시여, 용서하시는 뜻으로 저희 집에 오셔서 공양을 받아주십시오."

사리뿟따가 이를 말없이 받아들이자 브라만은 그의 발우를 받아들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공양을 올렸다.

그러나 사리뿟따를 때리는 광경을 보았던 사람들은 몹시 흥분했다. 그들은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그 브라만을 죽이기라도 할 듯이 그 집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사리뿟따가 발우를 든 브라만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이 소리쳤다.

"존자시여, 저 브라만을 우리 손에 넘겨 주십시오."

"왜들 그러십니까?"

"저자가 존자님을 때리지 않았습니까. 혼을 내주려고 합니다!"

"혼을 내다니요? 저 사람이 여러분을 때렸습니까, 나를 때렸습니까?"

"물론 존자님이지요."

"그 일에 대해서라면 저 사람은 벌써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니 가서 일들 보시지요."

이렇게 사람들을 흩어보내고 그 브라만도 집으로 보낸 후에 사리뿟따 존자는  조용히 사원으로 돌아갔다.

사리뿟따 존자는 참을성도 대단했지만 겸손하기로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 어떤 지적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이곤 했다. 「수시마경(『상응부』 2:29)」 주석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번은 존자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속옷 한 자락이 밖으로 조금 삐져 나왔는데 일곱 살짜리 사미가 그것을 보고 존자에게 말씀드리자, 존자는 잠시 비켜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사미에게 합장을 하고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고쳐 입었습니다, 스승이시여!"7)

이 일과 관련된 이야기가 『밀린다왕문경』에도 나오는데, 사리뿟따가 다음 게송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일곱 살 어린이라 해도

나보다 나아 가르침을 준다면 머리 숙여 받아들이리.

그 앞에 나는 정성과 존경을 표하노니,

언제나 스승의 자리에 모셔도 좋으리.

― 『밀린다왕문경』, 397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해주었던 앗사지 존자에 대해 그가 평생 존경심을 지녔던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와 숫따(『숫따니빠따』 주석서)와 『법구경』(392)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는 앗사지 존자와 같은 사원에 머무르게 될 때면 언제나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고 난 다음 곧바로 앗사지 존자에게 경배를 드리러 가곤 했다. "이 분이 나의 첫 번째 스승이시다. 내가 부처님의 교법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분을 통해서였다." 앗사지 장로가 다른 사원에 있을 때에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하여 오체투지를 하고 두 손을 합장하며 예를 올렸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사리뿟따의 이런 행동을 보고 다른 비구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수제자가 되고 나서도 천상계에 경배를 올리다니! 아직도 브라만의 견해를 버리지 못했구나." 이런 험담을 들으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렇지 않다. 사리뿟따는 천상계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법을 접하게 해 준 분을 스승으로 받들어 예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사리뿟따는 스승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는 사람이니라."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나와 숫따8)」를 설하신 것이 바로 그때였다.

천신들이 인드라를 경배하듯

사람은 법의 길로 이끌어준 분을

경배해야 하느니라.

은혜를 소중히 하는 사리뿟따 존자의 성품에 관한 일화가 라다 장로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법구경』(76) 주석서를 보면 라다는 사왓티에 있는 기원정사에 머물고 있던 가난한 브라만이었다. 그는 잡초를 뽑거나 청소를 하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하던 불목하니였다. 그런데 그가 계를 받도록 이끄는 비구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세존께서 혜안으로 세상을 널리 살피시다가 이 브라만이 장차 아라한이 될만한 그릇임을 보셨다. 세존께서는 모여있는 비구들에게 그에 대해 알아보시며 그들 중 누군가가 이 가난한 브라만으로부터 도움 받은 적이 없는지 물으셨다. 사리뿟따는 언젠가 라자가하에서 탁발하러 가던 자신에게 이 가난한 브라만이 구걸해 온 음식을 한 국자 가득 준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이 사람에게 계를 주라 하셨고 사리뿟따는 세존의 말씀에 따라 그렇게 했다. 그리고나서 사리뿟따는 수계자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해 그에게 몇 번이고 가르쳐 주었다. 라다는 항상 그의 가르침을 기쁜 마음으로 공손히 받아들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과를 성취했다. 이 일을 본 비구들은 은혜를 잊지 않는 사리뿟따의 마음을 칭송하면서, 남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그러한 상좌를 두게 되는 법이라고 말들을 했다. 이에 대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뿟따는 그때뿐만 아니라 그전에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잊지 않고 감사를 표시했다고 하셨다. 이와 관련해서 세존께서는 「알리나�따 전생담(본생경 156)」을 설하셨다. 여기에서는 사리뿟따가 코끼리였는데, 그의 상처를 치료해 준 목수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일이 있다.

사리뿟따 존자의 참을성과 겸손함은 그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기원정사에 머물 때 일이었다. 우안거가 끝나자 존자는 세존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자신의 시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다. 많은 비구들이 사리뿟따에게 하직인사를 드렸다. 사리뿟따는 하나하나 성과 이름을 불러주며 그들을 떠나보냈다. 그 중에는 존자가 성도 이름도 모르는 비구가 한 명 있었다. 그 비구는 작별하면서 상수제자가 자기 성과 이름을 불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대중 가운데 자기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하자 그는 몹시 섭섭했다. '나한테는 다른 비구들에게 하듯이 자상하게 인사해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사리뿟따에 대해 악의를 품게 되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존자의 옷자락이 자기 귀를 스치게 되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그는 부처님께 다가가 이렇게 모함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는 분명히 '나는 상수제자다'라고 으스대며 귀가 먹을 정도로 저를 쳤습니다. 그래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를 부르셨다. 그러는 사이에 마하목갈라나와 아난다는 이 중상모략을 알고 대중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스님네들, 이리 오십시오! 사리뿟따 존자가 세존을 친견하게 되면 사자후를 터뜨릴 것입니다."

세존께서 존자에게 물으시자 그는 혐의를 부정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세존이시여, 몸을 관하는 마음챙김이 확고히 서있지 못한 사람은 도반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용서를 빌지 않은 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리뿟따의 사자후가 이어졌다. 그는 분노와 증오에 매이지 않는 자신의 자유로움을 깨끗하건 더럽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대지의 참을성에 비유했다. 또 자기 마음의 평온을 뿔 잘린 황소에, 버림받은 천민 출신 젊은이에, 물에, 불에, 바람에, 그리고 염오의 제거에 비유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염오(厭惡)를 뱀이나 시체에서 느끼는 혐오감에 비유했으며 자기 육신이 유지되는 것을 기름진 혹덩어리가 유지되는 것에 비유했다. 그가 이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신의 참마음을 드러내자 대지는 아홉 번 진동하여 이 진리의 말씀에 화답하였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사자후에 감동되었다.

사리뿟따가 자신의 참마음을 밝히자 부당하게 그를 모함했던 비구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그는 곧바로 세존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가 모함한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쳤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이 미망에 빠진 자를 용서해주어라. 그러지 않으면 그의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져버릴 것이다." 사리뿟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스님을 기꺼이 용서합니다." 그리고 합장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라도 이 스님을 편치 않게 했다면 이분도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화해하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비구들은 탄복을 하였다. "우리 장로님 참으로 훌륭하시군요! 자신을 거짓으로 비방하는 사람에게조차 아무 노여움도 미움도 품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앞에 정중히 몸을 숙여 합장하고 용서를 구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 같은 사람이 노여움이나 미움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리뿟따의 마음은 대지와 같고,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고, 깊고 잔잔한 연못물과도 같다." 그리고 나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인욕은 대지와 같이 흔들림 없고

뜻은 일주문 기둥처럼 든든하며

마음은 깊고 잔잔한 연못처럼 맑으니

이런 이에게 다시 태어남은 없도다.

― 『법구경』 95

이와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함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기에 불행한 결말을 맺고 만다. 한번은 꼬깔리까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두 상수제자를 모함한 적이 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못된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악한 야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꼬깔리까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자애와 믿음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대하여라! 그 두 사람은 모든 행동이 훌륭하고 칭찬할만하다!"

하지만 미혹에 빠져있던 꼬깔리까에게는 부처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근거없는 모함을 계속했고 이내 온몸이 종기로 뒤덮였다. 결국 그 병이 심해져 죽자 지옥에 떨어졌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상응부』(6:10), 『숫따니빠따』 대품(10), 『증지부』(10:89),「딱까리야 전생담(『본생경』 481)」등에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일화를 보면 '참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사리뿟따나 목갈라나는 꼬깔리까의 모함에 아무런 나쁜 마음이 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설사 꼬깔리까가 용서를 빌었다 해도 이 두 상수제자의 태도는 여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꼬깔리까 자신은 참회를 했더라면 스스로에게 참으로 이로운 일이 되어 악업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고한 사람에게 악업을 지으면 나쁜 과보를 거두기 마련이다. 꼬깔리까도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스스로 과보를 받은 것이다.

 

친구와 친척들

 

사리뿟따 존자는 감사하는 마음과 친절, 남을 돕는 마음과 참을성 같은 훌륭한 성품 덕분에 출가자로서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깊은 교우관계를 많이 맺을 수 있었다. 그 중에 목갈라나와는 젊었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리뿟따가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의 주석서를 보면 사리뿟따가 아난다와도 깊은 우의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로서는 '스승님을 시봉하는 일은 나의 의무인데도 아난다가 애쓰고 있구나'하며 고마워했고, 아난다로서는 부처님께서 사리뿟따를 상수제자로 삼으셨기에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 아난다는 자신이 사미계를 주었던 어린 제자들을 나중에 사리뿟따에게 보내어 구족계를 받도록 하는 일이 많았다. 사리뿟따 또한 아난다에게 그렇게 했고, 그리하여 이 두 사람에게는 5백 명의 공동제자가 있었다.

아난다는 아주 좋은 가사나 공양물을 받게되면 사리뿟따에게 갖다주었고 사리뿟따 역시 특별한 공양물을 받으면 아난다에게 주곤 했다. 한번은 아난다가 어떤 브라만에게서 아주 값진 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세존의 허락을 받고 사리뿟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열흘 동안이나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석서를 해설한 복주(復註)에서 이러한 관계에 대해 훗날 논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난다는 아직 아라한과를 이루지 못했으니 그런 애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이해되지만 번뇌를 다 끊은 아라한이었던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이에 대해 '사리뿟따가 보이는 정은 세속적 애착이 아니라 아난다의 공덕을 아끼는 마음이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이렇게 물으신 적이 있었다. "너도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느냐?" 아난다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미숙하고 타락하고 우매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사리뿟따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리뿟따는 현자입니다. 사리뿟따는 위대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드넓은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빛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민첩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예리한 지혜를 가졌습니다. 사리뿟따는 통찰하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는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해 합니다. 그는 홀로 있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다니기를 내켜하지 않습니다. 그는 불굴의 정진력이 있고, 그의 말은 심금을 울립니다. 그는 남의 말에 기꺼이 귀기울이고, 사악한 것을 경책하는 훈도자(薰陶者,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는 분)입니다." (『상응부』 2:29)

『장로게』(1034 이하)에서 아난다는 사리뿟따가 죽었을 때 "고귀한 도반인 사리뿟따가 떠나니 세상이 온통 캄캄하구나."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도반이 떠나고 세존께서도 열반에 드신 후, 자신에게 남은 벗이란 몸에 대한 마음챙김밖에는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사리뿟따의 죽음을 전해들은 아난다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는 「쭌다경」에도 아주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사리뿟따는 말 그대로 진정한 의미의 친구였다. 그는 남의 장점을 어떻게 계발해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참다운 친구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처럼, 그는 때로 직언과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아누룻다 존자가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이 사리뿟따 존자의 솔직한 비판이었다고 『증지부』(3: 128)에 나와 있다.

어느 날 아누룻다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갔다. 예를 갖추어 인사를 나눈 후 앉아서 사리뿟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벗이여, 나는 인간의 육안을 초월하여 청정해진 천안으로 일천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정진력은 굳건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챙김은 늘 오롯하여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나의 육신은 경안(輕安)하여 고요합니다. 나의 마음은 삼매에 들어 한 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대답하였다.

"벗이여, 당신의 천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자만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정진력이 굳건하고, 당신의 마음챙김이 오롯하고, 당신의 육신이 고요하고, 당신의 마음이 삼매에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들떠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근심이 있다는 뜻입니다.9) 당신이 자만과 들뜸과 근심의 세 가지 마음상태를 버려서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불사의 경지에 뜻을 모은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일입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사리뿟따의 충고를 받아들인 후 오래지 않아 번뇌의 소멸을 이루었다.

사리뿟따에게 조언을 구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을 보면, 도반들에게 그가 늘 힘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마하고싱가경(『중부』 32)」에 나오는 일화를 보면, 기질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그 말씀과 인품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마하목갈라나, 마하깟사빠, 아누룻다, 레와따, 아난다 이렇게 다섯 분이 사리뿟따에게 법문을 들으러 갔다. 사리뿟따가 그들을 반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달빛은 환하고 사라수 나무는 꽃이 만발하였으니 천상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런 고싱가 사라수 숲을 더욱 빛나게 할 스님은 어떤 분일까요?"

다른 네 분의 스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각자 기질에 따라 대답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사리뿟따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자기 마음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아침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낮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재상의 옷장이 색색의 의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왕이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옷을 입고 싶으면 그때그때 그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여 자신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는 스님과 같습니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에 어떤 주처나 경지에 들고자 하면, 그는 곧바로 거기에 들 수 있습니다. 목갈라나여, 이런 스님이 이 고싱가 사라수 숲을 빛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부처님께로 가서 자신들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그들의 대답을 모두 수긍하신 다음 당신의 말씀을 해주셨다.

이 이야기를 보면 사리뿟따가 뛰어난 지성을 지녔고 승가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독단적인 성향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우러나는 사색의 분위기를 도반들에게 몸소 표현해 보임으로써 그들도 직접 자기 생각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고무해줄 수 있었다. 그는 감성이 섬세하여 스스로 자연 경관에 감응을 잘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반들로부터도 그러한 감응을 이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사리뿟따는 다른 많은 스님들과도 대화를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목갈라나, 아난다, 아누룻다뿐만 아니라, 마하꼬티따, 우빠와나, 사밋디, 사윗타, 부미자 등이 그들이다. 또 사리뿟따는 깨달음을 얻은 분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특히 세존께서 칭찬하셨던 분들은 꼭 만났다.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도 그 중 한 분이었는데, 부처님이 대중 앞에서 그를 칭찬하시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뿐나가 그 지방에 왔다는 것을 알고 사리뿟따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에게로 찾아가 청정에 이르는 여러 단계와 열반의 관계에 대하여 심오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가 뿐나에게 했던 질문에서 저 유명한 「라타위니따경(『중부』 24; 역마차 비유경)」이 유래하게 되었다. 이 경에 제시되어 있는 불교의 여러 수행단계들은 후대 아짜리야 붓다고사(佛音尊者)가 쓴 기념비적 논서인 『청정도론(Visuddhimagga)』의 근간이 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에게 하신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보아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많은 부처님의 말씀이 "법장"으로 불린 사리뿟따에게 설하셨던 것이었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한번은 사리뿟따가 부처님께 다가가 이전에 세존께서 아난다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였다. "고귀한 교우관계, 고귀한 도반관계, 고귀한 인간관계. 이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입니다."(『상응부』 45:2) 이 상수제자의 생애가 바로 이런 가르침을 가장 잘 구현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사리뿟따는 라자가하 근처에 있는 우빠띠사 마을의 어느 브라만 가문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와간따이고, 어머니는 루빠사리였다. 사리뿟따가 그의 아버지와 같이 지낸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남자 형제로 쭌다, 우빠세나, 레와따 셋이 있었고, 누이로는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셋이 있었다. 이 여섯 남매가 모두 승단에 들어 계를 받고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쭌다는 비구가 된 후에도 승가에서 사미를 뜻하는 사마눗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마하쭌다 장로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뿟따의 임종시에 그를 시봉한 것이 쭌다였고, 상수제자의 유물을 가지고 부처님께 가서 그의 죽음을 알린 것도 그였다. 이것은 「쭌다경」에 있는 이야기로서 내용은 이 책의 후반부에 나와있다.

사리의 아들이 사리뿟따이듯이 우빠세나는 와간따의 아들을 뜻하는 와간따뿟따로도 알려져 있다. 우빠세나의 몸가짐은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육처상응경(『상응부』 35:69)」에 의하면 그는 뱀에 물려 죽었다. 레와따는 형제들 중에 막내였다. 어머니는 막내가 계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그가 아주 어렸을 때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결혼식 날 그는 늙어서 추해진 120살이나 된 신부의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세속적인 삶에 역겨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핑계를 대고 결혼식 도중에 빠져 나와 사원으로 도망쳐 가서 계를 받았다. 훗날 부처님을 뵈러 가는 도중에 어느 아카시아 숲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우기를 지내는 동안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후에 그는 아카시아 숲의 레와따라는 뜻의 레와따 카디라와니야로 알려지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숲 속 수행자들 중의 으뜸으로 치셨다.

오빠의 뒤를 따르고자 했던 짤라, 우빠짤라, 시수빠짤라 세 자매는 결혼한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그녀들은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씩 두었는데, 각기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짤라 혹은 짤리, 우빠짤라, 시수빠짤라로 불리웠다. 이들 세 자매의 아들 셋도 외삼촌인 레와따 카디라와니야의 사미가 되어 계를 받았으며, 『장로게』(42)의 주석서에 의하면 사리뿟따가 그들의 선행을 칭찬한 바 있다. 세 자매가 비구니가 되었을 때에 마라가 나타나 그들을 조롱하고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훌륭히 대처했는지는 「비구니상응경」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사리뿟따의 어머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내내 증오심을 품어왔던 고집 센 브라만이었다. 『법구경』(400)의 주석서에 보면 사리뿟따 존자가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고향 마을에 와있을 때 탁발하는 길에 어머니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음식을 주면서도 "남이 먹던 찌꺼기나 얻어먹는 것아!"라고 욕설을 내뱉었다. "쉰 쌀겨죽 찌꺼기도 못 얻어먹는 날이면, 이집 저집 찾아다니며 주걱에 묻은 찌꺼기나 핥아먹어라. 80 크로어나 되는 재산을 버리고 중이 된 것이 겨우 이 꼴 보자고 한 짓이었니! 네가 내 신세도 망쳤다. , 어서 먹어라!"

사리뿟따를 따라온 다른 스님들에게 음식을 주면서도 "! 당신들이 바로 내 아들을 종으로 부리는 작자들이로구나! 그래 어서 드시오!"

이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으나 사리뿟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리뿟따는 음식을 받아서 먹고는 소리 없이 사원으로 돌아왔다. 부처님께서는 그때 사리뿟따와 함께 있었던 아들 라훌라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비구들은 사리뿟따가 어떻게 그 일을 다 견뎌냈을까 놀라워했으며, 부처님께서는 회중 앞에서 다음의 게송을 읊으시며 그를 칭찬하셨다.

그는 성내지 않고, 수행에 근실하고,

계행에 덕이 높고, 욕망에서 벗어났으며,

감관을 잘 다스려, 태어남이 마지막이 되었다.

나는 그를 브라만이라 부른다. (『법구경』 400)

사리뿟따는 자기가 죽을 즈음에 이르러서야 어머니를 귀의시킬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거니와 위의 일화는 사리뿟따 장로가 얼마나 겸손하고 너그럽고 참을성이 있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명상수행자

 

보디삿따(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부처님)는 깨달음의 길을 찾아 출가했을 때, 처음에는 당대에 빼어난 명상가로 알려진 두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무색정(無色定)에서 가장 높은 두 단계인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을 증득하셨다(『중부』 26). 사리뿟따는 이와는 달리 처음에 자신의 성향으로 인해 자기나름의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는 초의식 영역에 숙달된 분의 문하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변과 지적 분석에 탁월한 분의 문하로 들어갔었다. 또한 그가 법에 들어설 때도 명상삼매[]의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과의 그물망으로 조건지어진 모든 현상과 그것을 뛰어넘어 조건지어지지 않은 상태에 대한 자발적이고 직입적인 통찰[]을 통해서였다. 그러한 사리뿟따였지만 일단 부처님의 제자가 되자 곧바로 명상삼매의 모든 단계를 통달하였고 이런 명상의 체험을 바탕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였던 것이다.

사리뿟따가 예류과에서 아라한과로 향상해가는 과정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아누빠다경(『중부』 111)」에서 여러 가지 깨우쳐주는 말씀을 해주신다. 세존께서는 사리뿟따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두 주 동안 용맹정진하며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대로 하나 하나 통찰해 나아갔다."고 밝히셨다. 사리뿟따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의 사선정과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의 무색정, 그리고 인식과 느낌이 그치는 상수멸의 아홉 단계 선정을 순차적으로 증득하였다. 그는 내관법을 통해 알아차리기에는 너무도 미묘한 마지막 두 단계를 제외하고 선정의 단계마다 그 구성요소를 하나 하나 파악하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서 지속되다가 스러지는지를 관하였다. 그는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고, 의존하지 않고, 초연하고, 자유롭고, 독립하여 모든 장애를 다 끊은 마음으로' 머물다가 더 높은 단계의 선정을 닦은 후 종국에는 인식과 느낌이 그치는 상수멸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사리뿟따가 실제로 아라한과를 증득했던 것은 그의 조카 디가나카 유행승(流行僧)에게 설법하고 계신 세존의 뒤에 서서 부채질을 해드리고 있던 도중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부처님 법문의 주제는 느낌을 파악하는데 관한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육신의 성질을 설명하시며 디가나카에게 욕망과 애착과 육신에 대한 걱정이 끊어질 수 있도록 몸을 관하라고 이르셨다. 이어서 세존께서는 느낌을 관하는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모든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지어졌으며, 반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해체되고, 스러지고, 사라지고, 끝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사리뿟따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세존께서는 이런 것들을 직입적인 앎을 통해서 버리라고 말씀하시는구나. 그 분은 이런 것들을 직입적인 앎을 통해서 떨쳐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순간, 문득 궁극의 지혜가 일어나 마음은 애착에서 벗어나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리뿟따는 『장로게』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세존이시며 깨달은 분이신 정등각자께서는

다른 이에게 설법하고 계셨다.

법을 설하시는 동안

나는 구극의 가르침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귀기울였다.

나의 귀기울임이 헛되지 않았으니

나는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도다.

― 『장로게』 995-996)

사리뿟따는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단연 으뜸이었으나 아라한에게 흔히 따라오는 비상한 지력과 신통력을 얻으려고 다른 비구들처럼 애쓰지 않았다. 『장로게』에서 친구 목갈라나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는 다섯 가지 신통력에 대해 그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게송의 주석서는 사리뿟따가 신통력을 얻겠다는 서원을 세운 적은 없으나 상수제자라면 응당 갖추어야 하는 아라한과를 증득함과 동시에 그 능력이 '저절로' 생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무애해도(Pa.tisambhidaamagga)(2:212)에 나오는 「신통력에 관한 장」에도 사리뿟따가 '삼매에 의한 조정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 힘은 어떤 정상적 생리 과정이나 자연 현상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감흥어(Udaana)(4:4)에는 이러한 능력의 신빙성을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은 사리뿟따가 까뽀따깐다라에서 목갈라나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새로 깨끗이 삭발하고 보름 달밤에 밖에서 선정에 들어 있었다. 그때 어떤 고약한 악귀 하나가 그 위로 지나가다가 잔뜩 심술이 나서 내려와 존자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아주 깊은 선정에 들어있던 그는 아픈 줄을 몰랐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그것을 보고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와 물었다. "벗이여, 별일 없소?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소?"

"난 별일 없소, 목갈라나여, 괜찮긴 한데 머리가 좀 아프군요." 사리뿟따가 대답했다.

목갈라나가 말했다. "참으로 놀랍군요, 사리뿟따여! 정말 훌륭하오! 그대의 신통력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하오! 방금 악귀 하나가 그대의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오. 그 정도 힘이라면 코끼리도 쓰러뜨리고 산봉우리도 부수어 버렸을 거요. 그러나 사리뿟따 당신은 '난 별일 없소, 목갈라나여, 괜찮긴 한데 머리가 좀 아프군요.'라고 말할 뿐이구려."

그때 사리뿟따가 대답했다. "참으로 놀랍소, 목갈라나여! 정말 훌륭하오! 그대의 신통력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하오! 나는 못난 귀신 하나 못 보는데 무슨 악귀든 다 볼 수 있다니."

그러는 동안 세존께서는 천이(天耳)의 신통력으로 두 스님 사이의 대화를 들으시고 사리뿟따를 칭찬하는 '감흥된 말씀'을 하셨다.

그 마음이 바위처럼 흔들림 없고

애착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화가 날 일에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렇게 마음이 다스려진 이에게

어찌 고통이 올 수 있으리!

가장 높은 목표에 확고히 다다르자, 사리뿟따에게 선정이란 더 높은 성취를 향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사리뿟따 상응」을 보면 아난다가 사리뿟따에게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여러 차례 물으니, 사리뿟따는 여러 단계의 선정에 들며 하루를 보낸다고 대답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단계에서건 ''라는 개념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에게는 '나는 선정에 들어가고 있다거나 나는 선정에 들어있다거나 나는 선정에서 나오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소."라고 말하고 있다(『상응부』 28: 1-9).

또 한 번은 아난다에게 온갖 익숙한 대상에 대해 생겨나는 식()을 일으키지 않는 특별한 선정상태에 어떻게 들 수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지·수·화·풍도, 수·상·행·식도, 이 세상에 관련된 모든 것과 이 세상 너머의 모든 것, 그 어떤 것을 대하여도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지 않더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전혀 아무런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열반은 생성과정[]의 완전한 그침'이라는 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인식이라고 했다(『증지부』 10:7).

이 심오한 경지는 바로 사리뿟따가 계속 수행해온 명상의 '공주처(空住處)'를 일컫는 것 같다. 「삔다빠따빠리숫디경(『중부』 151)」을 보면, 한 번은 부처님께서 사리뿟따의 모습이 유난히 맑고 밝은 것을 보시고 어떻게 그런 광휘를 지니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리뿟따는 공주처를 자주 수행하노라고 말씀드린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대장부가 머물 자리라고 하시며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10) 주석서에서는 열반의 공() 측면에 집중함으로써 들게 되는 아라한과의 경지와 이 공주처를 같은 것으로 본다. 마하깟사빠 존자의 다음 게송에서도 드러나듯, 사리뿟따가 이 경지에 들어있을 때면 가장 높은 천상의 신들까지도 그를 경배하러 지상으로 내려왔었다고 한다.

힘있고 영광에 빛나는 수많은 천신들

범천 반열의 수만 천신들이

삼매에 들어있는 위대한 명상가

지혜로운 법장 사리뿟따에게

경배하려고 합장하고 서있네.

"경배드립니다, 오 더없이 빼어난 분이시여

경배드립니다, 오 지고한 분이시여

당신이 들어 머물고 계신 선정의 경지

그것이 어떠한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 『장로게』 1082-84

사리뿟따는 선정 삼매[]에 아주 능숙했는데, 이는 내관 명상[]을 통해 단련된 철저하고도 정확한 분석 능력과 잘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그는 부처님의 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대지혜자였으며 지혜를 쓰는데 있어서도 그보다 나은 분은 오직 세존뿐이었다. 사리뿟따의 지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그의 자유자재한 사무애해(四無碍解)로서, 이것은 그가 수계한 직후 두 주 동안에 이루어낸 것이었다.

벗들이여, 내가 의()무애해와 법()무애해, ()무애해 그리고 변()무애해를 하나도 빠짐 없고 빈틈없이얻어낸 것은 수계한 후 보름 동안이었습니다. 나는 이 사무애해를 여러 방식으로 설명하였고, 가르치고 알렸으며,확립하여 드러내었고, 말하여 밝혔습니다. 누구든 의심이나거나 불확실한 점을 내게 물으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이미 이 경지를 모두 통달하신 스승님도 여기 계십니다.

― 『증지부』 4:170

첫째, 의무애해는 교설의 요의, 즉 교설의 함축된 의미와 거기서 파생된 의미에 대한 분명한 직관력과 특정한 원인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한 분명한 직관력을 말한다. 둘째, 법무애해는 교설 자체에 대한 개별적인 통찰과 불법의 총체적 구조 속에서 그 교설이 지니는 상호연관성에 대해 통찰을 길러줄 뿐만 아니라, 어떤 결과를 낳는 원인에 대해서도 통찰력을 갖게 해준다. 셋째, 사무애해는 언어와 문법과 어원을 능숙하게 이해하는 역량을 말한다. 넷째, 변무애해는 법을 설할 때에 다른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위의 세 가지 지혜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사리뿟따는 이상의 사무애해를 갖춤으로써 몸소 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법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데도 아주 뛰어났다. 그가 모든 면에서 그토록 다재다능하였기에, 부처님께서는 「아누빠다경(『중부』 111)」의 끝 부분에서 그를 가리켜 당신의 참다운 정신적 아들이요 법륜을 굴리는 일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보조자라고 말씀하신다.

고귀한 계행과 고귀한 삼매와 고귀한 지혜와 고귀한 해탈을 모두 통달하여 완성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다면, 이는 마땅히 사리뿟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래의 참된 아들이 누구인지 찾는다면, 또 여래의 말씀에서 났고, 법에서 났으며, 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세간적 이익이 아닌 법을 상속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다면, 이는 마땅히 사리뿟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여래가 법륜을 굴렸던 것과 똑같이 여래를 좇아 수승한 법륜을 올바로 굴리는 자이다.

 

 

법륜을 굴리는 이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과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버금가는 폭넓고 다양한 교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리뿟따는 무궁무진한 불법의 소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해주는 독특한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지적으로 자극을 주고 실제적인 정진에도 영감을 불어넣는 그런 방법이었다. 상좌부 불교 전통에서는, 큰 중요성을 지닌 많은 경전을 지은 사람이 바로 사리뿟따라고 여기고 있으며, 비중 있는 삼대 주석서도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또 아비담마[論藏]의 결정판을 편집하는 데에도 그가 몸소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그의 업적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 가지 경

 

법을 설하는 자로서 사리뿟따가 가졌던 능력은 무엇보다도 『중부』에 있는 고전적인 두 편의 경,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중부』 28)」과 「정견(正見)(『중부』 9)」에 잘 드러나고 있다.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은 정연한 논리적 구성을 갖춘 걸작이다.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성제는 모든 선법(善法)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사리뿟따는 먼저 표명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세부적 분석을 위해 사성제 중의 고제(苦諦)를 택하여 개아(個我)의 구성 요소가 오온(五蘊)임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는 물질적 형체,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력, 의식[色受想行識]의 오온을 열거하고나서, 더욱 면밀하게 살피기 위하여 그 중에서 물질적 형체의 요소[色蘊]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는 이 색온을 다시, 네 가지 주요 요소[四大: 地水火風]와 그러한 사대로부터 형체를 갖추어 파생된 부차적 물질의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각각의 요소들이 안으로는 우리 자신의 몸을, 밖으로는 외부 세계를 번갈아 드나들며 모습을 드러낸다고 밝히고 있다. 내적 요소에 속하는 신체 부위와 기능을 열거하면서, 이런 내적 요소[人我]건 외적 요소[法我]건 그 모두가 결코 자아에 속하지도 않거니와 자아를 구성하지도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 요소들에 대해 이렇게 관함으로써 우리는 요소들에 미혹되지 않을 수 있으며 육신에 대한 집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사리뿟따는 제아무리 거대한 외적 요소라 할지라도 자연의 엄청난 지각변동에 의해 결국은 파괴되고 말 운명이라는 것을 말하며 일체가 무상함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갈애의 산물인 이 작은 몸뚱이를 '' '내 것'이니 하고 여기는 미혹에 결코 다시는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제법(諸法)을 이렇게 관할 수 있는 수행자라면 설혹 남에게서 욕설이나 험담이나 매질을 당하여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평온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속에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귀와 소리의 접촉에 의해 일어난 것이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조건지어진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차린다. 그는 또한 그러한 모욕적인 경험의 모든 요소들, 즉 촉과 수상행식 따위는 모두 무상한 것임을 알아차린다. 여기에서 사리뿟따는 명상 수행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총체적 경험을 다섯 가지의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요소들[五蘊]로 분석해낼 수 있도록 자아의 정신적 구성 요소인 색을 제외한 자아의 네 정신적 요소[受想行識]를 유기적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면 그의 마음은 오로지 그 요소만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마침내 기운차게 되고 즐거워지고 굳건해지고 집중되어서, 만일에 매를 맞아 다치게 된다해도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치게 마련인 속성을 본디부터 지닌 물건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존께서 설하신 「까까쭈빠마경(톱의 비유경, 『중부』 21)」을 떠올리며, 자기 생명마저도 돌보지 않고 인욕심으로 모든 고난을 견디어내라는 부처님의 훈계를 따르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수행자가 불법승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데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없다면, 절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삼보(三寶)를 염하는 데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말을 잇고 있다. 반면에, 끈질긴 마음을 참을성 있게 지켜나갈 수 있는 수행자라면 그는 무량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 수행자는 많은 것을 이룬 셈이다."라고 말한다.

사리뿟따는 사대(四大)의 다른 세 가지 요소[水火風]에 대해서도 똑같은 분석 방법을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나서 우리의 육신과 신체 부분을 벽돌과 목재와 기와 따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구성요소를 떼어놓고는 독자성을 갖지 못하는 한 채의 집에다가 비유하고 있다. 또 이 경의 끝 부분에서는 우리의 의식이 여섯 감각기관을 통하여 조건지어진 채 발생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섯 가지 감각의식의 발생에 기본적 조건이 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도 사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다른 부차적 물질도 물질적 형체의 요소[色蘊]에 포함시킴으로써 색온에 대한 분석을 끝맺고 있다. 어떤 감각대상과 감각기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각각의 의식[識蘊]은 그에 관계된 느낌[受蘊]과 인식[想蘊]과 다양한 의지적 형성력[行蘊]을 수반함으로써 오온이 모두 상호관련되게 된다. 사리뿟따는 오온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다[緣而生]는 점을 밝히면서,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며,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보노라."라는 세존의 말씀을 인용하여 연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오온에 관련된 욕망과 습성과 집착은 고()의 원인이다. 욕망과 습성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은 고의 소멸이다. 그는 이 점을 이해한 수행자에 대하여 "이 정도까지만 해도 그 수행자는 많은 것을 이룬 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성제에 대한 설명을 마무르고 있다. 참으로 이 경은 숭고하고 장엄한 화음으로 끝을 맺고 있는 아름답게 어우러진 한 편의 명곡과도 같다.

사리뿟따의 또 다른 대표적인 경은 「정견(正見)경」으로서 이것은 교화방법론의 걸작이다. 이 경은 그 방대한 주석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한층 깊이 있고 자세한 설명을 위한 골격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다. 주석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오부(五部)에 결집된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사성제가 32번이나 언급되고 아라한과가 32번이나 언급된 경은 이 「정견경」 말고는 없다." 사리뿟따는 이 경 속에 연기법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약간의 변용을 취하면서도 내용상 본받을 점이 대단히 많다. 그는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의 근본원인, 음식과 감각과 의지와 의식의 네 가지 자양분, 그리고 연기법의 열두 고리들을 모두 사성제를 예증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또 각각의 항목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명해주고 있다. 그 결과 사성제를 보는 시각이 크게 고양되고 확장되고 심화되는 것이다. 이 경은 수세기에 걸쳐 오늘날까지 많은 불교 국가에서 교화의 목적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사리뿟따의 또다른 경은 '적정심에 든 천신들'에게 설해졌다고 하는 「사마�따 숫따」(『증지부』 2:35)」로서, 이 또한 아주 높이 숭상되어 오고 있다. 이 경은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의 세 가지 성과(聖果)를 얻은 수행자들이 더 받아야 할 재생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들이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 중의 어느 곳에 다시 날 것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경은 비록 아주 짧게 설해졌지만, 법을 들으려고 모여든 무수한 천신의 무리에게 엄청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때 무리 가운데 아라한과를 얻게 된 천신도 많았고, 예류과에 도달한 천신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 경은 사실상 천상계의 존재에게 설해져 예외적으로 광범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몇 안되는 경 가운데 하나이다. 주석서 형식의 설명이 없고 대단히 간결하여 다소 불가해한 면이 없지 않으나, 오랜 세월 존중받으며 연구되어왔다. 마힌다 아라한이 스리랑카에 도착한 날 저녁에 설법한 것도 바로 이 경이었다. 또한 스리랑카의 유명한 연대기 「마하왕사」(14:34 이하)에는 무수한 천신이 이 경을 듣고서 법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이 경을 그토록 존중하고 이 경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향상의 과정에 있는 수행자가 스스로 어떤 재생을 하게 될 것인지 판별해내는 데 이 경이 도움을 준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향상의 높은 단계에 놓여있는 천신들은 때로 자신이 처한 천상계의 지위를 최종 불변의 상태로 여기고서 오욕(五慾)의 감각적 세계[欲界]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여기지만, 언젠가는 돌아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경에서 사리뿟따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지위를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경은 또한 올바른 길에 미처 들어서지도 못한 범부들에게까지도, 어떻게 정진해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값진 지침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리뿟따의 또다른 두 편의 설법은 「상기띠 숫따 (等訟經)」와 「다숫따라 숫따 (十上經)」로서 『장부』의 마지막 두 경(33, 34)이다. 이 두 경은 많은 분량의 표제어를 1에서 10까지의 산술적 도식에 따라 분류해 놓은 교학 용어의 편집서이다. 그 편집이 10의 항목까지만 이루어진 이유는, 10의 수치를 넘어선 교학 용어들은 수적으로도 매우 드물고, 또한 그런 용어들은 두루 알려져 있어서 쉽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기띠 숫따」는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설해졌으며, 경이 끝나자 부처님께서는 이 경을 분명히 인가하고 계셨다.

「상기띠 숫따」가 교학 용어를 단지 1에서 10까지 산술적으로 배열해 놓고 있는 반면에, 「다숫따라 숫따」는 각각의 수치 항목을 분류함에 있어서 그 용어군의 실질적 의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10가지 조목에 맞추어서 이를 분류해 놓고 있다. 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成法] (2)계발해내야만 하는 것[修法] (3)충분히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覺法] (4)떨쳐버려야 하는 것[滅法] (5)퇴보를 의미하는 것[退法] (6)향상을 의미하는 것[增法] (7)꿰뚫어보기 어려운 것[難解法] (8)살려야 하는 것[生法] (9)체험으로 알아야만 하는 것[知法] (10)깨달아야만 하는 것[證法].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란 무엇인가? 선근(善根)에 대하여 주의깊음이 그것이니… 떨쳐버려야만 할 것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떠하다'하는 아만심이 그것이니…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요지부동의 심해탈(心解脫)이 그것이다.

이 경은 부처님 교화 시기 중 비교적 말년에 편집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때는 이미 방대한 분량의 교설이 성립되어 있었으며, 손쉽게 이용되기 위해서는 더 짜임새를 갖추어야 할 경들도 조심스럽게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불법의 정수를 담고 있는 경문 선집들이 법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상기띠 숫따」는 마하위라라고도 알려져 있는 자이나교 지도자 니간타 나따뿟따가 죽은 직후에 설해졌다. 그가 죽자마자 자이나 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의견 차이와 교리적 상위(相違)와 종파 분립에 관한 이야기가 이 경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죽음이 사실상 이 경을 설하게 한 동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리뿟따는 자이나교의 내부 갈등이 표출되는 것을 보고 이를 불교도들에 대한 경책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말하기를, "이 경은 모든 대중이 이의 없이 화합하여 낭송하여야 한다. 이는 천신과 인간의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고귀한 삶[梵行]이 오래 지속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상기띠 숫따」가 설해진 의도에 대해서, 불법이 본디 지닌 직절성(直截性, 바로 분별하여 아는 것)이라는 훌륭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합의 향내음'이 교설에서 풍겨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이 경이 설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다숫따라 숫따」의 첫머리 게송에서 이 경을 설하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여기 다숫따라 경을 설하노니,

이는 열반을 얻기 위함이요

고를 멸하기 위함이요

윤회의 굴레에서 풀려나기 위함이다.

이 두 경은 정선된 교설에 대한 일종의 색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수없이 많은 경문을 일일이 다 기억하지 못하는 비구들이 교설의 무수한 면면에 얼른 다가가서, 그것을 쉽게 기억해내고 소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사리뿟따가 법을 영원히 지켜내기 위해 마음 쏟았다는 점과 그의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법이 털끝만큼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내려올 수 있었다는 점을 위의 두 경은 놀랍도록 잘 드러내고 있다. 사리뿟따가 이 경들과 『닛데사(Niddesa)』 같은 몇몇 경들을 '경학의 보조수단'으로 삼게 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에서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주석서

 

사리뿟따 존자가 경전에 대하여 했던 다른 법문들의 요약은 이 글의 끝에 싣도록 하고, 여기서는 그가 설했다고 전해지는 더 광범위한 주석서 성격의 경서들을 고찰해 보겠다.

선 『닛데사』는 경장의 소부(小部)에 속해 있다. 이 경은 빠알리 삼장 가운데 유일하게 주석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마하닛데사』는 『숫따니빠따』의 앗타까왁가(詩의 장)의 주석이고, 『쭐라닛데사』는 「빠라야나왁가(피안의장)」와 「칵가위사나 숫따」에 대한 주석인데 역시 『숫따니빠따』에 들어있다.

앗타까왁가와 빠라야나왁가는 『숫따니빠따』의 마지막 두 장이며 빠알리 삼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에 틀림없다. 『감흥어』에 보면 소나 장로가 앗타까왁가를 암송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증지부』에는 난다마따라는 여성 재가신도가 빠라야나왁가를 낭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두 장은 일찍부터 스님들과 재가신도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숫따니빠따』의 이 두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신 일이 다섯 번 이상이나 된다. 이 두 장이 높이 평가되어 왔다는 사실과 더불어 많은 고어들과 간결한 고문체로 구성되어있는 점을 보아 아주 초기에 이에 대한 주석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나중에 경장에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두 주석이 사리뿟따 존자에 의해서 설해졌다는 종래의 해석은 매우 타당성이 높다. 오늘날 빠알리 경전에서 발견되는 문장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주석의 핵심내용은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것이 틀림없다. 『닛데사』가 어휘설명과 문맥해설, 부처님의 말씀에 준거한 인용문 그리고 많은 동의어를 사용한 용어 설명 등 적절한 언어 교육을 위한 자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스님들의 체계적인 교육에 이 위대한 장로가 큰 관심을 가졌던 점과 잘 부합되는 것이다.

『마하닛데사』에는 앗타까왁가의 마지막 게송묶음인 「사리뿟따 숫따」에 대한 주석도 실려있는데, 이는 「테라빵하 숫따」라고도 불린다. 이 묶음의 첫머리는 부처님을 칭송하는 게송과 부처님께 드린 일련의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석서는 이들을 사리뿟따가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묶음의 첫 연이 삼십삼천에서 아비담마를 설하고 돌아오시는 부처님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마하닛데사』에서 설명하고 있다. 「사리뿟따 숫따」의 그 다음 부분은 사리뿟따가 여쭌 질문과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답변은 부처님께서 해주신 것이 틀림없다.

『무애해도(Pa.tisambhidaamagga)』는 한결 수준 높은 불교 연구의 교본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논서의 내용은 그 저자로 알려진 사리뿟따의 마음만큼이나 폭넓다.11) 이 책은 길고 짧은 30편의 논설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논설은 장편으로서 지식(~naa.na)의 일흔 두 가지 유형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고 두번째는 잘못된 사변적 견해(di.t.thi)의 유형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이 두 편에는 사리뿟따 특유의 체계적이며 통찰력 있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다른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에 관한 장'에는 『무애해도』의 특징인 교학 용어가 많이 담겨 있다. 경장 가운데 오래된 부분에서 간단히 다루어진 용어와 교설을 이 장에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자비관, 통찰력을 증진시키는 여러 가지 수행법 등 명상에 관한 것도 싣고 있는데 이것은 실수행에 대단히 큰 도움을 준다. 책의 중간 부분에 가면 주제가 다양하게 전개되어 지극히 아름다운 문장으로 여래의 위대한 자비심을 찬미하는 대목도 나온다. 이 논서의 주석인 「정법해설소(Saddhammappakaasinii)」를 쓴 마하나마 장로는 『무애해도』가 사리뿟따 장로의 저작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면서 첫머리 게송에서 이 위대한 장로를 감동적으로 예찬하고 있다. 『무애해도』에서 사리뿟따에 관한 언급이 두 차례 있는데, 한 번은 '신통력에 관한 장'에서 '삼매에 의한 조정력'을 지닌 분으로 나오고, 또 한 번은 '위대한 지혜의 장'(2:196)에서 "사리뿟따만큼 지혜로운 분이라면 부처님의 지혜에 버금가는 사람이다."라고 나온다.

 

아비담마

 

이제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아비담마의 편찬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담마상가니(法集論)』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삼십삼천계에 임하셔서 온갖 천상계로부터 모여든 천신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이 모임의 상석에는 도솔천 천신으로 다시 태어난 당신의 어머니 마야 왕비도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아비담마를 설하시던 석 달 동안 날마다 잠깐씩 인간계로 돌아오셔서 탁발을 하시곤 했다. 천상계에서 막 설하신 아비담마 부분의 '방법(naya)'을 사리뿟따에게 전수하신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앗타살리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부처님께서 분별지를 갖춘 상수제자에게 이렇게 방법을 전수하신 것은 마치 해변에 서서 손을 들어 대양을 가리키는 것과 같았다. 부처님께서 수백 수천가지 방편으로 설하신 가르침이 사리뿟따에게는 비로소 아주 분명하게 되었다."12) 그 이후 사리뿟따존자는 자신이 전수받은 것을 5백 제자에게 전해 주었다.

이어서 이런 말도 나온다. "아비담마의 본문순서는 사리뿟따가 정한 것이고, 『빳타나(發趣論)』의 순서 배열도 그가 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존자가 교리의 고유성을 손상함이 없이 순서를 정한 것은 법을 배우고 기억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기에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앗타살리니』에는 또한 사리뿟따가 아비담마 정본에 다음과 같은 기여를 했다고 써있다. (1)「아비담마마띠까」와 그에 이어지는 42대구(對句)로 된 「수딴따마띠까」, 이 둘은 일곱 논서의 서문 역할을 한다. 42 「수딴따」 대구는 『담마상가니』에 설명되어 있는데 이 또한 존자가 설한 것으로 보인다. (2)『담마상가니』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인 아툿다라깐다 즉 '개요'. (3)아비담마의 낭송을 위한 배열[誦道]. (4)『발취론』의 수치항목 등.

「아누빠다숫따(『중부』 111)」에는 사리뿟따가 선정의 각 단계를 차례로 거쳐 나와 매 단계마다 일어나는 주된 정신적 현상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분석해낸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언급하고 계시다. 이 분석은 『담마상가니』에 나오는 선정 의식에 관한 자세한 분석의 선구이자 초본으로 볼 수도 있다.

사리뿟따 존자가 법에 통달했고 해설도 능숙했던 것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상응부』 12:32)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법의 진수를 아주 잘 통달하고 있으므로 내가 하루 종일 이렇게 묻고 저렇게 물어도 적절한 말로 막힘없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하룻밤 동안, 또는 하루낮 하룻밤 동안, 또는 이틀낮 이틀밤 동안, 심지어 이레낮 이레밤 동안 이렇게 묻고 저렇게 물어도 사리뿟따는 그만큼의 시간 동안 적절한 말로 막힘없이 설명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를 황태자에 비유하신 대목도 있다. ( 『증지부』 5:132)

 

비구들이여, 어느 전륜성왕13)의 맏아들이 만약 다섯 가지 덕을 모두 갖추고 있다면, 아버지가 굴리던 통치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굴릴 것이다. 그래서 그 통치의 수레바퀴는 아무리 악의를 품은 사람이라도 뒤엎지 못할 것이다. 다섯 가지 덕이란 무엇인가? 전륜성왕의 맏아들은 무엇이 이로운 것인지를 알고, 무엇이 법인지를 알고, 무엇이 올바른 방도인지를 알고, 올바른 때를 알고, 그가 다스려야 할 백성을 아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도 이처럼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여래와 마찬가지로 수승한 법륜을 올바로 굴린다. 그래서 고행자나 비구, 신이나 브라만,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 법륜은 뒤엎지 못할 것이다. 그 다섯 가지 덕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사리뿟따는 무엇이 이로운 것인지를 알고, 무엇이 불법인지를 알고, 무엇이 올바른 방도인지를 알고, 올바른 때를 알고, 그가 설법할 대중을 안다.

법의 스승으로서 누렸던 사리뿟따의 위대한 명성은 사후에도 존속되어 후대의 불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약 300년 후에 쓰여진 『밀린다왕문경』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사리뿟따 존자와 비교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부처님 문하에서 법장이신 사리뿟따 존자를 제외하고는 그대만큼 질문에 잘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소."(『밀린다왕문경』 420)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 사리뿟따는 그 주옥 같은 가르침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드날리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은 부처님 말씀과 나란히 가장 오래된 불교문헌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전해지고 있다.

 

 

피안을 향하여

마지막 빚을 갚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는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신 해에 이르렀다. 세존께서는 웨살리 근처의 마을 벨루와가마에서 우기를 보내시고 안거가 끝나자 그곳을 떠나 몇몇 군데 들러서 사왓티의 기원정사로 돌아오셨다.

그곳에서 지혜 제일 사리뿟따 장로는 세존께 예를 올리고 나서 그의 거처로 갔다. 장로는 제자들이 절을 하고 나간 후에 거처를 말끔히 청소하고 나서 가죽방석을 깔았다. 그리고 발을 씻고는 결가부좌로 앉아 아라한과의 선정에 들었다.

사리뿟따는 미리 정해놓은 시간에 선정에서 깨어나 이런 생각을 했다. '정등각자들이 먼저 무여열반에 드는 것일까, 아니면 그분들의 상수제자들이 먼저 무여열반에 드는 것일까?' 그리고는 상수제자들이 먼저 무여열반에 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헤아려 보고 남은 기운이 이제 단 일주일을 지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디서 무여열반에 들게 될 것인가?'하고 살피던 중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라훌라는 삼십삼천의 천신들 사이에서 무여열반에 들었고, 안냐 꼰단냐 장로는 히말라야의 찻단따 호수에서 무여열반에 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서 최후를 맞게 될 것인가?'

이것을 거듭 생각하는 동안 어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자식 일곱이 다 아라한이 되었는데도 부처님도 불법도 승가도 믿지 않으신다. 그 믿음을 얻을 만한 근기를 갖추고 계신 걸까, 아닐까?'

그는 이를 관하여 보고 어머니가 예류도에 들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곤 이런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는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 진리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인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리뿟따 자신의 법문을 통해서만 어머니가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이런 생각을 하였다. '만약 내가 이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사리뿟따는 그리도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고요한 마음의 천신들에게 설법하던 날만 해도 수많은 천신들이 아라한과를 얻었고, 더 많은 천신들은 예류, 일래, 불환도를 증득했었다. 또 다른 때에 그 분이 삼보에 귀의하면 얼마나 즐거운지를 말씀해주시자 그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류과에 들었고 수많은 집안이 천상계에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자기 어머니는 정견(正見)으로 인도하지 못하다니!"라고 하겠지. 그러니 나는 어머니를 사견으로부터 해방시켜드리고 내가 태어났던 바로 그 방에서 무여열반에 들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그는 '오늘 당장 세존께 허락을 받고 날라까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자인 쭌다 장로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쭌다여, 내가 날라까로 가고자 하니 우리 5백 비구들에게 의발을 갖추어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해주오.' 쭌다 장로는 시키는 대로 행하였다.

비구들은 그들이 묵던 곳을 정돈하고 의발을 들고서 사리뿟따 장로에게로 왔다. 장로 또한 자신의 침소를 정돈하고 낮에 일보던 곳을 비질하였다. 그리고는 문 앞에 서서 그곳을 돌아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 곳을 보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로구나.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니.'

그리고는 오백 비구들과 함께 세존께 가서 경배한 후 이렇게 말하였다. "정각자이시며 일체지자이신 세존이시여, 허락하여 주소서. 제가 무여열반에 들 때가 되었나이다. 이제 목숨이 다하였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시여, 위대한 대각세존이시여!

저는 곧 이 삶에서 풀려납니다.

다시는 오고 감이 없으리니

세존을 우러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제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레만 지나면 짐 다 벗고

이 몸을 누이게 될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들어주소서! 세존이시여, 허락하소서!

마침내 제가 열반할 때가 되었나이다.

이제 저는 삶의 의지를 놓았습니다.

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만일 세존께서 "무여열반에 들어도 좋다."고 대답하셨다면 외도들은 그분께서 죽음을 예찬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고, 만일 "무여열반에 들지 말라."고 대답하셨다면 윤회의 굴레가 지속되는 것을 예찬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기에, 이를 아신 세존께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어디에서 무여열반에 들려 하느냐?"하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사리뿟따는 "마가다국 날라까 마을의 제가 태어났던 방에서 열반에 들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리뿟따여,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바를 행하여라. 하지만 승단의 형제들은 그대 같은 비구를 만날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법을 설하여 주어라."

이에 장로는 자신의 놀라운 법력을 다 드러내는 설법을 하였다. 불법의 가장 높은 경지로 올라갔다가 세간적 진리의 경지로 내려오고, 다시 오르기도 하고 또 내려오며 온갖 직설과 비유를 구사하여 법을 설하였다. 설법을 마치고 그는 세존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세존의 다리를 부여안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세존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 있기까지 무량겁에 걸쳐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아왔습니다. 제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는 만날 일도 스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 두텁던 인연도 다하였습니다. 저는 곧 늙음도 죽음도 없이 평화롭고 복되고 번뇌없이 안온한 곳, 수만의 부처께서 들어가셨던 그곳, 열반으로 들어갑니다. 저의 말이나 행동이 세존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점이 있다면, 세존이시여, 용서하소서!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언젠가도 부처님께서는 이에 대답하신 적이 있었다. "사리뿟따여, 그대의 말이나 행동에 꾸짖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대는 크고 넓고 밝은 지혜를 갖추었으며, 빠르고 예리하게 통찰하는 지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상응부』 8:7)

이번에도 세존께서는 똑같이 대답하셨다. "사리뿟따여, 그대의 청을 듣겠노라. 하지만 그대의 말 한마디 몸가짐 하나 거슬린 적이 없었다. 사리뿟따여, 이제 그대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여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세존께서 상수제자를 꾸짖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경우에도 실은 제자가 탐탁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이나 어떤 문제에 대한 새로운 대처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존의 허락을 받고, 사리뿟따가 엎드려 절하고 일어서자 대지가 포효하며 온 천지가 바다에 이르기까지 한 번 크게 진동했다. 그것은 마치 대지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메루 산 주변 이 첩첩의 산과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을 떠받치고 있는 나로서도 오늘 이처럼 쌓인 엄청난 덕은 감당할 수가 없구나!" 그리고는 크나큰 우레가 하늘을 갈라놓았고 먹장 같은 구름이 나타나더니 큰비가 쏟아져 내렸다.

세존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 '이제 법장을 떠나보내야겠다.' 그리고는 법상에서 일어나 당신께서 거처하시는 향실(香室)로 가서 보좌 위에 서셨다. 사리뿟따는 향실을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면서 동서남북에 절하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제가 아노마닷시 부처님 발아래 무릎꿇어 스승님 만나기를 서원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수십만 겁 전이었습니다. 그 서원이 이루어져 저는 드디어 스승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나 처음 뵈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뵈옵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뵈올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두 손을 합장한 채 세존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그것을 못내 참을 수 없어 대지는 또 한 번 바닷가까지 전율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주위에 둘러서 있던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가보도록 해라. 그대들의 사형을 따라가보도록 해라." 그 말씀에 사부대중이 바로 기원정사를 떠났고 그곳에는 세존께서 홀로 남아 계시게 되었다. 또한 그 소식을 들은 사왓티의 시민들도 향과 꽃을 받쳐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슬픔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적시고 울며 탄식하며 장로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이 길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하고 타이르며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를 따라오던 비구들에게도 말했다. "여러분들도 이제 돌아가십시오. 스승님 모시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모두 되돌려 보내고 나서 그는 자신의 제자들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장로의 뒤를 따르며 이렇게 한탄했다. "전에는 장로님께서 먼길을 떠나시곤 했지만 늘 돌아오셨지.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시는 거야!"

장로는 "벗들이여, 깊이 생각해보시오! 형성되고 조건지어진 모든 것은 진정 스러지기 마련입니다."하며 그들을 되돌려보냈다.

이 일주일의 여정 동안에 사리뿟따는 하룻밤을 지내면서 묵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드디어 고향인 날라까 마을에 도착한 저녁 무렵 그는 마을 어귀에 있는 벵골 보리수나무 근처에 멈추어 섰다. 마침 그때 장로의 조카인 우빠레와따가 마을 밖으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사리뿟따를 보았다. 그는 장로에게로 가서 예를 올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장로가 그에게 물었다. "할머니께서는 집에 계시던가?"

", 계십니다. 장로님."

"그러면 가서 우리가 왔다고 알려드리게. 그리고 만일 할머니께서 우리가 어찌 왔느냐고 물으시거든 이 마을에 하루 묵을 테니 내가 태어났던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시고 5백 비구들이 머물 처소도 마련해 주십사고 전해주게."

우빠레와따는 할머니에게 가서 말했다.

"할머니, 삼촌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어디 있더냐?"

"마을 어귀에 계십니다."

"혼자더냐, 아니면 누구 함께 온 사람들이 있더냐?"

"삼촌께서는 5백 명의 비구들과 함께 오셨습니다."

"어찌 왔다더냐?"하고 묻자 그는 장로가 시킨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사리뿟따의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얘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처소를 마련하라는 걸까? 젊어서 비구가 되더니 이제 늙은 나이에 속인으로 되돌아오겠다는 걸까?'

그러나 어머니는 장로를 위해선 그가 태어났던 방을, 비구들을 위해서는 따로 처소를 마련하였고 횃불을 밝히고 나서 장로를 부르러 보냈다.

사리뿟따는 비구들을 데리고 생가의 안뜰을 지나 자신이 태어났던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비구들에게는 그들의 처소로 가도록 했다. 비구들이 물러간 후 곧 장로는 심한 설사병이 엄습해서 큰 고통을 느꼈다. 양동이가 번갈아 몇 차례나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어머니는 '내 아들의 조짐이 좋지 않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방 문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럴 즈음 사천왕들이 "법장께서는 지금 어디 계실까?"라며 서로 물었다고 경에 써있다.14) 그들이 살펴보니 법장께서 최후의 숨을 거두려고 날라까의 태어났던 방 침대에 누워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마지막으로 그 분을 뵈러가세."

사천왕은 그 방에 도착하여 장로님께 예를 올리고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장로가 물었다.

"우리는 사천왕입니다, 존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병석에 계신 존자님을 돌보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여기도 돌보는 사람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돌아가도록 하시지오."라고 사리뿟따가 말했다.

그들이 떠난 뒤, 천신의 왕인 삭까[帝釋]가 같은 뜻으로 찾아 왔고, 그 다음에는 브라만[梵天]의 왕인 마하브라마[大梵天]도 왔다. 존자는 전과 같이 모두를 되돌려보냈다.

이처럼 천상계의 존재들이 왔다가 가는 모습을 보며 브라만 여인인 어머니는 '내 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떠나는 저들이 누구란 말인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는 장로가 있는 방의 문께로 가서 쭌다 장로에게 존자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쭌다 장로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우바이 노부인께서 오셨습니다."고 말하며 어머니의 질문을 그대로 전했다.

"어떻게 이런 시간에 오셨습니까?" 사리뿟따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보시게, 그대를 보러 왔다네. 그런데 제일 먼저 왔던 이들은 누구였소?"

"사천왕들이었습니다, 우빠시까여."

"그렇다면 그대가 그들보다 더 훌륭하단 말이오?"

"그들은 말하자면 절을 지키는 시자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스승님이 금생에 태어나신 후, 그들은 칼을 들고 스승님을 호위하고 있답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왔던 이는 누구였소?"

"천신들의 왕인 삭까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천신의 왕보다 더 훌륭하단 말이오?"

"그는 비구의 의발을 들고 따르는 사미와 같은 존재지요. 우리 스승님이 삼십삼천에서 돌아오셨을 때 삭까왕이 스승님의 의발을 들고 스승님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답니다."

"그럼 삭까왕이 돌아간 후에 그 뒤로 왔던 이는 누구였소, 방안이 온통 빛으로 환해지던데."

"우바이여, 그건 당신의 주인이자 스승인 마하브라마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이여, 그대가 나의 주인이신 마하브라마보다 더 훌륭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바이여. 우리 스승님께서 태어나신 날에 네 명의 마하브라마가 그 위대하신 분을 황금의 그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브라만 여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아들의 권세가 이 정도라면 내 아들의 스승이자 주인이신 분의 위력은 얼마나 크단 말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그 여인의 마음에 환희심과 기쁨이 일어 온몸을 가득 차 올랐다.

그 때 장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게 환희심과 기쁨이 일었으니 지금이 불법을 설해드릴 시간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우바이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요?"

"내 아들의 덕성이 그 정도일진대 그 스승님의 덕성은 어떨 것인가 생각하고 있었지요."

"나의 스승님이 태어나셨을 때, 그 분이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위대한 출가를 하셨을 때, 그 분이 성도를 하셨을 때, 그리고 초전법륜을 굴리셨을 때, 이 모든 때마다 수없이 많은 세계가 전율하고 진동했습니다. 계행, 선정, 지혜, 해탈, 그리고 해탈지견에 있어서 그 분에 필적할만한 이는 없습니다." 그리고나서 "참으로  세존은 이런 분이시니(Iti pi so bhagavaa),"라고 경배를 올리는 구절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렇듯 그는 어머니에게 부처님의 덕성을 근거로 불법을 설명해드렸다. 사랑하는 아들이 해주는 법문이 끝나자 이 브라만 여인은 예류과에 확고히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 사랑하는 우빠띠사여, 왜 이제야 말해주는가요? 불사의 감로 지혜를 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가요?"

이제 존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나는 어머니인 브라만 여인 루빠사리에게 나를 키워준 보답을 하였다. 이제 된 것 같다.' 그리고는 "우바이여, 이제 물러가십시오."라는 말로 어머니를 돌려보냈다. 어머니가 물러간 후 "쭌다야, 지금 시각이 얼마나 되었느냐?"하고 물었다.

"존자님, 이른 새벽입니다."

"비구들을 모두 모이도록 해라."

비구들이 모이자 존자는 쭌다에게 말했다. "쭌다야, 나를 일으켜 앉혀다오." 쭌다는 그대로 했다.

그러자 존자는 비구들에게 말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44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냈고 여러분과 행각도 함께 하였소. 이제까지 내가 말이나 행동으로 여러분을 불쾌하게 한 적이 있다면 용서해주시오."

비구들이 대답했다. "존자님, 비록 저희들이 존자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지만 존자님께서 저희들을 불쾌하게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존자님, 도리어 저희들이 잘못했다면 용서해주소서."

그리고나서 존자는 넓은 가사로 몸을 감싸고 얼굴도 덮고 나서 오른쪽을 아래로 하고 누웠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시게 될 때 하실 방식으로 선정에 들었다. 즉 순차적으로 아홉 단계의 선정에 들었다가 다음에는 역순으로 아홉 단계의 선정에 들었다. 그후에 다시 초선에서 순차적으로 제4선에 이르렀을 바로 그때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의 윗머리가 나타났고 그 순간 사리뿟따 존자는 무여열반에 완전히 들었다. 그날이 깟띠까 달의 보름날이었는데 이는 양력으로 시월과 십일월에 해당하는 달이다.

브라만 노부인은 자기 방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들은 좀 나은가? 말소리가 끊겼네.' 노부인은 일어나 장로의 방으로 가서 아들의 두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그러다가 장로가 죽은 것을 알고 그의 발아래 쓰러져 큰 소리로 한탄하였다.

", 사랑하는 아들이여! 그대의 덕성을 예전에 미처 몰랐었구나. 뭘 몰라서 수백의 비구들을 환대하지도 시주하지도 못해 좋은 복을 짓지 못했구나! 또 절도 하나 짓지 못했으니 그 복도 못 쌓았구나!" 노부인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렇게 탄식하였다.

해가 뜨자 노부인은 사람을 시켜 금은 세공인을 불러와 보물창고를 열도록 하고는 황금 몇 주머니를 큰 저울에 가득 달도록 했다. 그 황금을 금은 세공인에게 주어 장례용 장엄구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기둥과 아치를 세우고 마을 한가운데에 좋은 목재로 정자를 짓도록 했다. 정자 중앙에는 박공이 장식된 커다란 구조물이 세워졌고 그 둘레에는 아치와 기둥이 모두 금으로 장식된 난간이 둘러쳐졌다. 그런 다음 인간과 천신들이 함께 하는 성스러운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주일 내내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난 후 향기나는 갖가지의 나무를 쌓아 화장용 장작더미를 만들었다. 그 위에 사리뿟따 존자의 주검을 올려놓고서 향기나는 나무뿌리 몇 묶음으로 불을 지폈다. 밤이 새도록 화장은 계속되었고 대중들은 불법에 대한 여러 법문을 들었다. 그런 후에 아누룻다 장로가 다 타고 남은 불꽃을 향기나는 물로 껐다. 쭌다 장로가 유골을 주워모아서 거름망에 담았다.

그리고 나서 쭌다 장로는 생각을 했다. '나는 더이상 여기서 지체해선 안되겠다. 우리 큰 형님이시며 법장이신 사리뿟따 존자께서 입적하신 것을 정등각자께 말씀드려야겠다.' 그는 유골을 담은 천과 사리뿟따의 의발을 들고서 사왓티로 떠났다. 묵어야할 곳에서 하룻밤씩만 머물며 여정을 서둘렀다.

이상의 이야기는 「사리뿟따 상응」의 「쭌다경」 주석서에 쓰여있는 줄거리와 「대반열반경」의 주석서에 실린 같은 내용의 몇 대목을 덧붙인 것이다. 대화 부분은 「쭌다경(『상응부』47:13)」에서 따왔다.

 

쭌다경

 

한 번은 세존께서 사왓티에 있는 아나타삔디까의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마가다국의 날라까 마을에서 병으로 고통받으며 심하게 앓고 있었는데, 쭌다 사미가 시봉하고 있었다.

사리뿟따는 바로 그 병으로 숨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쭌다 사미는 존자의 발우와 가사를 가지고 사위성의 기원정사로 갔다. 그는 아난다 존자에게 다가가 절을 올린 뒤 한쪽 옆에 앉아 말하였다.

"존자시여, 사리뿟따 존자께서 입적하셨습니다. 여기 발우와 가사가 있습니다."

", 쭌다여, 이런 일이라면 세존을 찾아뵈어야 합니다. 우리 가서 세존을 뵙도록 합시다. 세존을 뵙고 이 일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존자시여."

그들은 세존을 뵈러 길을 나섰다. 기원정사에 도착한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 아난다 존자가 말씀을 올렸다.

"세존이시여, 쭌다 사미가 제게 말하기를 사리뿟따 존자가 돌아가셔서 그의 발우와 가사를 가져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말에 온몸에 맥이 쭉 빠져버렸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난다야, 어찌 이러느냐? 사리뿟따가 세상을 떠나면서 너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을 가져가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가 세상을 떠나면서 저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존이시여, 사리뿟따 존자는 저를 일깨워주고 격려해주고 기쁘게 해주고 법을 설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조언자이자 스승이고 교화자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비구들에게는 도움을 주는 이였습니다. 우리는 사리뿟따가 법을 가르침에 있어서 얼마나 활력과 즐거움과 도움을 주었는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난다야, 사람은 누구나 가깝고 사랑스러운 것과 언젠가는 헤어져야만하고 갈라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내가 이미 가르치지 않았더냐? 태어나서 존재를 이루고 합성되었기에 언젠가는 해체되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정녕코 있을 수 없다. 아난다야, 마치 거목에서 큼직한 가지가 떨어져나가는 것과 같이 사리뿟따도 이제 이 크고 건실한 비구 승단을 떠나게 된 것이다. 아난다야, 태어나서 존재를 이루고 합성되었기에 언젠가는 해체되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정녕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밖에서 귀의처를 찾지 말고 네 자신이 섬이 되어라. 네 스스로가 네 자신의 귀의처가 되어라. 다른 귀의처를 찾지 말고 불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불법을 너의 귀의처로 삼아라."

주석서에는 이러한 해설이 나온다. 세존께서는 손을 내밀어 유골이 담긴 천을 들어 손바닥 위에 놓으시고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얼마 전에 열반에 드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던 비구의 조개빛깔의 유골이다. 수만 겁의 무량한 세월동안 십바라밀을 구족하게 닦아온 사람, 이것이 바로 그 비구이다. 내가 초전법륜을 굴리는 데 있어서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 이것이 그 비구이다. 늘 내 옆자리를 지켰던 사람, 이것이 그 비구이다. 지혜를 펴는 데 있어서 우주법계를 망라하여 나 말고는 그 누구보다도 수승했던 사람, 이것이 그 비구이다. 위대한 지혜를 가졌던 자 그가 이 비구이고, 넓은 지혜와 밝은 지혜와 민첩한 지혜, 꿰뚫어보는 지혜를 가졌던 자가 이 비구이다. 이 비구는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줄 알았으며 은둔하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정진력이 넘쳐났으며, 동료비구들을 계도하여 나쁜 일을 그만두도록 하는 자였다. 5백 전생 동안의 공덕으로 얻어놓은 엄청난 재산을 버리고서 집을 떠나 출가하여 지냈던 사람, 이것이 그 비구이다. 나의 문하에서 대지와 같은 인욕심을 지녔던 사람, 이것이 바로 그 비구이다. 뿔을 잘라내버린 황소처럼 남을 해칠 줄 모르는 이, 이것이 바로 그 비구이다. 의지가지 없는 아이처럼 겸허한 마음을 지닌 사람, 이것이 바로 그 비구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이 유골을 보아라. 위대한 지혜, 넓고 밝고 민첩하고 예리하고 꿰뚫어보는 지혜를 지녔던 사람의 유골을.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줄 알았으며 은둔하기를 좋아하고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정진력이 넘쳐났던 그, 동료 비구들을 계도하여 나쁜 일을 그만두도록 한 그, 여기 그의 유골을 보아라.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한 제자를 칭송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5백 생 동안 출가하여

가슴속에 지녔던 즐거움을 털어버리고

모든 감관을 잘 다스려

격정에서 벗어났던 사람,

열반에 든 사리뿟따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대지처럼 인욕심이 강하여

자기 마음을 완전히 조복시켰고

자비롭고 다정하며 고요하고 냉철하여

거대한 대지처럼 굳건했던 그 사람,

열반에 든 사리뿟따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의지가지 없는 아이처럼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한 손에 발우를 든 채 마을에 들어가

이 집 저 집 유유히 갈 길 가던 사람,

사리뿟따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

열반에 든 사리뿟따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마을에서건 숲속에서건 그 무엇도 해치지 않고

뿔 잘라낸 황소처럼 살아가던 사람,

자신을 완전히 조복시켰던 그 사람,

사리뿟따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

열반에 든 사리뿟따에게 경의를 표하노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사리뿟따 존자의 덕을 칭송하시고 유골을 보존할 사리탑을 짓도록 당부하셨다.

그후 아난다에게 라자가하로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아난다가 비구들에게 알렸고, 세존께서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라자가하로 길을 떠나셨다. 그곳에 도착하셨을 때에는 이미 마하목갈라나 존자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번에도 세존께서는 목갈라나의 유골을 들어보이시고 사리탑을 세우도록 당부하셨다.

그런 뒤 세존께서는 라자가하를 떠나 갠지스 강을 향해 먼 길을 가셔서 욱까�라에 도착하였다. 갠지스 강둑으로 나아가신 세존께서는 따라온 비구들과 함께 앉으시고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무여열반에 관한 「욱까�라경(『상응부』 47:14)」을 설하셨다.

 

욱까�라경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왓지 지방의 욱까�라 마을의 갠지스 강가에 머물고 계셨다. 세존께서는 말없이 모여있는 비구들을 둘러보시고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입적하고 나니 이 자리가 정말 텅 빈 것 같구나. 내 곁에 회중이 없어서도 아니고,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머물 곳이 걱정되어서도 아니다.

과거에 오셨던 성스러운 이, 정등각자, 깨달은 이들 모두 여래처럼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같은 한 쌍의 훌륭한 상수제자들을 거느렸다. 미래에 오실 성스러운 이, 정등각자, 깨달은 이들도 또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같은 한 쌍의 훌륭한 상수제자들을 거느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 상수제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남 없이 행동하고, 스승의 조언에 그대로 따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고 놀랍도다. 그들이 사부대중에게 귀히 여겨지고 사랑받고 존경받고 추앙받는 것을 보면, 비구들이여, 참으로 경이롭고 놀랍도다. 그 상수제자들이 입적했을 때에 정각자에게 슬픔도 없고 비탄도 없는 것을 보면 참으로 경이롭고 놀랍도다. 태어나서, 존재를 이루고, 합성되었기에 언젠가는 해체되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정녕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밖에서 귀의처를 찾지 말고, 그대들 자신이 섬이 되어라. 그대들 스스로가 자신의 귀의처가 되어라. 다른 귀의처를 찾지 말고, 불법을 그대들 섬으로 삼고, 불법을 그대들 귀의처로 삼아라."

 

*****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사랑받는 법장이 될 젊은이 우빠띠사의 이야기는 이 심오하고도 감명 깊은 설법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 설법은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실 때까지 거듭거듭 강조하신 가르침이어서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사리뿟따 존자는 양력 시월과 십일월에 걸쳐있는 깟띠까 달 보름날에 입적하였다. 보름 후 초승달이 떠오르는 날에 목갈라나도 입적하였다.15)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 무여열반에 드셨다고 전해진다.

이 위대한 세 분의 상서로운 만남은 천신과 인간에게 그리도 고마운 축복이 되었는데, 이러한 만남이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을까? 우리는 그 답을 『밀린다왕문경』에 나오는 나가세나 존자의 말에서 알 수 있겠다. "폐하, 사리뿟따 존자는 수천 수만 생 동안 보디삿따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 아들, 조카, 그리고 친구였습니다."16)

이리하여 지루한 윤회의 바퀴도 마침내 멈추었다. 이 세 분은 윤회 속에서 적시에 서로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덧없이 흘러갈 뿐인 시간, 그 시간의 차원에서 초시간적 차원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생사의 윤회를 넘어서 불사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생에서 그분들은 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광명의 등불을 밝히셨다. 이 등불이 영원히 빛나기를!

 

 

 

사리뿟따와 관련된 경17)

 

사리뿟따 존자가 설했다고 알려져 있는 경은 간단한 도덕률에서부터 심오한 교설의 요지와 선정 수행에 이르기까지 고귀한 삶[梵行]과 관련되는 폭넓은 주제를 망라하고 있다. 아래에 각각의 주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곁들여진 목록을 싣기로 한다. 경장에서 이들이 배열되어 있는 순서는 설법의 시간적 선후관계에 따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교화 시기 중 어떤 때에 있었던 일인지를 알 수 있는 특정 사건이 거론되고 있는 경도 더러 있다. 「아나타삔디까경」이 바로 그런 경우로서, 이 경은 훌륭한 재가불자 아나타삔디까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설해진 것이다.

 

 

중부(Majjhima Nikaaya)

 

3: 『법의 상속자경[法相續經, 담마다야다 숫따]

 부처님께서 '법의 상속자' '세속의 상속자'에 관해 설법하시고 향실로 들어가신 후에, 사리뿟따는 세존께서 독거에 드셨을 때 수행자가 취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에 관해서 비구들에게 설해 주었다. 또 비구는 세속적인 것을 떨치고 수행에 전념해야 하며, 스승이 놓아버리라고 지적해준 점들을 놓아버려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홀로 있기를 좋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는 열 여섯 가지 마음속 번뇌의 해악(중부 7 참조)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 번뇌를 제거할 수 있는 중도적 처방이 바로 팔정도라고 결론지어 말하고 있다.

5: 『흠없음경[無垢經, 아낭가나 숫따]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과오를 저지르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 둘째는 과오가 있으나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 셋째는 과오가 없으며 이를 아는 사람, 넷째는 과오가 없으나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그것이다. 첫째가 둘째보다 낫고 셋째가 넷째보다 낫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경은 도덕적 진보와 정신적 향상을 위해서는 자기 성찰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9: 『올바른 견해의 경[正見經, 삼마딧티 숫따]. 본문 67-69쪽 요약 참조.

28: 『긴 코끼리 발자국 비유경[大象跡喩經, 마하핫티빠도빠마 숫따]. 본문 64-67쪽 요약 참조.

 

43: 『긴 문답경[大有明經, 마하웨달라 숫따]

무애해를 가장 잘 갖춘 것으로 알려진 마하꼬띠따 존자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서 사리뿟따 장로가 답변하고 있다. 장로는 그의 수준 높은 질문에 걸맞게 명료하고도 심오한 답변으로 응하고 있다. 이 문답에는 교학 용어에 대한 분석적 검토, 지혜와 정견이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선정의 오묘한 측면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69: 『굴릿사니에게 설한 경[瞿尼師經, 굴릿사니 숫따]

숲 속에 머무는 비구가 지켜야만 할 품행과 불법 수행에 관한 것이다.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질문을 받고서 장로는 도시나 마을 근처에서 지내는 비구들도 똑같은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97: 『다난자니에게 설한 경[陀然經, 다난자니 숫따]

사리뿟따는 다난자니라는 브라만에게 설명하기를, 재가 수행자가 계행을 지키지 못하고서도 이 일 저 일 세속의 책임을 다하며 살다보니 그랬노라고 변명을 해서는 안되며, 그런 이유로 내생에 받을 고통스러운 업보가 면제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훗날 다난자니는 임종할 무렵에 장로에게 자기를 한번 방문해 주십사고 부탁했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숨을 거두고 있는 다난자니에게 자비희사의 4범주처를 닦아서 범천으로 향할 것을 설해 주었다. 그 일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장로가 다난자니를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이끌어주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 은근히 나무라신 적이 있다. (본문 38-39쪽 참조)

114: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경[應習不應習經, 세위땁바아세위땁바 숫따]

 비구들이 실천해야 할 것, 수행해야 할 것, 사용해야 할 것과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간단히 지적하신 것을 사리뿟따가 소상히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에 대한 설명으로서 마음가짐과 견해, 여섯 가지 감각 대상[六境]과 비구의 일용품에 관한 것이다.

143: 『아나타삔디까에게 설한 경[敎給孤獨經, 아나타삔디꼬와다 숫따]

사리뿟따는 임종을 맞고 있는 아나타삔디까를 찾아가서 여섯 감각기관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집착을 품지 말라고 충고한다. "거사여, 그대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나는 눈에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식은 눈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거사여, 그대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다섯 가지 감각기관[六處]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六境], 여섯 가지 식[六識], 여섯 가지 촉[六觸], 촉에서 생겨나는 여섯 가지 느낌[六觸受], 여섯 가지 요소[六大: 地水火風空識], 오온(五蘊: 色受想行識), 사무색계(四無色界: 空無邊處, 識無邊處, 無所有處, 非想非非想處)의 각각의 항목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문구를 사용해 낱낱이 일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세계와 모든 다른 세계로부터 벗어날 것[出離],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 마음이 접촉하고 탐색하고 추구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말하면서 설법을 끝맺고 있다. 요컨대 출리 수행은 감관작용 - 죽어가는 사람은 거기에 온통 마음이 얽매이게 마련인데 - 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차원의 경험 영역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광범위한 영역까지를 망라하여 그토록 강인한 어조로 되풀이해서 출리 수행을 독려하는 이 설법은 정녕 숨져가는 불자에게 가슴 깊이 울리는 감화와 고요하고 자유롭고 환희에 찬 감격을 안겨 주었으리라. 이는 역량있는 스승이었던 사리뿟따가 의도한 바였음이 분명하다. 경에 보면, 아나타삔디까는 그때까지 들어보았던 어떤 설법보다 심오한 이 법문을 듣고 그 숭고함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씌어있다. 이 예만 보아도 사리뿟따의 설법이 얼마나 큰 감화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아나타삔디까는 곧 숨을 거두어 도솔천의 천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장부(Diigha Nikaaya)

28: 『신심을 고취하는 경[自我歡喜經, 삼빠사다니야 숫따]

부처님 계신 자리에서 사리뿟따가 부처님의 공덕을 잘 드러내어 찬미한 것으로서 불법의 위없음(無上)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를 보면 사리뿟따가 부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신뢰감은 정당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의 첫 부분은 대반열반경에도 실려있다.

33: 『교설의 낭송[等訟經, 상기띠 숫따] (6970쪽 참조).

34: 『십상법을 설한 경[十上經, 다숫따라 숫따』 (6970쪽 참조).

 

증지부(Anguttara Nikaaya)

2:35: 『사마�따경[平等心經.]』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에 대한 경으로서, 그들 앞에 아직도 남아있는 재생이 어떤 요인에 의해 결정될 것인가를 설하고 있다(6869쪽 참조).

3:21: 성자(ariyapuggala)를 또 다른 방법으로 분류하여, 육신으로 증명한 이[身證者, kaayasakkhi], 정견을 얻은 이[得見者, di.t.thippatta], 그리고 신심으로 해탈한 이[信解脫者, saddhaavimutta]로 나누고 있다.

4:79: 사리뿟따는 부처님에게 왜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며 어떤 사람은 기대한 것보다 사업이 더 발전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비구들을 위한 보시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4:158: 마음의 선근이 상실되었는지 유지되고 있는지를 드러내주는 네 가지에 관한 경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음 네 가지 성질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선근을 잃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퇴행이라고 부르셨다. 이 네 가지란 탐욕이 무성한 것, 증오가 무성한 것, 미혹이 무성한 것, 그리고 혜()를 닦는 여러 가지 심오한 주제에 대해 지식과 지혜가 결여된 것을 말한다. 반면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다음의 네 가지 성질을 찾을 수 있다면 선근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향상이라고 부르셨다. 이 네 가지란 탐욕이 줄어든 것, 증오가 줄어든 것, 미혹이 줄어든 것, 그리고 혜를 닦는 여러 가지 심오한 주제에 대해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4:167-168: 향상의 도상에 있는 네 가지 성과(聖果)에 대해 말하고 있다.

4:172: 부처님께서 개별적 존재(attabhava, 我有)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해 간단히 말씀하셨던 것을 사리뿟따가 다시 소상히 설명하고 나서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이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에 관해서는 사리뿟따가 나중에 「사마�따 숫따(평등심경)」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4:173: 사리뿟따는 수계한 지 2주만에 아라한과를 이루었을 때 사무애해(pa.tisambhidaa-~naa.na)를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부처님께 이를 인가해 주십사고 청한다.

4:174: 분별망상이 미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마하꼬띠따 존자와 토론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촉처[觸處, phassaayatana]의 여섯 바탕인 육처(六處)의 작용이 미치는 곳까지는 분별망상(papa~nca, 妄分別)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분별망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한 육처의 작용이 미친다. 촉의 여섯 바탕인 육처가 완전히 사라지고 끊어져야만 분별망상의 세계도 적멸하여 고요해지게 된다."

4:175: 고를 멸하기 위해서는 앎과 올바른 행위(vijjaacara.naa)가 겸비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4:179: 금생에 열반을 성취하는 까닭과 그러지 못하는 까닭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5:165: 사람들이 왜 질문을 하게 되는가를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우둔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둘째 사악한 의도나 탐욕심 때문에, 셋째 알고 싶은 욕망으로, 넷째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다섯째 '상대방이 내 질문에 올바르게 답변한다면 좋은 일이고, 그러지 못하면 내가 올바른 답변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라고 말한다.

5:167: 동료 비구를 견책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6:14-15: 비구가 좋은 죽음 또는 나쁜 죽음을 맞게 되는 원인에 관한 것이다.

6:41: 신통력을 가진 비구는 마음만 먹으면 아름드리 나무둥치를 지()로도, ()로도, ()로도, ()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모든 요소가 나무에 들어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사리뿟따는 설명하고 있다.

7:66: 존중과 경의에 관한 것이다. 사리뿟따는 불선업을 극복하고 선업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불·법·승에 대한 존경, 또 수행, 선정, 정근, 온화함과 공경심에 대한 존중을 꼽고 있다. 이들 각각의 항목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항목에 대해 전제조건이 된다고 말한다.

9:6: 사람, 가사, 시주물, 숙소, 마을, 도시, 국가 등에 관하여 알아두어야 할 두 가지 사항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사귀어야 할 것인가 사귀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 가사, 시주물, 숙소를 사용해야 할 것인가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 마을, 도시, 국가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 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9:11: 다른 비구로부터 누명을 썼을 때 부처님 계신 자리에서 터뜨린 사리뿟따의 '사자후'이다.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서 자신이 분노로부터 자유롭다는 점과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남을 해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4149쪽 참조).

9:13: 고귀한 삶의 목적에 관하여 마하꼬띠따와 논의하고 있다.

9:14: 사리뿟따는 사밋디 존자에게 법의 정수에 관해 질문하고서 그의 답변에 수긍하고 있다.

9:26: 이 경은 사리뿟따가 심지어 자기를 적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조차도 공정함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데와닷따의 한 추종자가 자기 스승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꾸며냈음직해 보이는 말을 전하자, 사리뿟따는 그 말을 바로잡아 준다. 나중에 사리뿟따는 그 비구에게 그 어떤 매혹적인 감각 인상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충분히 계발된 굳건한 마음에 대하여 설해주고 있다.

9:34: 열반에 관한 경으로서, 열반은 느낌을 넘어선 행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10:7: 사리뿟따가 그의 선정 수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선정에 들었을 때 자신에게는 '열반은 형성과정의 종식이다.'하는 유일한 인식만이 남아 있었노라고 말한다. 37쪽 참조.

10:65: 재생은 고통()이요 재생이 없으면 행복()이다.

10:66: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것은 행복()이고, 거기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다.

10:67-68: 선근을 함양하는 데 있어서의 향상과 퇴행의 원인에 관하여 설하고 있다.

10:90: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과위를(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도과를 얻었음을 입증해주는, 증명해주는) 열 가지 능력에 관한 경이다.

 

상응부 (Samyutta Nikaaya)

12. 『인연 상응(Nidaana Samyutta)

24: 사리뿟따는 고(, dukkha)가 자신에 의해 생기는가 남에 의해 생기는가 하는 양자택일의 답을 거부하고, 감각 접촉을 통한 고의 연기적 발생(감각 접촉을 통하여 괴로움이 조건지어져 발생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25: (dukkha)에 대해 말한 것처럼 낙(, sukha)에 대해서도 위와 똑같이 말하고 있다.

31: 존재는 네 가지 자양분에서 비롯하여 연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설하는 경이다.

32: 「깔라라 숫따」. 부처님의 질문에 대한 사리뿟따의 답변이다. 그는 생의 원인이 소멸되었고 그 결과인 재생도 소멸되었음을 알고서 아라한과를 증득했음을 공언할 수 있는 지견이 열렸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라한과의 증득을 공언하는 정형구인 "생은 소멸되었고…(khinajaati)"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부처님께서 태어남[], 형성 과정[], 그리고 느낌[]에 이르기까지의 연기의 다른 고리가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서도 더 질문을 하시자 이에 답변하고 있다. 사리뿟따는 이 느낌에 대한 관조[受隨觀]을 통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는 출발점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세 가지 느낌[, , 不苦不樂의 三受]에서 무상과 고를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에게는 쾌락적 만족(nandi)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22. 『온 상응(Khandha Samyutta)

1: "비록 몸이 아플지라도 그 때문에 마음까지 아파서는 안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사리뿟따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먼 지역으로 떠나는 비구들이 외도들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를 사리뿟따가 가르쳐 준다. 그는 오취온의 욕망을 떨쳐내는 것이 불법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122-123: 오취온에 대해 반조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계행이 바르고 배움이 많은 비구가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관조한다면 예류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에든 비구가 이와 같이 관조해 나아가면 그는 다음 단계의 더 높은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라한도 역시 오온을 이렇게 관조해야 하며, 그로써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누릴 수 있고,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알아차림을 지닐 수 있다.

126: 무지와 지혜해 대해 말하고 있다.

28. 『사리뿟따 상응』

1-9: 사리뿟따는 이 아홉 경에서 자신은 초선에서부터 상수멸(想受滅)에 이르기까지의 아홉 단계의 선정을 모두 닦았으며, 그 과정에서 '나라'는 생각은 아예 없었노라고 말한다.

10: 언젠가 사리뿟따는 라자가하에서 탁발을 다녀온 후 담 밑에서 공양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해맑은 얼굴'이라는 뜻을 가진 수찌무키라는 이름의 여수행자가 그에게 다가와 말하기를, 외도 수행자들이 그러듯이 당신도 식사를 할 때 어느 한 방향을 정해 앉느냐고 물었다. 사리뿟따는 그녀가 그릇된 생활 방식[邪命]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는 그런 것은 아예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올바른 방식으로 탁발을 다니며 이렇게 얻은 음식을 올바르게 먹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수찌무키는 그때부터 마을마다 거리마다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불법 수행자들은 올바르게 음식을 취합니다! 그들은 나무랄 데 없이 음식을 취합니다! 불법 수행자들에게 음식공양을 올리십시오!"

35. 『육처 상응 (Sa.laayatana Samyutta)

232: 우리를 존재에 묶어두는 족쇄는 감각도 감각 대상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다.

38. 『잠부카다까 상응 (Jambukhaadaka Samyutta)

사리뿟따는 외도 은둔수행자였던 그의 조카 잠부카다까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1-2: 그는 열반이나 아라한과 모두 탐진치가 제거된 상태라고 정의한다.

3-16: 사리뿟따는 진리를 밝힌 사람들에 관한 질문, 고귀한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 참된 위안을 찾아낸 사람들에 관한 질문 등에 대답하고 있다. 그는 느낌, 무지, 번뇌, 개아(個我) 등을 설명하고 불법을 이해하고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에 대해 말한다.

48. 『근[](인드리야) 상응 (Indriya Samyutta)

4418):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五根; 信 進 念 定 慧]이 열반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사리뿟따는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에 의해서 알게 되었노라고 부처님께 대답하고 있다.

48-5019):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20)

55. 『예류 상응 (Sotaapatti Samyutta)

4경 등: 예류도의 조건(sotaapattiyanga)이 되는 네 가지 요소21)에 관하여 설하고 있다.

 

 

덧붙이는 말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사리에 관한 기록

보팔의 산치 언덕에는 10()의 사리탑이 있는데 그것은 아직까지 인도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탑들은 그 축조 형태나 조각 양식으로 보아 불교 예술 전성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인정되며 탑의 이곳 저곳에 쓰여진 글자로 미루어 그 시기는 아쇼카 왕 시대인 기원전 삼 세기 중반쯤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중에는 보존상태가 좋은 것도 있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흙무더기나 돌무더기로 되어버린 것도 있다.

1851년에 알렉산더 커닝햄 경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의 성스러운 유골을 발굴한 것은 바로 이들 탑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제 삼 사리탑에서였다. 비슷한 시기에 산치에서 10km쯤 떨어진 사타다라에 있는 사리탑에서도 이 두 훌륭한 아라한의 사리가 더 발굴되었다.

커닝햄은 산치 언덕의 사리탑 한가운데에 버팀목을 박다가 길이 150cm가 넘는 넓은 석판이 남북으로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석판 밑에는 회색 사암으로 된 두 개의 상자가 있었는데 그 뚜껑에 각각 브라흐미 문자로 된 짧은 명문이 있었다. 남쪽의 상자 뚜껑에는 '사리뿟따의 사리(Saariputtasa)'라는 뜻의 글이 있었고 북쪽의 것에는 '마하목갈라나의 사리(Mahaa-Mogallaanasa)'라고 되어 있었다.

남쪽의 상자 안에는 넓이가 15cm에 높이가 7cm가 좀 넘는 동석(凍石)으로 된 넓고 납작한 함이 들어있었다. 겉면은 단단하고 반들반들 닦여 있었고 선반작업으로 세공한 그 함은 아름다운 예술작품이었다. 함의 둘레에는 다비식에 쓰였던 것 같은 백단향 나무조각이 놓여있었고 함 속에는 유골 하나와 여러 가지 보석들이 함께 있었다. 이 사리뿟따 존자의 유골은 길이가 3cm가 채 안되었다.

북쪽 상자 안에도 동석으로 된 함이 있었는데 사리뿟따의 것보다 약간 작았고 겉면도 덜 단단했다. 그 안에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사리가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큰 것은 길이가 1.5cm가 채 못되었다.

동석으로 된 두 개의 이들 함 뚜껑 안쪽에는 먹물로 글자가 하나씩 써 있는데 남쪽 것에는 사리뿟따를 가리키는 'Sa', 북쪽 것에는 마하목갈라나를 가리키는 'Ma'가 써있었다. 커닝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는 부처님의 상수제자로서 흔히 그분의 오른쪽 제자, 왼쪽 제자라고 불리었다. 그들이 죽은 후 그 유골도 생전에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대로 부처님의 오른쪽과 왼쪽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22) 관례상 부처님께서 동쪽을 향하여 앉으셨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이 말은 옳다.

커닝햄은 사타다라에서 '불교 기념물(Buddha Bhita)'이라 불리던 탑들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서 엷은색 반점 무늬의 동석함 두 개를 발굴했다. 산치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두 함에는 각각 '사리뿟따의 것', '마하목갈라나의 것'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사리탑은 도굴되었던 흔적이 있으나 유골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아주 유능한 고고학자였던 커닝햄은 그가 발굴했던 모든 사리탑에 관하여 세밀한 기록을 남겨놓았다. 커닝햄에게 특히 감사할 일은 이 사리의 주인을 확실하게 밝혀주었다는 점이다.

이 두 군데 사리탑에서 나온 사리들은 영국으로 옮겨져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커닝햄이 서술해 놓은 함의 생김새와 현재 사리들이 모셔져있는 함의 생김새가 다소 일치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커닝햄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산치의 사리를 사타다라에서 발굴된 함 속에 옮겨 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치에서 발굴된 동석함의 행방은 묘연하다.

이 성스러운 사리들은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왔는데 1939년 마하보디협회(Maha-Bodhi Society)가 그것을 인도에 돌려달라고 영국정부에 요청했다. 이 청원이 즉각 받아들여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사리의 안전수송이 어려워 연기되어 오다가 1947 2 24일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에서 사리들은 마하 보디협회 대표들의 손에 전해져 본디 묻혀있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사리들은 인도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 스리랑카 국민들은 기쁨에 넘쳐 지극한 공경심으로 사리를 친견하였다. 1947년에 콜롬보 박물관에서 두 달 반 동안 대중에게 공개되었는데 2백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불자들은 물론 힌두교도, 기독교도, 회교도들도 이 사리 친견의 행렬에 참석했다.23)

이 사리를 산치에 재봉안하기 위해 조성되는 예배처에 안치하기 전에 사리가 두번째 옮겨진 곳은 캘커타였다. 인도 마하보디협회 본부가 있는 캘커타 다르마라지까 사원에서 대중들의 친견행사가 있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은 신심 어린 경배의 장면이 벌어졌다. 두 주일 동안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길게 늘어선 친견 행렬이 끊일 줄을 몰랐다. 친견에 참여한 사람 대부분은 힌두교도였지만 그 중에는 회교도들도 꽤 많았다. 공경심 어린 그들의 지극한 경배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인도가 낳은 이 위대한 두 아들의 사리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주 먼 지방에서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 다음 미얀마 정부로부터 사리친견 행사를 열고 싶다는 청원이 들어왔고 그 요청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사리친견 행사는 미얀마 고대의 종교적 열정과 온갖 화려함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국민에게 사리친견의 기회를 고루 베풀기 위해서 이 행사는 만달레이로부터 양곤에 이르기까지 이라와디 강을 따라 내려오는 강변축제의 형식으로 행해졌다. 사리를 봉송하는 배는 미얀마 전통 방식으로 장식된 여러 척의 작은 배들의 호위를 받았다. 사리가 강가의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은 행렬을 지어 그 마을의 가장 중요한 탑으로 사리를 옮겨 모시고 친견행사를 가졌다. 이와 동시에 법회도 열어 이웃 마을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설법과 독경을 들으러 모여들었고 이 의식은 대개 밤을 지새우며 계속되곤 했다.

이어서 사리는 네팔과 라다크 정부의 요청으로 친견행사를 위해 또다시 옮겨졌다.

사리가 다시 인도로 돌아온 후, 미얀마 정부는 이 성스러운 사리의 일부를 모셔가야겠다고 청원했다. 인도 마하보디협회는 이에 동의했고 미얀마의 총리가 직접 사리를 받으러 캘커타로 갔다. 1950 10 20일 사리의 일부가 성대한 의식과 함께 총리에게 전해졌다. 미얀마로 가져온 사리는 후에 양곤 근처 제6차 불전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세계 평화탑 속에 봉안되었다. 사리를 봉안하고 탑의 상륜부를 얹는 다양한 의식절차가 1952 3 5일부터 11일까지 정성스럽게 진행되었다.

다른 일부의 사리는 스리랑카에 전해졌는데 그곳 마하보디협회는 그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새로운 탑을 건립하였다. 필자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사리는 그 탑이 완성될 때까지 콜롬보의 마하 보디협회 사원에 모셔져 있었다.

남은 사리는 1952 11 30일에 산치에 새로 축조한 쩨띠야기리 예배처에 여법한 절차를 거쳐 봉안되었다. 신심 깊은 순례자들이 세계 곳곳으로부터 찾아와 경배하는 이 사리는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장 훌륭하게 열매를 맺었던 이 두 분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영원히 일깨워주고 있다.

 

[주 해]

1) 쭌다경(Cunda Sutta; 念處相應 Satipa.t.thaana Samyutta)과 그 주석서에 의하면 그가 태어난 곳은 날라까 아니면 날라가마 중에 한곳일 것이다. 아마도 이 곳은 그 유명한 날란다와 꽤 가까웠던 것 같다. 브라만이었던 사리뿟따의 아버지의 이름은 와간따(Vaganta)였다(『법구경』 주석서 75).

2) Ye dhammaa hetuppabhavaa

    tesam hetum tathaagato aaha,

    tesa~n ca yo nirodho

    evamvaadi mahaasama.no.

이 게송은 후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었으며 사리뿟따와 불법의 첫 만남과 동시에 그의 위대한 스승인 아라한 앗사지를 기억하게 하는 귀중한 게송이 되었다. 인연법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오늘의 철학적 사고로 음미해 보아도 초기 불교도들의 마음에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남전대장경 『율장』 大品 : "제법은 인연에서 생겨나고/ 여래는 그 인연을 말씀하신다/ 제법의 소멸 역시/ 대사문은 이 같이 말씀하신다." ; "사물은 그 원인이 있어서 생겨난다. 그 원인과 그 멸각을, 석존은 말씀하신다").

3)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4) 「디가나카경(『중부』 74).

5) 사무애해(四無碍解, pa.tisambhidaa-~naa.na) : 자유자재하며 거리낌없는 이해능력 및 언어적 표현능력으로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1.법무애해는 온갖 교법에 통달한 것. 2.의무애해는 온갖 교법의 요의를 아는 것. 3.사무애해는 여러 가지 말을 알아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 4.변무애해는 온갖 교법을 알아 근기에 따른 설법에 자유자재한 것.

6) 라꾼띠까는 '난쟁이'란 말인데, 이 분이 키가 아주 작아서 붙여진 별명임.

7)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리뿟따의 게송을 다루고 있는 『장로게』 주석서에도 나온다.

8) 『숫따니빠따』 316

9) 자만(maana)과 들뜸(uddhacca)은 아라한의 경지에 가서나 소멸이 되는 다섯 가지 족쇄(samyojana) 중의 두 가지이다. 근심(kukkucca)은 불환의 경지(anaagaamii)에서 이미 사라지는 것이다.

10) 이 경의 주석서를 보면 물론 부처님들께서는 그러한 일을 스스로 다 알고 계시면서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깨우쳐주기 위해 짐짓 그런 질문을 하신다.

11) 나냐몰리 스님의 번역판은 「분별의 길」 (PTS,1982)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부분은 그 스님의 선집인 「호흡관」(BPS,1964)에 실려있다.

12) 『앗타살리니』 PTS 16-17, The Expositor, 1:20-21 참조.

13) 불교경전에서 덕을 바탕으로 가장 이상적인 세속통치를 하는 왕.

14) 사천왕은 욕계(sensual realm)의 가장 낮은 하늘을 주재하는 천신들이다. 네 구역을 각 천신이 하나씩 맡아 통솔하고 있다.

15) 욱까�라경의 주석서에 의함.

16) 『밀린다왕문경』 204, 호너 , 「밀린다왕의 질문」 1:295.

17)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경의 번호는 모두 미얀마에서 1957년에 거행된 6차 결집본을 근간으로 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PTS 본과 경의 수가 다른 경우가 있다. 이는 PTS 본에서는 중간에 같은 경이 반복되어서 나오는 것을 생략하여 번호를 매겼기 때문이다. 두 본의 경 번호가 차이날 때에는 주에서 밝히겠음.

18) PTS 본에서 44.5.4번 경임. p.S.v.221 참조.

19) PTS 44.5.10 p. S.v.226

20) 이 부분은 「지혜의 길」(BPS 법륜 65, 66)에 영역되어 있음.

21) 첫째, 부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둘째, 불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 셋째, 승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 넷째, 고귀한 자들이 좋아하는 계율을 구족함.

22) Bhilsa Topes, p.300 참조.

23) 「산치의 볼거리」, p.28 참조 

 

 

법륜·열 넷 사리뿟따 이야기

1999 4 20 1 1쇄 인쇄
1999 4 30 1 1쇄 발행

펴낸곳 : 사단법인  고요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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